(키이우=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전쟁이 터진 지 2주가 지난 3월 14일 오전 5시.
불시에 울리는 공습 사이렌에 자는 둥 마는 둥 잠을 설치던 세레멕트 올렉(57) 씨는 엄청난 굉음과 충격파에 눈이 번쩍 뜨였다.
"벽에 걸어놨던 TV가 반대쪽 벽으로 날아가 부닥칠 정도였어요"
유리창은 당연히 산산이 조각났다. 옷걸이에 걸어놨던 옷에는 숭덩숭덩 구멍이 생겼다.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다친 고양이 '지주'만 안고 아파트 밖으로 기어 나왔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오볼론에 있는 9층짜리 아파트 1층에 있던 올렉 씨의 집은 그렇게 사라졌다.
뉴스에서만 보던 미사일이 그날 새벽 올렉 씨의 아파트를 그대로 때린 것이다.
"기어이 올 게 왔구나 싶었습니다. 정신없이 건물을 빠져 나왔어요"
1층에 있었던 덕분에 올렉 씨는 바로 밖으로 탈출해 구사일생할 수 있었지만 4층에 살던 40대 남성이 질식으로 즉사했고, 병원으로 옮겨진 사람까지 합치면 이 아파트에서 총 4명이 숨졌다.
올렉 씨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로 안내했다.
폭격으로 건물 골격이 무너져버려 아파트 현관이 막힌 바람에 불에 탄 침대 매트리스의 스프링을 계단 삼아 담을 넘어야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올렉 씨의 집 안은 무엇 하나 제대로 남지 않은 '난장판'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부서졌고, 벽지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과 콘크리트 덩어리, 온갖 가재도구와 책이 널브러져 있어서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폐허가 된 아파트의 방안을 살피는 올렉 씨는 절망과 체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는 63㎡(약 20평) 크기의 이 아파트에서 16년간 반려묘와 동고동락했다고 한다. 그 세월 동안 켜켜이 쌓였을 삶과 추억이 단 한 방의 미사일과 함께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현실은 그에게 여전히 초현실적이다.
졸지에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올렉 씨는 키이우에서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65㎞ 떨어진 곳에 지은 지 200년도 넘은 선친의 작은 집을 임시 거처로 삼아야 했다.
키이우를 떠난 뒤 좀처럼 찾지 않았던 그가 10일(현지시간) 아파트에 들른 이유는 건물 철거 작업에 동의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아파트가 폭격당한 지 90일만 이다.
키이우 시 당국은 열흘 전부터 이 아파트를 철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올해 9월까지 재건을 마치겠다고는 했지만 올렉 씨는 이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전기공으로 일하는 올렉 씨는 러시아가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수입이 뚝 끊겼다. 주로 대규모 건설 현장에서 일을 받았는데 전쟁으로 공사가 완전히 중단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올렉 씨는 "재산 피해는 물론 미사일 폭격 뒤 공황장애에 시달려 조만간 정신상담을 받으려고 하는데 지원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라에서는 전쟁이 끝나면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집도 없고, 일도 없고 곁을 지켜주던 고양이마저 없어졌다"고 털어놨다.
올렉 씨가 좋아하는 프랑스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의 별명을 따서 이름을 지은 고양이 '지주'는 폭격으로 큰 상처를 입었고 동물병원에서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곁을 떠났다.
애를 끊는 이야기를 할 때 올렉 씨는 오히려 담담했다. 러시아군의 미사일은 아파트뿐 아니라 그의 감정까지 폭격한 듯했다.
친구와 친척에게 도움을 받아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올렉 씨는 누군가 안부를 물어올 때마다 "오늘은 먹을 게 일주일 치나 남아서 괜찮다는 식으로 농담을 한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건설 현장에 일하면서 다져진 다부진 체격에 인터뷰 내내 애써 씩씩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올렉 씨였지만 그런 그에게도 전쟁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라고 했다.
"전쟁이요? 당연히 두렵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저를 도와주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는데. 내일은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이렇게 살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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