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글라스노스티 정책으로 소련 국민은 생각한 바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았다. 시장 경제 요소의 도입과 기업활동의 자율화에 초점을 맞춘 페레스트로이카는 침체에 빠진 소련 경제에 상당 정도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역대 소련 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매력적이고 지적인 외모를 가진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고 TV를 통한 대국민 연설을 즐겼다. 그는 타고난 웅변가였다. 소련의 역대 퍼스트레이디와는 달리 부인 라이사 여사도 대중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신사고'에 바탕을 둔 외교 분야에서 가장 속도를 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집권 8개월 만인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화해의 악수를 함으로써 수십 년간 계속돼온 양국 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초석을 놓았다.
이어 미국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및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하는가 하면 동유럽 주둔 소련군 50만 명을 일방적 감축하는 등 굵직굵직한 군축 조치가 뒤따랐다. 이 같은 미-소의 화해 분위기는 마침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독일 통일과 동구권 민주화의 촉매제가 됐다.
그는 또 1988년 5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을 철수하기 시작해 이듬해 2월까지 철군을 완료했다. 1989년 몰타 미-소 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한 데 이어 1990년 여름 동ㆍ서독의 통일을 수락했으며 통일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잔류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 같은 해 한-소 수교라는 역사적 선물을 한국민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려다 끝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0년 여름 급진적 경제개혁안인 '샤탈린의 5백일 개혁안'을 거부해 개혁파 인사들과 틈이 벌어졌고, 1991년 8월엔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던 도중 쿠데타를 일으킨 보수파들에 의해 연금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보수파의 쿠데타는 비록 '3일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소련 지도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보수파의 쿠데타 이후 그는 보수적 내각을 물갈이하는 동시에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 등 발트3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개혁 조치들을 마련했으나 이미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91년 12월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한 데 뒤이어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소련 소속 11개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선언함으로써 소련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해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소련 대통령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경직된 소련 사회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으려 했던 그는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개혁의 가속도에 떠밀려 무너지고 말았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31년 3월 러시아 남부 스타브로폴 지역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직접 콤바인을 운전하며 농사일을 하는 등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19세에 모스크바대 국립대(MGU) 법대에 입학하고, 21세 때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출세의 기반을 마련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53년 라이사 티타렌코와 결혼했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공산당 조직에서 일하던 고르바초프는 소련 시절 휴양지로 유명한 스타브로폴을 자주 찾은 공산당 지도부의 눈에 띄어 1971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격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활용한 그는 1980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치국원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1982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 사망 이후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 집권기간 중 줄곧 2인자의 자리를 지키던 고르바초프는 1985년 체르넨코 사망 후 드디어 소련 최고의 권력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될 수 있었다.
그는 냉전 해체와 독일 통일 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91년 권력에서 물러난 뒤 사회ㆍ정치ㆍ경제 연구소인 '고르바초프 재단'을 설립해 학술과 강연 활동에 전념해왔다. 1996년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에 맞서 러시아 대선에 출마해 재기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0.5%라는 보잘것없는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강대국 소련의 패망을 몰고 온 장본인'이란 국내의 부정적 이미지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1999년 9월 부인 라이사 여사의 사망에 따른 심적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한 이후에도 왕성한 외교ㆍ학술 활동을 펼치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2기 정권(2004~2008년)에서는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비판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며 크렘린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강연이나 성명 발표 등을 통해 국제 현안과 러시아 현대사에 관해 활발히 의견을 표명해 왔으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최근 들어서는 거의 공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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