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중국지질대학을 나온 김영화씨와 장춘중의학원을 나온 장춘태생 최재혁씨에게도 아름다운 꿈이 많았었다. 졸업후 그들은 심수의 일본 시계회사, 의료복무회사, 애플전자회사 등에서 6년간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정한 자금을 모으게 되였다. 하지만 불규칙적인 생활절주와 무리한 사업일정, 그리고 포화상태인 대도시 창업시장속에서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자면 거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한 그들 부부는 직장생활에서 자영업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창업 아이템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래서 선택한것이 바로 고향에 돌아와 음식점을 경영하는것이였다.
창업을 계획하던중 2012년 결혼차로 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김영화씨는 고향 해방촌의 변천을 보고 크게 놀랐다. 새농촌건설은 그전날의 락후하고 가난하던 고향을 일약 아름답고 살기 좋은 향촌마을(성급 새농촌건설 5성급 시범촌)로 변모시켰다. 더우기 조상의 혼이 깃들어있는 정든 고향땅은 김영화씨의 마음을 세차게 사로 잡았다.
김영화씨의 외할아버지 오하묵은 전기적 색채를 띤 영웅인물이였다. '외팔영웅'이라 불리운 오하묵은 일찍 밀산해방전쟁, 료심전역, 해남도전역, 항미원조 등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워 두번이나 2등공을 수여 받았으며 중국인민해방군 동북군구 경위련 련장, 중국인민지원군 독립대대 중대장을 력임했었다. 항미원조 잔페군인으로 제대하여 해방촌에 돌아온후 1957년, 1959년 두번이나 모택동주석, 류소기국가주석, 주은래총리 등 국가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고 두차례나 국무원으로부터 '외팔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1999년 국경절에는 국무원의 초청으로 국경50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하여 강택민총서기, 주용기총리 등 당과 국가지도자들의 접견을 받기도 하였다.
원래 남편의 고향 장춘에 가서 창업하려던 김영화씨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고향땅에 뿌리 내릴 자신의 뜻을 남편에게 비치였다. 리해심 많고 맘씨 착한 남편은 안해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으며 한국에 가있던 부모님들도 무남독녀인 그녀의 창업을 내조하려 결연코 귀국했으며 촌지도부에서도 그들의 귀향창업을 열렬히 환영하고 부축해 주었다. 그들은 20여만원을 투자하여 '영영개고기음식점'을 개업하였다.
하지만 음식점이란 개업하기는 쉬워도 제대로 운영하기란 정말 어려운 업종이였다. 시작부터 그들은 난관에 부딪쳤다. 원래 련주산진 소재지와 혼거해 있는 해방촌 주위에는 사람들의 생활차원 제고와 더불어 외식문화가 활성화 되면서 크고작은 음식점들이 넘쳐나고 있었으며 경쟁은 날로 치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을 도와 짬짬이 집수리를 해주던 아버지마저 지붕우에서 떨어져 두 다리를 상해 병석에 드러눕게 되였다. 마음 먹은대로 되여주지 않는 현실은 푸른 꿈을 무르익히며 창업의 행렬에 들어선 그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이나 직장생활에서 경험했던 리론은 음식점경영에서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다. 초보자인 그들은 가장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여 하나 하나 처음부터 배워나가야 했다. 그들은 부단히 인터넷에서 음식점경영 정보와 경험자료, 운영 노하우를 배웠으며 넓은 범위의 시장조사에 나서서 많은 지역을 전전하며 수많은 음식점의 맛을 경험했고 비법전수를 받았다. 끊임없는 노력하에 그들은 대중화한 메뉴의 단조로움을 탈피하여 전통적인 중국음식과 한국적인 음식을 조합한 이색적인 음식메뉴들을 개발하여 고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새로운 메뉴개발과 아울러 그들은 단기간의 매출과 지출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장원한 장사에 임하는 마음가짐으로 철저하게 고객곁으로 다가섰다. 개고기가 주류인만큼 개고기 선택에서 각별한 신경을 써가며 맛좋고 가격 또한 상대적으로 저렴한 쪽으로 취했기에 한마리 개고기를 팔고 나면 기본상 본전도 못 나올때가 많았다. 특색 있는 메밀랭면을 만들기 위해 먼 가목사에서 랭면을 수입해 들였으며 육수물 제조를 위해 원근의 이름난 랭면점을 돌아다니며 연구를 하고 개발한 끝에 자신만의 매콤달콤새콤한 비법의 맛을 선보이게 되였다.
그 외에도 친정엄마가 직접 만든 된장, 고추장, 청국장은 독특한 맛으로 고객들의 발길을 끌었으며 처마전의 비닐하우스에서 직접 재배하는 즉석 유기농 채소들은 천연적인 맛으로 고객들의 입맛을 돋구어 주었다. 조선족 감주, 찰떡, 순대, 떡볶이 등 민족특색의 메뉴들도 많아 날개가 돋친듯 퍼지며 밀산시내를 포함한 외지고객들의 발길을 잡았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도 십여대의 차가 외지로부터 들이닥치며 매상고가 3000원을 넘어갔다.
"초창기라 생각했던것보다 많이 힘들어요. 하지만 고향을 지키고 건설하며 열심히 살아간다는 의미와 꿈꿔왔던 창업의 일이라 재미는 있어요. 앞으로 조건이 성숙되고 여건이 허락된다면 규모도 확충하고 다른 업종도 익혀 가면서 실행 가능한 꿈과 희망을 위해 한걸음씩 실천해 나가겠어요." 매일매일을 착실하게 살아 가며 근면의 땀방울로 부자 꿈 키워가고 있는 김영화, 최재혁 부부의 마음속 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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