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가 무성하던 허허벌판에 논이 생기고 벼농사가 시작되여 쌀이 쏟아져나오기까지는 조선족 선대들의 피와 땀이 슴배여 있다. 90년대말까지 현급이상 농업기술보급소, 농업연구소, 농업과학원, 농업대학 등에서 벼연구에 종사한 조선족 전문가가 60여명에 달했다. 또한 1985년전까지는 향급이상 농업기술원의 80%는 조선족이였다.
농업전문가들은 흑룡강성의 수전생산 발전에 대한 조선족의 공헌률(기술지도)은 1970년까지는 90%, 1985년까지는 70%선에 달했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조선족 육종가들이 배육한 벼품종의 보급률은 최고 80%까지 달했다.
벼종자 개발의 1등 공신
흑룡강성장특별상도 수상했다./ 특별취재팀 한동현기자 (자료사진)
흑룡강성의 벼생산 발전은 조선족의 벼품종 배육과 갈라놓을 수 없다. 건국전부터 지금까지 벼종자 배육과 선종에서 강석일(합강벼연구소 연구원. 별세), 최성환(85세. 동북농업대학 교수), 전영태(81세. 오상시), 권태관(별세), 원종룡(통화. 별세), 김이수(아성. 별세), 박삼덕(목릉. 별세), 차성철(오상시. 흑룡강성농업과학원 제2벼연구소), 김정일(상지시. 별세)등 조선족 육종가들이 큰 기여를 했다.
건국이래 흑룡강성에서 배육보급한 벼품종은 182가지(1949년-2009년까지 집계)에 달하는데 그중 조선족 육종가들이 배육, 선종한 품종이 54가지에 달하며 그 보급률이 최고 80%까지 달해 흑룡강성의 수전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70-80년대는 고 강석일 연구원이 배육한 '합강19호' 품종이 '독판'을 쳤고 90년대에는 최성환 교수가 배육한 '동농416' 품종이 선풍을 일으켰으며 현재는 오상시의 전영태씨가 선종한 '도화향2호' 품종이 인지도가 높다.
한편 조선족 벼종자 개발자들은 해방전부터 큰 역할을 한것으로 밝혀졌다. 1938년 일본의 '석수백모(石狩白毛)'가 당시 직파품종으로 흑룡강 땅에 들어왔는데 공교롭게 도열병이 생겼다. 당시 도열병을 막기 위해 권태관(별세)이 이삭선종을 통해 '로인벼(老头稻)'를 선종해냈는데 도열병에 잘 견디고 생산량이 높아 1947년부터 1960년까지 흑룡강성의 제1, 2적산온도대와 길림북부 지역의 주요 재배품종으로 당시에는 상당히 인지도가 높았고 각광 받았다.
60년대 후기에는 통화의 원종룡(별세) 농민이 배육한 '풍산8호', '풍산9호' 벼품종이 통화, 가목사 등 지역의 주요 재배품종으로 자리 매김했다. 그는 60년대 '풍산1호'부터 '풍산10호'까지 배육했는데 당시에는 농민 벼종자 개발자로 아주 명망이 높았다.
1966년-1972년에는 아성의 김이수(별세)가 배육한 '성근5호', '성근6호' 벼품종이 할빈, 아성, 오상 등 제1,2적산온도대의 주요 재배품종이 됐다.
1965년-1967년 사이에는 상지시의 김정일 농민이 배육한 '태양3호(太阳三号)'가 상지, 연수, 방정, 통화 등 지역의 주요 재배품종으로 됐다.
1958년부터 합강벼연구소의 고 강석일 연구원이 개발한 '합강' 계렬 품종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8년 보급이 확정된 '합강19호' 벼품종은 미질이 좋고 적응성과 항병성이 뛰여나 많은 지역으로 보급됐는데 흑룡강성 벼우량 파종면적의 20-25%를 차지했다. 이 품종은 연변지역에도 보급됐다.
흑룡강성종자관리국의 1996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보급면적에 따라 벼품종 순위를 배렬한 결과 '합강19호'가 제1위를 차지하며 위풍을 떨쳤다. 이 벼품종은 1989년 흑룡강성 10대 품종으로 뽑혔으며 1993년 국가발명상을 수상했다. 고 강석일 연구원은 '합강' 계렬 벼품종 23개를 배육해냈다.
동북농업대학 최성환교수는 1961년부터 벼종자 개발에 몸을 담그어 왔는데 현재까지 '동농' 계렬 품종을 22개 배육해냈다.
90년대 '동농416'과 '동농419' 벼품종이 보급됨으로써 흑룡강성은 한해에 2.29억킬로그램 증산했다. 90년대 이 두가지 벼품종의 보급면적은 흑룡강성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기록했다.
인정 받으며 흑룡강성의 잡초제거에 큰 공헌을 했다. /특별취재팀 한동현기자(자료사진)
특히 '동농416' 품종은 흑룡강성의 수전개답 과정에 큰 공을 세워 1998년 성장특별상까지 받았다.
흑룡강성 목릉시의 박삼덕(별세) 농민 종자개발자는 '보선1호'~'보선29호' 메벼 품종과 '보점1호'~'보점7호' 찰벼 품종을 개발했는데 70년대 중후기에 '보선10호' 품종이 목단강지역의 50% 논에 보급됐다. 보선호 품종은 길림성, 료녕성, 내몽골에도 보급됐다.
또한 '보점6호', '보점7호' 찰벼 종자는 흑룡강성의 제2, 3적산온대의 주요 재배 품종으로 자리 매김했다.
박삼덕 농민은 흑룡강성의 유일한 농민대표로서 1978년부터 1990년까지 흑룡강성벼품종감정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했었다.
오상시의 차성철 연구원은 '송갱1호' 등 벼 종자를 개발했다. 오상시의 전영태 농민이 선종한 '도화향2호' 종자를 심어 생산한 오상쌀은 밥맛이 좋아 중국의 '천하일미'로 자리 매김했다.
새기술의 발명과 보급에 앞장서다
조선족 농업전문가들은 벼농사의 새기술발명과 보급의 선도주자로 활약했다.
1975년까지 흑룡강성의 직파면적이 80%를 차지했다. 직파 당시 잡초문제가 두통거리였다. 1957년부터 흑룡강성에서 수전화학제초기술이 보급되기 시작, 당시 조선족농민들이 세모고랭이 방제를 위해 제일 처음으로 살초제를 살포했다.
수전화학제초기술의 보급은 흑룡강성의 수전면적 확대와 생산량을 올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봉춘(84. 흑룡강성농업과학원), 김철(목단강. 별세), 박형삼(가목사. 별세), 전기식(85세. 가목사), 류삼숙(63. 할빈)등이 흑룡강성 수전 화학제초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90년대에 와서 한봉춘 연구원이 흑룡강성 수입제 농약보급의 1인자로, 전 흑룡강성식물보호소의 류삼숙 고급농예사가 국산 농약보급의 1인자로 맹활약했다.
/특별취재팀 한동현기자 (자료사진)
70년대와 80년대는 수입제 농약이 주도 위치를 차지했다. 90년대부터 국산 제초제를 적극 개발했는데 단가를 보통 50%, 최고로 70%까지 절감함으로서 농민들의 화학제초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바로 류삼숙 고급농예사가 흑룡강성의 국산 제초제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현재 그녀는 농약판매회사를 경영하는데 매출을 3억원선으로 올리며 전국 농약경영 민영기업 가운데서 5위권에 들었다.
벼륙상모희식재배, 초희식재배, 영양단지뿌려심기, 하우스육모, 삼초재배 등 새로운 벼재배기술의 연구보급 및 삼강평원개발에서 남병원(별세. 농업청총농예사. 부청급), 리형도(별세. 흑룡강성농업기술보급소 부소장), 김경(89세. 흑룡강성농업과학원), 차규식(별세, 동북농업대학), 김장욱(가목사. 별세), 채중석(목단강), 안정수(86. 녕안시), 최순길(84세. 목단강농업연구소), 리창길(별세. 목단강), 전종풍(73세. 해림시), 김희선(67세. 할빈시), 김학영(별세. 동북농업대학), 김정훈(59. 동북농업대학), 리종석(치치할시. 별세), 백계준(67. 연수현), 장승만(85세. 흑하농업과학연구소) 등이 큰 공헌을 했다.
고 리형도 부소장 주도로 보급된 벼륙상모 희식재배기술과 벼육모건실제연구 및 보급은 각각 1988년과 1996년에 흑룡강성장 특별상을 수상했다. 또한 벼초희식재배기술연구 및 보급은 2002년 흑룡강성정부 중대 수익 특별상을 수상했다.
고 리형도 부소장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3월 흑룡강성의 유일한 대표로 국무원으로부터 '2010년 전국곡물생산선진사업자 표병' 칭호를 받았다.
연수현의 백계준 주임은 80년대초부터 하우스육모기술을 보급시켜 연수현의 수전생산발전을 크게 떠밀었는바 1997년 흑룡강성 특등로력모범으로 당선됐다.
고 김학영 연구원과 김정훈 교수의 노력으로 한랭지역 삼초재배기술은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200만무 면적에 보급되여 헥타르당 생산량을 최고로 10~11톤까지 끌어올렸다.
김희선, 채중석 두 전문가의 연구노력으로 90년대에 나타난 벼육모건실제는 벼육모방법의 일대 진보를 가져왔는바 1997년 흑룡강성장 특별상을 수상했다. 김희선 사장은 현재 기업을 경영하며 효소유기비료를 생산하여 유기농쌀 생산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길을 묻는다
이처럼 100년동안 조선족들이 한랭지역 벼농사의 1등 공신으로 인정받으며 벼생산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시대는 서서히 력사의 뒤울안으로 사라지고 조선족 벼농사가 설자리를 잃었다.
우선 100년간 지속돼왔던 벼농사 지배력이 시장경제 활성화로 인해 조선족농민 수중에서 타민족 농민에게로 넘어갔다.
또한 조선족 농업전문가 수가 대폭 줄었다. 다시말하면 농업연구 후계자가 없다는 말이다. 농업대학의 조선족 대학생 수도 대폭 줄어든다고 한 농업대학의 교수가 개탄했다.
해외 나들이와 도시진출로 농사짓는 조선족농민이 대폭 줄어든것 도 심히 우려된다. 지난 90년대말부터 벼농사가 조선족 농민의 제1소득원 자리에서 밀려나고 로무수입이 제1소득원으로 자리 매김했다. 따라서 벼농사가 주류 산업 지위를 잃었다.
현재 설자리를 잃은 조선족 벼농사가 갈길을 모색하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농민합작사 등 조직을 활성화시켜 지역공동체를 구성하고 하나의 통일된 브랜드를 만들어 조선족 벼농사의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 한국의 농협과 같은 힘 있는 조직을 결성하여 쌀가공, 판매 령역으로 진출하여 농가 소득을 올려야한다. 조선족촌의 경작지와 조선족기업의 자본을 접목시키는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수 있다.
정부에서 농업에 대한 투자를 늘이는 기회를 틀어쥐고 규모화경영을 실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갈길이 멀다.
흑룡강신문/특별취재팀 리수봉 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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