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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위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특성이 익명성이다.
이와 관련된 사회 문제들과 제도, 순기능 등을 바탕으로 익명성과 관련된 각종 이슈들을 정리했다.
학창시절, 반장선거를 할 때도 반에서 누군가의 물건이 없어졌을 때도 선생님은 눈을 감고 조용히 손을 들라고 하셨다. 개인의 비밀을 보장해줌으로써 더욱 양심적인 결과를 유도하고, 서로 간의 의심과 나쁜 시선을 차단해 집단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요즘의 사회 문제 중 이런 익명성에서 출발하는 것들이 많다. 오래전부터 찬반논의가 활발히 진행됐고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인터넷 실명제'는 끊임없는 논란의 중심이 되어왔다.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들은 악성 댓글, 비방 커뮤니티 활성화, 채팅 범죄 등 온라인상에서의 문제가 대표적이다.
개인이 집단의 익명성 뒤로 숨을 때, 자제력을 잃고 도덕적 판단을 상실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사회 곳곳에서 실제 모습을 감추고 컴퓨터 앞에서 또는 휴대폰으로 인한 사이버 폭력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표적이 되는건 연예인들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무작정 악플을 감수하기 보다는 강경 대응하겠다는 연예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악성 댓글 ('악플')
지난 10월은 故 최진실 씨의 8주기였다. 2008년 악성댓글과 루머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 배우의 죽음에 악성 댓글에 대한 문제 의식은 뜨거워졌고, 2008년 10월, '사이버 모욕죄'가 제정되어 그 처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나 현재도 익명성을 무기로 한 '키보드 살인'은 계속되고 있다.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심리
온라인에서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신원을 노출할 때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평상시의 행동 절제에 애를 쓰지만, 익명을 보장하는 온라인 공간에선 무례하고 지저분한 난봉꾼으로 돌변한다.
익명 뒤에 숨은 네티즌들은 말썽을 부리는 소수도 특정 사안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을 왜곡하는 데 충분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데 쾌감을 느낀다. 이들의 선동적인 화법이 토론의 온전함을 망가트리고 실질적 담론을 방해해 다른 이들도 공격성과 조롱의 문화로 빠뜨려버린다. 악성 댓글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같은 현상을 '온라인 탈(脫)억제 효과'라고 부른다. ▶ 관련기사: "[윤희영의 News English] 악성 댓글의 심리학
채팅범죄·다중인격 사례도…
온라인상에서 채팅·만남 사이트가 범죄에 악용된 사례들을 언론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음란 채팅에서 시작되는 성매매 범죄들은 물론이고, 마약 등의 불법 장물을 사고판다는 거래도 많다. 또한 채팅을 통한 만남이 절도·납치 등의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또한 온라인에서의 익명성을 빌려 자신의 정체성, 즉 직업·나이·성별·학력 등을 모두 허위로 꾸미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는 '사이버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일종의 역할극을 벌이며 적게는 1~2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의 '나'를 만들어낸다.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아이디와 닉네임으로 변호사·의사·교수 등 직업을 바꾸는가 하면, 이렇게 사칭한 신분을 바탕으로 그럴 듯한 글과 사진을 내세워 네티즌을 감쪽같이 속이기도 한다.
한 예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실제 본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 행세를 하며 온라인상에서 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지내온 여성이 있었다. 한 TV프로그램에서 이 여성을 'SNS 중독녀'로 다루며 SNS의 폐해를 짚었다. 온라인상에서는 미녀로 통했던 그녀는 자신의 사진을 포토샵으로 조작해 SNS에 올리며 친구를 늘려갔고, 자신의 일상생활을 조작한 사진들로 꾸며가며 실제와는 전혀 다른 자신을 연기했다. (2015년, 또다시 매스컴에 오른 그녀는 케이블TV 채널의 한 뷰티 프로그램에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SNS 여신의 실체는?' 이라는 사연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익명 커뮤니티도 점점 활성화됐다. 아무도 내가 그 글을 썼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며, 익명의 글로 표현할 때 느껴지는 희열과 후련함의 유혹에 빠지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점차 개개인은 폭력성을 띠게 된다. 이런 부작용이 지속되면 익명 커뮤니티들은 각종 인간 혐오 발언은 물론 음란물 유포와 공유, 악성 루머와 댓글들이 판치는 장(場)으로 변질되어 간다.
'일베' '오유' '아고라'…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와 '오늘의 유머'(오유), '다음 아고라' 등은 대한민국 사이버 공간의 보수와 진보 논쟁의 최전선이다. 비슷한 정치 사회적 정체성을 가진 네티즌들이 끼리끼리 온라인 공간을 공유하면서 발생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자신의 의견, 또는 비슷한 타인의 의견이 호응을 얻으면서 자칫 사고의 균형을 잃고 만다. 반말과 욕설이 반복되면서 점차 게시글도 폭력성을 띠게 된다.
다음 아고라를 폐쇄하자는 서명운동이 일거나, 일베를 유해 사이트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비일비재하다. 2015년에는 KBS의 신입 기자가 일베 회원이라는 이유로 그의 과거 발언들이 도마 위에 올랐고, 임용 반대 시위도 있었다.
전화 상담원에 대한 언어 폭력·성희롱
전화 상담원에게 언어폭력 및 성희롱을 하는 것도 익명성을 나쁘게 사용한 예다. 얼굴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상담원에게 함부로 대하고, 나아가 성희롱까지 일삼는 행위는 명백한 범죄다.
2014년, 이동통신사 콜센터에 1만 번 가까이 전화를 걸어 여성 상담원에게 성희롱과 욕설을 일삼은 혐의로 구속기소 된 박 모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됐다. 기업에서도 "손님이 폭언할 경우 전화를 끊어도 된다"는 지침 등 자사 직원을 보호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각종 장난·협박 전화, 처벌될 수 있어
2014년 12월, 4년 동안 112에 4,000여 차례에 걸쳐 허위 신고를 한 혐의로 기소된 송 모 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고, 사회봉사 100시간 명령이 내려졌다. 서울북부지법은 "송 씨는 우울하거나 술에 취했을 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신고를 한 것으로 보이고, 그 횟수가 4년간 4,000여 차례에 이른다"며 "112 신고센터에 허위 신고해 공권력을 낭비하고 실제 도움이 필요한 국민이 제때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는 피해를 일으켜 죄질이 좋지 않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그해 9월, 청와대를 폭파하겠다고 장난 전화를 한 40대 남성에게 348만 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도 나온 바 있다.
'범죄' 영역에서의 익명성은?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 제도는 2000년부터 시행됐다. 제도 도입 초기에는 주소지 관할 경찰서를 직접 방문해 열람하는 형태로 신상공개가 이뤄졌다. 2010년부터는 인터넷을 통해 성범죄자 신상공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신상정보 공개 성범죄 대상자도 성범죄 재범자, 다시 범행을 저지를 우려가 있는 범죄자에 국한됐다가 이후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 19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자로 확대됐다. 법원이 성범죄 유죄판결과 함께 신상공개 명령을 선고한 범죄자가 대상이다. 공개기간도 법원이 판결을 통해 정한다.
2015년 7월, 성폭행 혐의로 실형을 살다 출소한 방송인 고영욱 씨도 법원에서 신상공개 명령을 받아 사진과 주거지 등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됐다.
"흉악 범죄자 얼굴 공개 좀 더 적극적으로 하라"
2015년 초, 경찰청은 토막 살인, 납치 살인, 유괴 살인, 14세 미만 아동과 여성,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흉악 범죄는 범죄자의 얼굴 공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침을 전국 일선 경찰서에 하달했다. 경찰은 그동안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 피해가 발생한 경우 등에만 범인 얼굴 공개를 검토했었다. 하지만 그 기준이 모호한 탓에 수사 담당자마다 얼굴 공개 여부가 달라져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2009년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얼굴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조선닷컴에서는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졌었다. 댓글의 90% 이상이 "얼굴 공개를 환영한다"는 입장이었고, "범죄자 가족에게 돌아갈 피해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일부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인권위가 경찰에 '피의자 인권을 보호하라'고 권고한 데 대한 비난 글이 쏟아졌다.
법률 전문가들은 '국민의 알 권리' '범죄 예방' '추가 목격자 확보' 등의 공익성이 더 크기 때문에 범죄자의 사진 등 신상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 관련기사: "얼굴 공개 해야한다" 압도적… '관행' 바꿔야
익명을 보장하는 제도
현재, 우리나라는 '비밀투표'의 선거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선거인이 투표 내용을 비공개로 함으로써 공개투표 시 받을 수 있는 압력이나 영향력을 단절하고, 공정한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려는 제도다.
이 밖에 정보는 '국민 신문고'를 운영하며 익명으로 국민의 각종 민원이나 제보 등을 접수해서 해결하는 시스템도 운영 중이다. 또한, 각종 익명 제보는 경찰에는 수사의 단서를 제공하고, 언론의 다양한 정보 수집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기업에는 기업제도 개선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익명으로 이루어지는 선행과 캠페인
매년 연말이면 익명의 기부 소식이 들려온다. 좋은 일을 하는데에 본인의 정체가 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의 선행과 자선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좀더 따뜻한 사회로 가는데 일조하고 있다.
또한, 학업과 취업준비 등에 지친 청춘들에게 위로가 되는 익명 캠페인도 있었다. 지하철역 물품보관소를 통해 간식과 선물을 남기는 '달콤창고'가 그것이다. 달콤창고는 SNS를 통해 공유된 비밀번호를 통해 얼굴을 모르는 젊은이들끼리 소소한 간식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공감 공간이다.
개방형 네트워크에 지친 사람들의 소통 창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이 사생활이 노출되는 개방형 네트워크에 지친 사람들 사이에서 익명 SNS가 인기다. 모바일 일기장에 자신의 내밀한 문제와 속마음을 기술하고 이를 익명으로 공유해 이름 모를 누군가로부터 위로받는 '소셜다이어리앱'이 그 예다. 내용은 연애에 대한 소소한 고민부터 대입, 취업, 부모님 건강 문제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고민글을 적어 올리면 이내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같은 위로 댓글이 달린다. '공유'에 초점이 맞춰진 소셜(social)과 '비밀'이 생명인 다이어리(diary)는 배타적인 단어지만,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개방형 SNS의 무분별한 소통에 지친 사람들이 늘면서 역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위로 SNS 소셜다이어리앱 '모씨(MOCI)', '어라운드'
앱 '모씨'는 '김모씨' '이모씨' 하듯 누군가를 익명으로 표현하는 단어 '모씨'에서 이름을 따왔다. 앱 접속자의 닉네임은 전부 '모씨'로 통일돼 있다. 랜덤으로 나열되는 배경 그림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자신이 찍은 사진을 선택해 50자 내외의 문구를 적어 공유하면 '새로운'이라는 탭에 노출된다. 해시태그(hashtag·게시물 분류와 검색이 용이하도록 단어 앞에 #을 붙이는 방식)를 설정하면 자동으로 '관심글'로 추려진다.
'어라운드'의 경우 남의 고민글에 먼저 댓글을 달아 '공감한다'는 의미의 '버찌(인스타그램 '하트'와 같은 기능)'를 획득해야만 자신의 고민글을 올릴 수 있다. 장난스러운 댓글은 버찌를 받지 못해 자연스럽게 걸러진다. '상호 위로'라는 공감대 위에 욕설·비방글·광고글 없는 '청정(淸淨) 앱'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앱을 넘어 고민글·위로글을 모은 출판물·전시회까지 콘텐츠 향유 방식도 넓어지고 있다. ▶ 관련기사: 속마음 적은 모바일 일기장, 댓글이 "괜찮아" 토닥였다 ▶ 관련기사: 낯선이로부터 날아온 인사 "수고했어, 오늘도"
'계급장 떼고' 익명으로 소통하는 '블라인드'
익명 소통 앱 '블라인드'는 2013년 12월 처음 오픈했다. 이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끼리, 그리고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익명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익명게시판이다. 블라인드 게시판은 '우리 회사'와 '모두의 라운지'라는 두 종류의 게시판으로 구성돼 있는데, '우리 회사'는 같은 회사 동료끼리, '모두의 라운지'는 같은 업계 사람끼리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회사 메일을 통한 인증절차만 걸치면 자유롭게 게시판을 이용할 수 있다. ▶ 관련기사: 계급장 떼고 익명으로 소통하는 익명 SNS
익명성 컨셉의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의 성공
새로운 재미로 인기몰이에 성공한 복면가왕은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지만 참가자들의 얼굴에 복면을 씌웠고, 경연 때는 다른 개인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노래만 들을 수 있게 했다. 겉모습이 아닌 노래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게 한 것이다. 수많은 경연 프로그램 사이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진화된 구성과 시청자들의 기대심리가 반영돼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익명성에 오히려 위로를 받는 사례도 분명히 있다. 대인 관계가 단절되거나 그 자체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찾는 '제3의 소통 수단'에서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익명성 때문에 벌어지는 많은 사회적 문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가 생활의 일부가 된 요즘, 익명성의 뒤에서 벌어지는 각종 범죄를 경계하며 성숙한 의식을 가지는 것은 항상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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