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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기다리는 지금, 새로운 결심을 하기 좋은 때다. 요즘은 ‘비우고 단순해지기’를 결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물건뿐만이 아니다. 식습관과 생활방식, 심지어 인간관계까지 단순화하고 싶어하고, 실제로 실천을 한다. 일명 ‘미니멀 라이프’다. 미니멀 라이프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이들을 만나 비우니 비로소 채워진 삶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헤어 스타일리스트 김정한씨가 제주 애월집에서 반려묘 로니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2015년 제주에 이사오면서 가구를 최소화했다. TV받침대는 귤 상자를 겹쳐 만들었고 수납공간도 가급적 두지 않았다.
소유에서 관계로 ‘생활 혁명’ 필요없는 물건, 벌여놓은 페친 정리…비워서 삶을 채우다
어느새 집의 주인이 된 물건들 내쫓기
여행할 때도 욕심 버리고 선택과 집중
장난감 대신 놀아주는 ‘미니멀 육아’도 관심
물질보다 경험·체험 중시 ‘가치의 변화’
이사 잦은 1인 가구 시대와도 맞물려
단순한 버림 넘어 소중함 채우는 과정
지금 주위를 둘러보자. 집이든 사무실이든 물건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모든 게 귀했지만 이젠 거꾸로 모든 게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다. 하지만 넘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자세로 물건을 덜어내 삶을 풍성하게 채운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미니멀 라이프다. 물건은 그냥 물건에 그치지 않는다. 물건을 덜어내면 인간관계도, 생활도, 그야말로 라이프(삶)가 달라진다. 비움으로 채운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보면 혹시 번잡한 내 삶에도 길이 열릴까.
수납장 없앤 빈 캔버스 같은 집
헤어스타일리스트 김정한(47)씨는 2015년 제주에 288㎡(87평)짜리 집을 지을 때 건축가에게 딱 하나만 주문했다. “빈 캔버스 같은 집을 지어주세요. 창고처럼 그냥 단순한 공간이면 좋겠어요.” 안방과 서재로 사용하는 방 두 개와 거실·부엌의 천정과 벽은 모두 흰색으로 칠했고, 가구는 나무 소재로 한정했다. 수납 공간을 없앤 게 이 집의 하이라이트다. 흔히 미니멀하게 꾸미려면 정리를 해야 하니 수납 공간은 넉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씨는 “수납 공간이 많아봤자 물건을 쌓아둔다는 것 아니냐. 수납이란 결국 쓰지 않는다는 말이니 과감하게 없앴다”고 말했다. 창고 같은 공간을 하나 지정해 어쩔 수 없이 보관해야 하는 최소한의 것만 수납한다. 이를 제외하곤 수납 공간이 아예 없으니 필요한 것만 눈에 보이는 곳에 둔다.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하면서 새로 산 가구는 하나도 없다. 쓰던 가구를 가져갔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만들었다. 나무로 된 귤 상자 두 개를 겹쳐 만든 TV받침대가 대표적이다. 그는 “종사하는 업계 특성상 물건 욕심이 많이 생기기 마련인데 어느 순간 물건을 살 때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사고 후회하는 걸 반복할 필요가 있나 싶어 정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단순한 공간, 삶의 여유
3년 전 건축가 임성수(42)씨는 82㎡(25평)짜리 새 보금자리를 꾸미면서 여백을 추구하는 미니멀 컨셉트를 적용했다. 혼자 사는 바쁜 직장인이라는 점을 고려했다. 집보다 외부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데다 모든 걸 혼자 해야 하니 ‘집에 가면 빨리 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정리 정돈 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공간을 단순하게 시스템화했다. 우선 시각적으로 바닥과 벽, 천정을 같은 톤으로 만들어 공간 경계를 없앴다. 캐비닛, 사이드 테이블, TV받침대, 서랍장 등 거의 모든 가구는 바퀴 달린 것으로 골랐다. 한 곳에 고정하지 않고 이동할 수 있으니 상황에 따라 관리도 쉽고 공간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사진·화분·꽃 같이 ‘기능’ 없는 장식 대신 꼭 필요한 기능을 가진 물건을 예쁜 디자인으로 선택해 그 자체가 장식품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래서 이 집엔 조명·구둣주걱 등도 하나의 오브제다. 임씨는 “미니멀한 집에 살면서 삶이 여유로워졌다”며 “복잡하고 바쁜 현대인에겐 이런 미니멀리즘이 필수”라고 말했다. 일상이 복잡해서인지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더 단순화시키고 싶은 욕구가 크다는 얘기다. 그는 1인 가구 증가가 미니멀 라이프 트렌드를 이끈다고 봤다. “1인 가구는 이사가 잦아서 많은 걸 소유하면 힘들어진다”는 이유다.
채우려는 욕심 걷어내니 채워졌다
북유럽 라이프스타일 디자인숍 덴스크의 김효진(37) 대표는 2016년 165㎡(50평)대 아파트에서 66㎡(20평대)로 옮겼다. 그는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생활 동선은 훨씬 적은 공간만 사용하더라”며 “큰 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내가 가진 걸 그저 나열하기 위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생활 패턴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실은 거의 쓰지 않고 모든 일을 식탁에서 했다. 거실은 남들이 다들 두니까 의례적으로 만든 공간일 뿐이었다. 그래서 소파를 없애고 다이닝 테이블을 놨다. 그는 “딱 필요한 것만 남겼더니 삶이 굉장히 활기차졌다”며 “내가 가진 것들에 치여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비움은 라이프스타일도 바꿔놨다. 과거 해외 출장을 가면 유명하다는 곳, 새로 생긴 레스토랑 등 핫플레이스를 다 가봐야 성에 찼다. 외국 잡지를 미리 읽어 매장 정보를 알아두고, 동선을 촘촘하게 짜서 그 도시를 다 파헤칠 듯이 전투적인 태도로 임했다. 발도장은 찍었을지언정 정작 즐기지는 못했다. 이젠 한두 가지 일정에 집중한다. “일정이 빽빽하지 않으면 시간 낭비, 자원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느슨해진 이후 오히려 더 채워졌다.”
줄어든 집안일, 높아진 삶의 질
홈 스타일리스트인 선혜림(32) 레브드홈 대표는 결혼 3년차 때인 2015년 미니멀 라이프를 결심했다. 보통 공간을 줄일 때 이런 마음을 먹지만 그는 정반대다. 신혼집(60㎡)보다 넓은 집(83㎡)으로 이사했지만 물건을 덜어내기로 한 것이다. 선씨는 “집이 넓어지니 처음으로 빈 공간이 보였다”며 “밝음과 여유가 느껴졌고 생각 없이 늘려온 살림을 줄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0여 개의 물건이 집을 떠났다. 왠지 있어야 할 것 같아 구입한 2인용 소파, 티 테이블 등 큰 물건부터 버렸다. 국자 2개, 향초 5개 이런 식으로 ‘비움 노트’를 적고, 너무 버리기 아까운 건 추억함을 만들어 모았다. 대체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물건은 전부 버렸다. 스텝 사다리는 의자면 충분했다. 옷장에 들어가는 옷걸이 개수를 정하고 그 이상의 옷은 정리했다. 위칸에 옷걸이 30개, 아래칸에 25개만 옷을 건다. 이처럼 물건마다 자리를 정해두는 게 집 상태를 유지하는데 중요하다. 무조건 물건을 버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산 것도 있다. 세탁함은 6개를 두고, 속옷·양말·수건 등으로 구획을 나눴다. 삶의 질은 올라갔다. “맞벌이라 집안일이 복잡해지면 서로 부딪히는데 미니멀한 삶을 살다보니 집안일로 남편과 다투는 게 확 줄고 미래 설계와 같은 대화가 늘었다.” 아이가 생기면 이런 삶을 유지하는 게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아이를 위해 물건을 사는 대신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도 있다”며 “동화책이나 장난감을 사주는 게 아니라 함께 도서관 가고, 장난감 대신 식재료를 이용해 노는 ‘미니멀 육아’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안 쓰는 앱 지우고 필요할 때마다 다운로드
직장인 김지연(27)씨는 2016년 추석부터 화장대·책장 등의 한 부분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를 읽은 어머니가 “버려보니 후련하다”며 추천한 데 따른 것이다. 김씨는 “미니멀 라이프는 단순히 필요 없는 걸 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중하고 가치있는 걸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마트폰도 미니멀하게 관리한다. 쓸모없는 앱을 모두 지워 앱 메뉴는 딱 두 페이지다. 뱅킹이나 메신저 등 매일 사용하는 앱만 남기고, 페이스북까지 삭제했다. 가끔 사용하려고 용량 무거운 앱을 두기 싫어서다. 필요할 때마다 앱을 다운받아 쓰고는 곧바로 다시 지운다. “재설치하고 다시 로그인 하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삭제하면서 얻는 쾌적함이 더 크다.”
주부 정양희(57)씨는 무슨 물건이든 사용 목적을 잃어버리면 무조건 버린다. 아무리 비싸게 주고 샀어도 이 원칙을 지킨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에 공간을 내어주는 게 더 큰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대여료를 내고 빌리더라도 공간을 할애하지 않는 게 더 가치있다고 믿는다. 그는 “물건을 보관하면 관리에 쓸데없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며 “물건을 버리면 일상의 편리함이 커진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홈시어터, 천연 가죽 스툴, 스탠드형 에어컨, 고가 의류 등을 버려봤다. 또 대형마트 대신 집 앞 가게를 주로 이용한다.『오늘부터 미니멀라이프』에서 ‘냉장고를 비우고 마트를 우리집 냉장고처럼 생각하라’던 조언을 실천하는 것이다. “시금치 한 단 사서 무치고, 아욱 사서 국을 끓여 바로 먹는다. 지금 냉장고엔 레몬 1개, 상추 10장, 양파 1개, 사과 반 개, 국, 반찬 두 가지 뿐이다. 적게 사니 음식 쓰레기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냉장고를 비워 놓고 살면 도우미 2~3명이 주방에 있는 것 같이 편하다. 한눈에 내용물이 다 보이니까.”
양에서 질로 … ‘관계’ 다이어트
출판사 기획팀장 윤혜자(47)씨 부부는 단독 주택으로 이사하면서 간소한 삶을 택했다. 4년간 살던 109㎡(33평) 아파트 전세기간이 끝날 무렵 서울 성북동의 건평 43㎡(13평)짜리 주택을 샀다. 공간을 줄이니 어쩔 수 없이 침대·소파를 포함해 살림을 절반 이상을 덜어내야 했다. 그는 “물건을 많이 가질수록 집착이 생긴다”며 “줄이는 과정에서 삶의 태도도 바뀌었다”고 말한다.
간소한 삶을 위해 비움의 원칙을 세웠다. 당장 필요없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면 버린다는 게 가장 큰 원칙이다. 부부의 가장 큰 짐은 책 1500여 권이었다. 서점·도서관·헌책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은 정리했다. 손때 묻은 책, 절판됐거나 그럴 가능성이 큰 책만 남겼다. 살림살이도 정해진 공간만 채웠다. 전자제품은 1년에 한두 번만 쓰는 것이나 다른 기기로 대체할 수 있다면 없앴다. 그래서 전자레인지·오븐·캡슐 커피 기계는 포기했다. 아무리 ‘좋은’ 옷도 2년간 안 입으면 ‘나쁜’ 옷으로 규정하고 버렸다.
음식에도 미니멀리즘을 구현했다. 1년간 제철음식을 제대로 배웠더니 여러 양념이 필요 없어졌다. “요리를 잘 안 할 땐 별별 양념이 다 있었다. 사실 잘 담근 간장 하나만 있으면 된다. 식재료는 필요한 만큼만 사고, 음식을 많이 하면 저장 대신 이웃에게 나눠준다.”
비움의 원칙은 인간관계로 이어졌다. 윤씨는 “과거엔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 돼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든 사람에게 같은 질량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든다”며 “가까운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버리는 즐거움』등 일본에서 유행하는 단샤리(斷捨離·물건과 인간관계의 집착 버리기)를 소개하는 책 덕분에 윤씨처럼 ‘관계 디톡스’를 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페친 정리뿐 아니라 휴대전화에 저장된 필요없는 연락처를 정리하는 식이다.
이미 가져본 자들의 ‘생활방식 리셋’
미니멀 라이프 트렌드의 배경을 전문가들은 어떻게 분석할까. 전미영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물질적인 것에 삶을 내어주는 데 대해 회의감을 갖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시작된 검소한 삶 열풍이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한국식 미니멀 라이프는 새로운 것을 갖고자 하는 열망 그 자체를 줄이기 보다 갖고 있는 걸 처분하는데 집중하는 점이 차이”라고 덧붙였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제 불황으로 소비 수준이 낮아지면서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이유를 찾는 동시에 대량 소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김경자 가톨릭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버리려고 하지는 않는다”며 “이미 충분히 가져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하는 트렌드”라고 했다. “물질적인 것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소비 흐름이 경험과 체험을 중시하는 트렌드로 변화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 달러가 넘으면 생활의 질에 가치를 두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물질로 과시하는 시대가 지나면 미니멀 라이프가 우리 사회에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확산할 것”으로 전망했다.
글=박현영·유지연·백수진 기자 park.hyunyoung@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일러스트=심수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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