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년 남자가 안중근 의사 흉상 앞에서 묵념을 했다.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20일 오후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 구내에 설치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만난 중국인 장핑(張平·59)은 20년 넘게 하얼빈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최근 퇴직했다. 기자가 된 이유가 남달랐다. 항일투쟁을 하다 불구가 된 채 5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일제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기념활동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기자로서 중국 동북지방에 널려 있는 일제 만행 흔적을 찾아내 고발하는 데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안 의사 의거와 동양평화 사상을 더 깊이 알게 됐고 존경하게 됐다.
안 의사 기념관 개관 이틀째. 20일 오전에만 100여 명이 다녀갔고 오후에는 방문객이 200여 명을 넘었다. 캉웨화(康月華) 관장은 “아무리 무료라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을 줄은 몰랐다. 이는 안 의사의 거사와 평화사상에 많은 중국인이 뜻을 같이하고 있다는 증거다. 앞으로 중국인들에게 성지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허우신(候昕·48·산다동력 엔지니어)은 기념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역내 플랫폼 바닥의 삼각형 표지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전엔 아무 설명 없이 삼각형 타일만 깔려 있었다. 이제 저격 현장에 깔린 타일 위에 ‘안 의사 이토 히로부미 격폐(擊斃·사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이라는 설명 문구가 걸려 있다.
허우는 “70년대 이전 하얼빈에서 태어난 사람 중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이는 없다. 어릴 때 부모님한테서 안 의사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역에서 격폐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들었는데 현장을 직접 보니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은 200여㎡의 공간에 전시된 110여 점의 안 의사 관련 자료에 놀라기도 했다. 자료는 안 의사의 가정교육과 신앙, 애국운동과 구국교육실천, 단지동맹, 하얼빈 의거, 뤼순(旅順)감옥 생활 등 크게 다섯 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왼쪽에 안 의사의 대표 유묵 8점이 전시돼 있는데 첫 번째가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다. 100여 년 전 그의 걱정은 현재를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경계하는 바 크다.
전시 자료는 안 의사가 한국인이기 이전에 동양평화와 화합을 주창했던 의인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고 있다. 아예 안 의사 사진을 걸고 그 밑에 ‘동양평화의 창의자’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중국 부녀운동의 선구자이자 혁명가인 덩잉차오(鄧潁超·1904~92)가 남편인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 함께 안 의사의 대국적 평화사상에 반해 이토 히로부미 격폐 고사를 가극으로 불렀다는 내용도 있다. 왕광푸(王廣福·79) 전 하얼빈 서예가협회 부주석은 “만주국 시절 학교를 다녀 일제 만행을 눈으로 보고 자란 사람이다. 어릴 적 부모님한테서 안 의사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많은 자료를 접한 것은 처음이다. 일제 만행을 만고에 고발하는 역사의 현장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1급화가인 취안우쑹(權伍松) 화백이 안 의사를 기리며 그린 대형 그림도 눈길을 끈다. 조선족인 그는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안 의사 의거 표지석 설치를 얘기하자 자신의 작품을 기증할 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20일 기자회견에서 “안중근은 누차 이야기해 온 바와 같이 우리나라(일본) 초대 총리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다. 그동안 우리의 입장을 전달해 왔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지극히 아쉽고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스가 관방장관의 발언에 대해 외교부는 대변인 명의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방장관이라는 인사가 몰상식하고 몰역사적 발언을 한 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일본 지도급 인사들은 하루속히 과거 제국주의의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겸허한 마음으로 역사를 마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관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11시30분, 오후 1시30분~4시까지 문을 연다.
중앙일보 하얼빈·도쿄=최형규·김현기 특파원
안 의사 기념관 개관 이틀째. 20일 오전에만 100여 명이 다녀갔고 오후에는 방문객이 200여 명을 넘었다. 캉웨화(康月華) 관장은 “아무리 무료라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을 줄은 몰랐다. 이는 안 의사의 거사와 평화사상에 많은 중국인이 뜻을 같이하고 있다는 증거다. 앞으로 중국인들에게 성지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허우신(候昕·48·산다동력 엔지니어)은 기념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역내 플랫폼 바닥의 삼각형 표지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전엔 아무 설명 없이 삼각형 타일만 깔려 있었다. 이제 저격 현장에 깔린 타일 위에 ‘안 의사 이토 히로부미 격폐(擊斃·사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이라는 설명 문구가 걸려 있다.
허우는 “70년대 이전 하얼빈에서 태어난 사람 중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이는 없다. 어릴 때 부모님한테서 안 의사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역에서 격폐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들었는데 현장을 직접 보니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은 200여㎡의 공간에 전시된 110여 점의 안 의사 관련 자료에 놀라기도 했다. 자료는 안 의사의 가정교육과 신앙, 애국운동과 구국교육실천, 단지동맹, 하얼빈 의거, 뤼순(旅順)감옥 생활 등 크게 다섯 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왼쪽에 안 의사의 대표 유묵 8점이 전시돼 있는데 첫 번째가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다. 100여 년 전 그의 걱정은 현재를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경계하는 바 크다.
전시 자료는 안 의사가 한국인이기 이전에 동양평화와 화합을 주창했던 의인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고 있다. 아예 안 의사 사진을 걸고 그 밑에 ‘동양평화의 창의자’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중국 부녀운동의 선구자이자 혁명가인 덩잉차오(鄧潁超·1904~92)가 남편인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 함께 안 의사의 대국적 평화사상에 반해 이토 히로부미 격폐 고사를 가극으로 불렀다는 내용도 있다. 왕광푸(王廣福·79) 전 하얼빈 서예가협회 부주석은 “만주국 시절 학교를 다녀 일제 만행을 눈으로 보고 자란 사람이다. 어릴 적 부모님한테서 안 의사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많은 자료를 접한 것은 처음이다. 일제 만행을 만고에 고발하는 역사의 현장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1급화가인 취안우쑹(權伍松) 화백이 안 의사를 기리며 그린 대형 그림도 눈길을 끈다. 조선족인 그는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안 의사 의거 표지석 설치를 얘기하자 자신의 작품을 기증할 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20일 기자회견에서 “안중근은 누차 이야기해 온 바와 같이 우리나라(일본) 초대 총리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다. 그동안 우리의 입장을 전달해 왔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지극히 아쉽고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스가 관방장관의 발언에 대해 외교부는 대변인 명의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방장관이라는 인사가 몰상식하고 몰역사적 발언을 한 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일본 지도급 인사들은 하루속히 과거 제국주의의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겸허한 마음으로 역사를 마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관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11시30분, 오후 1시30분~4시까지 문을 연다.
중앙일보 하얼빈·도쿄=최형규·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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