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시 춘화진 초평(草坪)촌 동쪽 이도관(二道关)산속에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남긴 매우 큰 규모의 군사요새지유적이 발견되였다.
초평촌의 촌민 마련파, 장본용 및 장고봉사건기념관 관장 류충지, 춘화변방파출소 류군부소장 등 인원들이 유적지를 답사하여 초보적으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건설했던 군사요새지란 것으로 인정했다.
현지답사에서 이도관전 두도관(头道关)에서 일본군의 망대기좌가 보였고 이도관 동쪽언덕위와 산기슭에서 일본군이 로씨야쪽으로 건설했던 또치까유적과 요새지 통풍구로 짐작되는 곳, 동쪽산중심부에 비행기투하점, 훈련장으로 보이는 곳, 물저장처, 요새 주요 출구처 ,매우 큰 석재무지 세곳 등이 발견되였다.
2차전쟁사에 료해가 깊은 류충지관장은 허다한 기상으로 보아 일본군이 이곳에서 요새지를 건설했을 진실성을 보인다고 했으며
사료기재에서 상기 두 또치까는 1945년 쏘련군에 폭파되였다고 한다.한편 류충지관장은 사료기재상 초평동산에 확실히 군사요새지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번역으로 있은적 있던 당지 《최헌병》이란 사람이 60년대말 훈춘시공안국에 체포되여 두가지 문제를 교대한적 있었는데 하나는 초평동산에 확실이 일본군이 건설한 산굴이 있었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산굴이 준공되기전날 일본군은 요새건설에 끌어온 민공들에게 《물고기연회》를 베풀어 몰살했다는 사실을 교대했다고 기재돼있다고 한다.
헌데 당년 훈춘시공안기관에서는 최헌병을 데리고 초평동산현장에 가서 산굴의 출입구를 찾은적 있었다는데 20년후여서 나무숲이 깊어진데다 일본군이 철거시 산굴을 폭파하고 많이 위장해놓아 산굴의 출입구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부터 초평촌동산은 당지 사람들의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던것이다.
국가적으로 일본군이 중국침략시 건설한 요새지에 대해 중시하여서부터 당지사람들은 다시 초평요새의 미스터리를 풀려고 시도해 나섰다.
2011년 춘화진당위서기로 일한적 있는 리보상이 초평촌민들을 이끌고 요새지 출입구발굴을 시작했다가 뜻밖으로 사망한후 요새지찾기가 일시 중단되였다가 다시 마련파, 장본용촌민이 오늘날까지 찾아오면서 새로운 중요한 발견을 련속해왔던것이다.
당지 촌민들의 진술 그리 《최헌병》의 교대로 보아 초평동산은 일본군의 군사금지구역으로 획분되였었고 외지 민공들을 대량 투입해 은밀한 군사건설을 진행했는바 요새지건설 가능성이 컸다.
또다른 한편 일본에서 출판한 《관동군》에서 보면 분수령 맞은켠의 바라바쉬는 쏘련군의 39군 군부, 92보병사사부, 59국경경비부대가 있었는바 이는 반대측으로부터 당시 춘화진에 한개 중대를 주둔시킨 일본군에게는 초평동산에 군사전략위치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많음을 증명해주고 있는가 하면 이곳은 또한 북측에 있는 동녕요새, 남쪽의 오가산요새와 떨어졌지만 상통하며 호응할수 있는곳이기에 그 필요성을 한층 말해주고있다는 분석이다.
자료상 일본전쟁범 전수상도죠히데끼가 《일본의 주력부대를 동북의 동부지역에 집중했다가 쏘련의 우수리스크(双城子),울라지보스또크,이만 등지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하바로스크를 점령하려했다》고 자백한데서부터도 쏘련으로 《북진》하는것은 일본이 획책했던 하나의 책략이였다. 만약 일본이 《북진》한다면 쏘련의 원동지역 가장 큰 항구이고 쏘련원동태평양함대사령부의 소재지였던 울라지보스또크는 반드시 일본의 가장 중요한 진공목표였을것이라고 판정할수 있다. 중국에서 울라지보스또크와 가장 가까운곳이 바로 초평동산과 이어진 분수령이고 이곳은 중국사람들이 《산넘고 강넘(跑崴子)》던 통상길이였고 울라지보스또크와 불과 60여 키로메터밖에 떨어지지 않은곳이다.
류충지와 촌민들은 초평동산의 침묵을 깨뜨리는것은 력사가 우리모두에게 부여한 책임이라며 정부 유관부문에서 진일보로 초평촌동산에 대한 탐측을 가강해 상술문제를 고증하기를 제기하고있다. 이는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군의 요새건설문제를 연구하는데 추동역할이 있을것이며 또 무고하게 원혼이 된 민공들에게도 진실을 밝혀 고위해야 할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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