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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군의 조선인 소대장은 왜서 실종되었을까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3월12일 07시15분    조회: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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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젊은 시절의 전병균)

(사진설명: 황포군관학교 옛터)


1926년, 중국에는 대륙을 돌풍처럼 휩쓴 전쟁이 일어난다. 광동의 국민정부가 국민혁명군을 주력으로 삼아 진행한 통일전쟁이었다. 훗날 이 전쟁은 일명 '북벌(北伐) 전쟁'으로 사책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다.
북벌전쟁에는 여타의 전사(戰史)처럼 많은 비사(秘事)가 깃들어 있다. 조선인 군인이 북벌군에 대량 등장한 이야기가 그중의 하나이다. 약 80년의 세월에 깊숙이 침몰된 이 사실(史實)은 전정혁(全正革)의 다소 격동된 어조에 실려서 다시 꿈처럼 깨어나고 있었다.
"저의 부친님이 바로 북벌군에서 보병소대 소대장으로 있었다고 하는데요."
1월의 찬 기운은 두꺼운 벽을 뚫고 집안까지 들어오기에는 아직 미력한 듯 했다. 인터뷰 장소인 북경 서부의 모 커피숍에는 얼음을 녹일 듯한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전정혁은 북벌군에 참가했던 부친과 관련한 인터뷰 요청을 수락하고 요녕성의 무순에서 일부러 상경했다. 실제상 전정혁 자신도 현지에서 이름 있는 민간사학자였다. 그는 가족의 뿌리 찾기는 물론 역사발굴의 차원에서 부친의 족적을 지난 몇 십 년 동안 집요하게 추적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정혁 부친의 행적에는 의문점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서 기자는 인터뷰 직후 남방 모 대학의 교수 최봉춘(崔鳳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최봉춘은 근․현대의 관내 조선인을 전문 연구하고 있는 사학자이다.
각설하고, 전정혁의 부친 전병균(全秉均)은 황포군관학교의 제6기 학생이었다고 한다. 전병균은 6기생의 신분으로 북벌군에 참가했다는 것.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1기부터 7기까지의 학생을 이르는 말이다.
과연 중국 역사의 특필할 현장에 이처럼 조선인이 등장하고 있었던가. 그런데 더구나 기상천외할 비사들이 뒤미처 기억의 저쪽에서 유물처럼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었다.
명부에서 실종된 소대장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의 창시자 손중산(孫中山)이 1924년 5월 광동성 광주시 황포구의 장흥도에 세운 정치군사학교이다. 학교는 국민혁명을 위해 군관을 훈련하는데 취지를 두었으며 이런 군관은 나중에 국민정부가 발동한 북벌전쟁의 주요한 군사력으로 되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은 국민정부 산하의 군관학교와 국립대학에 조선인의 입학을 허락한다. 이때 교장판공실 비서 겸 교관으로 있던 손두환이라고 하는 조선인이 장개석과 직접 교섭하여 조선인의 황포군관학교 입학에 많이 이바지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비롯한 경찰서류에 많이 반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문헌내용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일찍 황포군관학교 제3기부터 입학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학생은 이때부터 1949년의 제22기까지 황포군관학교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마다 다 조선인이 있은 건 아니라고 최봉춘이 지적했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동학록(同學彔)》의 기록을 인용, 제3기 5명, 제4기 32명, 제5기 6명, 제6기 1총대와 2총대 11명 등 도합 14기의 96명 조선인 졸업생 이름이 검색된다고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자칭 6기생이라고 하는 전병균의 이름은 《황포군관학교 동학록》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황포군관학교 제6기 1총대(總隊)는 1928년 4월부터 1929년 5월까지 남경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2총대는 1926년 10월부터 1929년 2월까지 광주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잠깐, 이 가운데서 제6기 학생들의 일부는 북벌군을 따라 무한에 간 후 1927년 설립된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제6기로 재편성되었다.
최봉춘은 전병균의 자필이력서(1954)에 근거한 그의 추론을 이렇게 피력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전병균은 제6기(제2총대)에서 재학할 당시 소대장 자격으로 북벌전쟁에 투신하고 무한에 도착한 후 무한분교 제6기에 재편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설명: 광주기의 열사기념비)

전병균은 1927년 7월 중순까지 무한에서 훈련을 받다가 광주로 남하하여 연말의 광주기의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황포군관학교 동학록》에 등록되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 더구나 동학록은 졸업 1년 후 조사하여 편제하는 게 관례였으며, 이런저런 원인으로 상기 명부에 수록되지 못한 학생은 적지 않았다.
실제로 전병균처럼 자칭 제6기 예비생 또는 제4기생이라고 하는 조선인 최정무(崔鼎武)도 그 이름이 명부에 기록되지 않고 있다. 최정무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위에》라는 제하의 실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어찌됐거나 전병균이 북벌전쟁의 과정에서 소대장으로 있었다고 하는 이력서의 서술에 대해 최봉춘은 전적인 수긍을 하고 있었다.
"그때 국민혁명군에는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군사인재가 극히 드물었지요."
군관학교의 졸업생은 물론 학생들까지 초급 군관의 계급으로 북벌에 투입되었다. 전병균 등 조선인들은 국민혁명군 각 군단에 배속되어 있었다. 비록 구체적인 숫자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이 조선인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라기보다는 학생병사가 대부분이었다.
와중에 국민혁명군 제4군단 엽정(葉挺)독립연대 제3대대는 대대장이 양림(楊林)이었다.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전 교관이었으며 조선인이었다. 이런 연고로 3대대에는 기타 부대보다 조선인이 더 많이 집결되었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엽정독립연대는 1926년 5월 선견부대로 되어 북쪽의 호남에 진군했다. 전병균의 북벌참가 시점을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 이에 따라 전병균의 북벌군 소속부대 명칭에 씌워진 베일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다.
집단 실종된 조선인 군인들
전병균은 길림성 유하현의 동명(東明)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을 때 남방의 광주에 곧 군관학교가 설립된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동명학교는 이름 그대로 '동쪽을 밝히는 학교'라는 의미로 반일독립 사상을 선전하던 학교였다. 전병균이 동명학교에 이어 교직에 있은 요녕성 신빈현의 영영촌(英盈村) 소학교 역시 반일독립 단체가 세운 학교였다.
이에 앞서 전병균은 고향인 조선 평안북도의 선천읍 중학교에서 공부할 때 14살의 어린 나이에 '3.1'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이로 인해 경찰의 조사를 피해 도주하다시피 만주로 이주했던 것이다. 부모와 함께 행장을 내려놓은 요녕성 신빈현에는 조선독립군의 일원인 삼촌의 가족이 이미 전에 이주하여 삶의 새 터전을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전병균은 결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황포군관학교의 입학을 작심한 게 아니었다.
이력서에 따르면 전병균은 광주행 경유지인 상해에서 학우 김득수(金得洙)를 만난다. 김득수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원이었다. 운명처럼 때마침 만난 인물이었다. 전병균은 김득수로부터 광주의 중산대학에 있는 그의 지인 유상우(劉相禹)를 소개 받는다. 1926년의 《국립중산대학 학생명부》에 따르면 이 무렵 약 50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중산대학 본과와 예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유상우의 주선을 받아 전병균은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양림을 만나며 그의 알선으로 시험을 본 후 황포군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
그 시기 전병균이나 유상우, 양림처럼 광주에 집결한 조선인은 300여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여기에는 황포군관학교, 중산대학, 광동군사비행학교의 재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군대에 편입된 조선인이 망라되고 있었다고 최봉춘은 그의 연구결과에 근거하여 밝힌다. 또 조선인은 이보다 훨씬 많은 800여명에 달했다는 설이 있다. 님 웨일즈는 일대기 《아리랑》(1937)에서 주인공인 조선혁명가 김산(金山)의 회억을 인용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미상불 광주는 국민정부의 수부가 소재한 곳으로, 조선인들이 자유와 독립의 길을 모색하고 활동하는 마당으로 되고 있었다. 1926년 말, 국민정부가 무한으로 천도(遷都)하면서 뒤미처 무한 역시 조선인들의 또 하나의 집거지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야기가 그만 다른 데로 잠시 흘렀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국민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서적과 숙소, 식비, 복장, 봉급을 제공받을 수 있었으며 대신 졸업 후 일정 기간 국민혁명군에 의무적으로 복역해야 했다. 최봉춘은 그의 연구에 토대하여 이 기간을 몇 달 또는 1년 이내라고 추론하고 있었다. 아무튼 전병균 등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북벌군에 편입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1927년 7월, 국공 분열 후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문을 닫게 된다. 이때 또 다수의 조선인 청년들이 무한 조선인청년회에 의해 제6기생으로 재학하고 있었다. 이들 무한분교의 일부 학생은 엽정(葉挺), 하룡(賀龍)의 부대에 편입되고 다른 일부 학생은 장발규張發奎부대의 교도(敎導)연대에 편입, 재편성된 후 남하하여 광주에 간다. 교도연대에는 약 100여명의 조선인이 편입되었으며, 전병균도 여기에 포함된 걸로 최봉춘은 분석하고 있었다.
"콕 집어서 '교도연대 2대대 5중대는 150명의 조선인들로 구성되었다'고 전하는 얘기가 있는데요,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기의가 발발한다. 광주기의는 남창기의(1927.8)와 추수기의(1927.9)를 이어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우파에 반항하여 일으킨 또 한 차례의 반격이었다.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 무장력인 교도연대는 기의의 주력군이었다. 전병균은 이력서에 그의 소속 부대가 광주기의의 3박3일의 전투 끝에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때 기의군에 있던 조선인 군인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광주정부는 1964년 광주기의 열사능원에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을 설립하는데, 이 기념비의 낙관은 당시 기의군의 핵심 지휘관이었던 엽검영葉劍英이다. 비문은 150여명의 조선(인)청년들이 광주기의에서 희생되었다고 적고 있다. 교도연대에 편입되었다고 하는 조선인의 거의 전부 혹은 그 이상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군복을 벗은 군인의 이야기
그때 전병균은 피투성이가 된 몸을 간신히 끌고 중산대학을 찾아갔다. 그의 광주의 선착지였던 중산대학은 피신지를 찾는 마지막 한 올의 희망으로 되고 있었다.

(사진설명: 광주기의후 전병균이 은신했다고 하는 중산대학 지하실은 이 도서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학교를 수위하던 진(陳)씨 성의 노인이 전병균을 학교의 지하실에 3일 동안 숨겨줬다. 이 고마운 노인은 미리 전부터 면목을 알던 사람인지 또 기의를 동정하던 사람인지를 전병균의 이력서의 짧은 서술에만 의거해서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진씨의 도움으로 전병균은 홍콩으로 가며 이곳에서 여객선을 타고 상해로 향발한다.
이때가 1928년 1월경이었다. 전병균은 상해에서 조선혁명가 여운형(呂運亨)을 만나며 그의 집에 한동안 은신한다. 이 기간 전병균은 여운형과 얼굴을 맞대고 향후의 진로를 논의했다고 이력서에 기술하고 있다.
여운형은 중국공산당 상해 조선인지부의 지도자로, 공산당 계열의 조선인 청년들을 황포군관학교에 추천한 인물이다.
전병균의 이 상해행은 우연이 아니었다. 광주기의가 실패한 후 생존한 많은 기의 인원들은 상해 등 지역에 피신했다. 대도시 상해는 엄청난 시멘트의 수림에 각양각색의 인물을 새의 무리처럼 자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열사능원에 있는 중조혈의정 비석, 광주의기의에서 희생된 조선인청년은 150여명 된다고 밝혀져있다)
"암만 그러더라도 상해는 필경 국민당 '백색테러'의 공포에 뒤덮여 있는 곳이었지요." 최봉춘은 은신한 사람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상해에 피신했던 광주기의 인원들은 나중에 여러 곳으로 각기 흩어집니다."
그때 조선인들의 일부는 강서성 서금의 소비에트구로 갔고 일부는 만주에 가서 항일조직에 참가했다.
전병균은 남만주의 신빈행을 선택했다. 그 무렵 신빈에는 '남만청년연맹', '북만청년 총동맹', '국민부' 등 반일독립단체가 활약하고 있었다. 에피소드라고 할까, 이때 또 하나의 거물이 전병균의 앞에 나타난다. 국민부의 양세봉(梁世奉)이 그를 소속 단체에 편입시키고자 찾아왔던 것. 양세봉은 훗날 조선혁명군 사령관을 담임했던 항일명장이다.
전병균은 종국적으로 '북만청년 총동맹'에 참가하여 신빈 지부서기를 담임한다. 그러나 얼마 후 우여곡절 끝에 신빈을 떠나게 된다. 이때부터 10여 년 동안 그는 북쪽의 치치할과 중북부의 북경, 다시 북쪽의 할빈, 심양과 중부의 서주 등 지역을 전전한다. 선후로 차 기사, 병원 도우미, 상회 직원 등으로 있었고 한때는 일본경찰에 의해 감옥생활을 했다.
광복(8.15)이 나면서 출옥한 전병균은 북경에서 조선인 귀국운동에 참여하다가 광복군 제3지대에 의해 또 한 번 구금된다. 실은 귀국운동이 아닌 공산주의자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이때 전병균은 동생이 마침 광복군 제3지대에 가입한 덕분으로 20일 만에 겨우 풀려났다고 한다.
소설 같은 이런 풍파는 그저 소설로 만들어지고 있는 듯 했다. 이 시기 전병균은 대부분 생계를 잇기 위한 생활을 연속하고 있었으며, 한때 꿈처럼 동경했던 군인 생활은 허공에 날린 연처럼 그의 세계를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광복을 맞은 이듬해라고 해요. 부친님은 조선인의 귀국열차에 올랐지만 도중에 신빈현에 눌러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정혁은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회억했다.
그때 전병균은 나이 마흔을 넘는 노총각이었다. 어서 장가를 들라는 어머니의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동안 부모에게 별로 효도를 하지 못했던 전병균은 이번에는 순순히 그 분부를 따랐다.
군관학교 옛 교관의 천안문의 친견
1947년, 신빈현이 해방된 후 전병균은 신빈현 조선인 교무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된다. 그는 민족교육의 부흥에 앞장을 서서 조선인 군중들과 함께 20개의 조선족소학교를 복구, 창립했다. 공화국이 창건된 이듬해인 1950년 전병균은 신빈현 총공회 집행위원으로 당선되며 이어 선후로 신빈현 인민위원회 위원과 인민대표, 요녕성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미구에 소설 같은 일은 정말로 현실로 나타난다. 전병균은 북경에서 황포군관학교의 옛 교관, 북벌군의 옛 지휘관과 장장 30년 만의 상봉을 하는 것이다.
1956년, 전병균은 천안문 성루에 올라 모택동(毛澤東), 유소기(劉少奇) 등 당과 국가 지도자의 친견을 받으며 기념촬영을 했다. 이 장소에서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이었던 주은래(周恩來) 총리를 다시 만났다. 황포군관학교 교관부(敎官部) 주임이었던 이제심(李濟深)도 정부 부주석으로 공화국 국가지도자의 행렬에 서있었다. 북벌군의 유명한 지휘관이었던 하룡(賀龍) 원수도 또 지척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옛 교관과 학생, 옛 장령과 하급 군관의 만남의 대화가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걸 떠나서 전병균의 어깨에는 더는 군 계급장이 얹혀 있지 않았다. 전병균은 동북소수민족 참관단 일원의 신분으로 천안문에 올랐으며, 군부대가 아니라 신빈현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일개 과장급 직원이었다.
비록 황포군관학교와 북벌군 경력은 단 1, 2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전병균의 일대기에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기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신빈현에는 '반혁명분자' 전병균을 폭로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고 한다. 황포군관학교와 북벌전쟁은 필경 국민당이 주도한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 시절 극좌적인 운동의 배경에서 황포군관학교 학생과 북벌전쟁에 참여한 군인은 모두 '반혁명분자'로 점철되고 있었다.

(사진설명: 황포군관학교 학생 무덤, 무명의 조선인학생의 무덤은 또 얼마던가)

종국적으로 '대자보' 사건은 "민족인사는 투쟁하지 말라"고 하는 상부의 지시로 하여 유야무야하게 처리되었다. 그럴지라도 전병균은 지병으로 사망한 1967년까지 애당초 옛날의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꺼려했다고 한다.
"당신의 옛 경력이 우리 가족에게 그 무슨 누라도 끼칠까 두려워했던 거지요." 전정혁의 슬픔 어린 말이다.
결국 전병균은 자식들에게도 전모(全貌)를 그리기 힘든 희미한 인물로 되었다. 그때 그 시절의 풍운은 역사의 많은 사건의 중심에 서있었고 또 근․현대의 많은 명인들을 신변에서 만났던 이 인물을 더는 찾기 어려운 미스터리의 '실종자'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방송/글: 김호림/사진제공: 전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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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특파원=지난 5월22일 기자는 관광코스차로 미·일 혈투의 전적지였던 미 연방 북마리아나군도 사이판 제2차세계대전시기의 일본군최후사령부와 자살바위를 관광했다.   현지에 가보니 일본군이 저항하다 남은 포,전차 등 무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지만...
  • 2016-06-25
  • 특별군사법정 옛터 진열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권덕원.          조선족 이야기 백년사          (흑룡강신문=하얼빈) "지금까지 취재하러 왔던 언론사가 50여개 되는 데요…" 권덕원(權德源)은 문서철에 보관한 신문 지상의 기사를 일행에...
  • 2016-06-25
  • 1. “외삼촌의 행적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문득 딩동 하고 벨이 짧게 울렸다. 짧은 메시지가 폰의 화면에 뜨고 있었다. 군인이었던 외삼촌 행적을 함께 알아봐 줄 수 없겠는가 하는 문의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주인은 북경의 박씨 성의 지인이었다. 취재차로 대륙의 조선인 노병(老兵)을 만나...
  • 2016-06-20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결론부터 쓴다면 양산(梁山)에는 무덤 귀신만 있었다. 양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양산에 도착하면서 눈앞에 언뜻 떠오른 것은 웬 풍만한 여인이었다. 택시기사가 말하는 산의 이름은 그대로 여인을 연상...
  • 2016-06-17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땅의 이름은 무심코 생긴 게 아니다. 설화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침반처럼 위치를 나타내며 또 거울처럼 모양을 흉내 낸다.한양(漢陽)은 "놈을 기르다"는 뜻의 한양(漢養)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실은 한강(漢江)의 북쪽에...
  • 2016-06-03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옛말에 "잉어가 용문을 뛰어넘으면 용이 된다"고 했다. 그럼 인간이 용문을 건너면 뭐가 될까?…"그거야 두발로 건너보면 금방 알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그래서 옛날부터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을지 모...
  • 201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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