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호림기획련재20] 국왕의 암살명부에 오른 신라의 고승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7월28일 08시54분    조회:342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승려 무상(無相)이 신라 국왕의 암살명부에 오른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그가 왕자 출신이라고 할 때부터 이 암살사건은 미리 예고되고 있었다. '신승전(神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스님의 동생이 (신라) 본국에서 새로 왕이 되었으며, (왕은) 그 자리가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내 죽이고자 했다." '신승전'은 민간에서 유전되는 승려들의 사적을 기록한 명나라 때의 불교전적이다.

  다행히 국왕의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치고 있었다. 자객은 웬 일인지 천정에서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무상이 좌선(坐禪)하던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다.

  "무상 스님이 이인(異人)이라고 하니 그 무슨 신명(神明)이 스님을 지키고 있었을까요?" 솔직히 무상의 암살사건 이야기를 읽었다면 누구라도 머리에 떠올리게 되는 물음이다.

  실제로 무상은 중국불교에서 숭상하는 오백나한(五百羅漢)의 455번째 나한(羅漢)으로 모셔져 있다. 오백나한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5백 명의 성자(聖者)이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摩)가 307번째 나한이며, 육조 혜능(慧能)조차 오백나한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백나한의 한명인 무상 대사, 북경 벽운사의 나한당에 있다.

  정작 암살사건이 벌어졌던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정중사(淨衆寺)에서 무상은 무명의 승려로 되어 사찰의 명부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만불사(萬佛寺)는 이름처럼 부처의 조각상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사천박물관의 해설원은 이렇게 조각상만 일일이 열거하고 있었다.

  만불사는 정중사의 다른 이름으로서 일찍 동한(東漢) 시기에 세워졌다. 남조(南朝) 때 안포사(安浦寺)라고 했고 당(唐)나라 때 정중사라고 불렀으며 송(宋)나라 때 또 정인사(淨因寺)라고 개명했다. 명(明)나라 말, 병란으로 훼손될 때는 만불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고찰은 19세기 말 성도의 만불교(萬佛橋) 근처에서 웬 농부의 호미에 묻어나와 마침내 볕을 보았다. 그날 농부는 신이 들렸는지 밭에서 무려 백여 존의 불상을 파냈다고 한다. 성도에서 일장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후 만불교 근처에서 또 불상 등이 발견되는데, 1950년대 초에는 한꺼번에 200여 존의 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2009년, 사천박물관이 정식으로 개관하며 특별히 만불사 석각관(石刻館)을 따로 만들었다.

만불사 석각관에 있는 부처 조각상.

  "아육왕(阿育王) 조각상은 중국에 그리 많지 않은데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조각상은 우리 성도에서만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석각관의 부처상, 보살상, 삼존불… 흙으로 빚고 금칠을 올린 조각상은 해설원의 입에서 줄을 이어 나온다. 아니, 해설원의 자랑거리는 또 하나 있었다. 세계의 첫 지폐인 교자(交子)는 북송(北宋) 시기 성도에서 탄생했는데, 바로 정중사에서 찍어냈다는 것이다. 당․송(唐․宋) 시기 정중사는 장경(藏經)을 조각, 인쇄하는 등 상당히 높은 인쇄술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무상은 석각관의 정중사에서 끝내 만나지 못했다. 정중사에서 20여 년을 수행하면서 중생을 교화했고 정중종(淨衆宗)의 개조(開祖)로 칭송되었던 무상은 기어이 석각관에 상(像)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혹여 무상은 아직도 정중사 옛터의 땅속 어디엔가 그의 형체를 감추고 있을까…

  사실상 무상의 신라왕자 신분부터 미스터리한 부분이 있다. '신승전'은 "무상 스님은 본래 신라국의 사람이요, 그 땅 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전한다. 무상은 당(唐)나라 보응(寶應) 원년(762)에 79세를 일기로 원적했으니, 684년에 출생한 걸로 된다. 이에 따라 신라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태자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신문왕은 셋째 태자가 없는 걸로 전하며 무상은 성덕왕(聖德王, ?~737)의 셋째 아들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니, 무상은 신문왕의 왕손이 되는 것이다. 어찌됐거나 선종(禪宗) 법통의 전승사(傳承史)로 일컫는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도 "무상선사는 속성(俗姓)이 김씨이요, 신라왕의 족속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걸로 미루어 무상의 신라왕족 신분은 확실한 것 같다.

  시야비야를 떠나 무상의 행적은 신화 같은 이야기처럼 하나하나 모두 신비스럽다. 그의 이런 자취는 '송고승전(宋高僧傳)', '신승전' 등 불교전적의 행간에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무상은 개원(開元) 16년(728) 바다를 건너 입당(入唐)했다. 그가 44세 되는 해였다. 장안(長安)에 이른 후 현종(玄宗)을 알현했으며, 현종은 그를 장안의 선정사(禪定寺)에서 수행토록 하였다. 그 후 무상은 오지의 사천성(四川省)으로 옮겨가서 지선(智詵) 선사를 알현하며 고승 처적(處寂)의 문하에 들어간다.

  무상의 남다른 이적(異蹟)은 처적 선사에게서 제일 먼저 나타난다. 무상이 도착하기 전 처적 선사는 "내일 밤에 손님이 오니 너희는 마땅히 닦고 쓴 후 기다리라"고 주변에 귀띔을 한다. 그로부터 하루 사이에 과연 무상이 도착했다. 이때 처적 선사는 무상에게 가사袈裟와 더불어 무상이라는 이 법호를 내리는 것이다.

  무상은 처적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혼자서 수행처(修行處)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성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70㎞ 상거한 청성산(靑城山)이었다. 청성산은 상고시절 황제(黃帝)가 선인(仙人)으로부터 풍운을 다스리는 술수를 전수받아 수도(修道)했다고 전하는 곳이다.

  사실상 청성산은 도교가 발원한 산이며 또 도교 4대 명산의 으뜸이다.

  아무래도 여기서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할 것 같다. 청성산은 고대 신화에서 "청도(淸道), 자미(紫薇)로 천제의 거소(居所)"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도교의 명산으로 이름난 것은 장릉(張陵)이 와서 전도를 하면서부터이다. 장릉은 본래 성도 부근의 학명산(鶴鳴山)에서 수도하면서 도교의 원류인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설립하였는데, 신자에게 다섯 말의 쌀을 바치게 한데서 이 명칭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두미교는 일명 천사도(天師道)라고 하며 노자(老子)를 교조(敎祖)로 삼고, '도덕경(道德經)'을 경전으로 삼는다.

  잠깐, 고구려의 28대왕 보장왕(寶藏王)이 이 도교를 신봉했다고 고사(古史)가 전한다. 그 무슨 운명의 작간인지 몰라도 보장왕은 나중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도교가 일어난 성도 근처로 유배되는 것이다.

  청성산은 수․당(隋․唐)나라 시기 도교를 숭상하면서 또 '신선의 거소'로 존숭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청성산에는 도관이 수풀처럼 일떠섰고 도인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중국 속담에는 '일산불용이호(一山不容二虎)' 즉 "산 하나에 호랑이 두 마리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당나라 초, 불교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청성산에는 불교와 도교의 영역 다툼이 일어났다.

  나중에 종단의 이 소송사건은 현종에게 알려지게 된다. 황제의 칙령은 "도관은 도가에 돌리고, 사찰은 산밖에 의탁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관은 앞산인 전산(前山)에 있게 되었고, 사찰은 뒷산인 후산(後山)에 서게 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조서에서 본명 '청성산(淸城山)'의 맑을 청(淸)에 물 삼수변이 없어지면서 푸를 청靑으로 되었고, 산 이름도 차츰 푸를 청(靑)을 쓴 '청성산(靑城山)'으로 전해진다.

관광객이 붐비는 청성산 입구.

  무상은 불교와 도교가 함께 만나는 청성산의 계곡에서 두타(頭陀)의 수행을 했다. 두타행은 출가인이 세속의 모든 욕망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행을 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어찌 보면 무상은 종단의 세속적인 논쟁의 복판에서 그 소용돌이를 몸으로 잠재우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무상(無相)이라는 이 이름 자체가 바로 형상에 구애되지 않는 초연한 경지를 말한다.

  무상은 좌선을 시작하면 5일이 지나는 일이 많았다고 '신승전'이 기록하고 있다. 산에 머문 지 오래되자 옷은 해지고 머리칼은 길었다. 사냥꾼이 동물인 줄로 의심하여 활을 쏘려다가 다시 멈췄다고 한다.

  어느 날, 맹수 두 마리가 깊은 눈을 밟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무상은 맹수에게 먹이로 자기의 몸을 보시하기를 원하고 맹수 앞에 흔연히 누웠다. 맹수는 무상의 머리에서 발까지 냄새를 킁킁 맡더니 가버렸다. 가끔 밤중에 바위의 아래로 호랑이의 머리털이 손에 잡히고 있었다.

  "이야기가 천 년 전의 실화라고 해도 신화로 들어야 하겠네." 일행 중 누군가 이렇게 농을 했다.

  하긴 청성산은 더는 청정한 수련장소가 아닌 세속의 관광명소로 되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관광객이 숲을 이뤘다. 산짐승이 있다면 지레 놀라서 천방지축 산 밖으로 달아날 것 같았다. 실제로 일행은 종일토록 청성산에서 네발 가진 짐승이라곤 다람쥐조차 만나지 못했다.

  마침내 무상은 두타행의 세계에서 나와 성도에 들어온다. 현령 양익(楊翌)은 그의 괴이함에 의심을 했다. 무상을 추적하는 방을 붙이고 무리 20여명에게 명하여 잡아오도록 했다. 무리는 무상의 몸 근처에 다가서자 모두 두려워서 벌벌 떨었으며 낯빛이 변했다.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돌과 모래가 관청으로 날아들었다. 장막이 펄럭이고 책이 날아갔다. 양익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감히 말조차 못했다. 사죄를 해서야 비로소 바람이 멎었다. 이에 무상을 옛 거소에 봉송(奉送)했으며 시주하는 사람들을 권유하여 정중사, 대자사(大慈寺), 보제사(菩提寺), 녕국사(寧國寺) 등 사찰을 짓게 했다. 바깥 마을에 지은 종탑 등속은 헤아릴 수 없었다.

  현종은 이때 성도에서 또 한 번 무상을 만나고 있었다. 이맘때 현종은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성도에 있었다. '안사의 난'은 755년부터 763년까지 당나라의 절도사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 반란은 당나라를 쇠퇴하게 만든 전환점이다.

  거두절미하고, 무상은 구법을 하러 왔던 예전의 그 무상이 아니었다. 수행을 깊이 닦았고 신자들의 존숭을 받는 고승이었다. 이에 현종은 무상을 높은 예의로 대했으며 그들의 이 상봉은 가화(佳話)로 사책에 기록된다.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 수리시설 도강언을 구경하기 위한 관광객이 그칠 줄 모른다.

  그러나 또 있었을 법한 다른 만남은 전하지 않는다. 청성산 부근에는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 수리시설 도강언(都江堰)이 있다. 도강언은 2천 여 년 전에 강줄기를 나누기 위한 제방과 이에 딸린 수로이다. 청성산에 들어가는 길가에 있으며 청성산 못지않게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다. 청성산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한 사람처럼 이 도강언에 들린다.

  "무상 스님도 청성산에 가시면서 도강언을 경유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강언의 입구에서 떡메의 먹임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두 사내가 가게 앞에서 떡메를 엇갈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대륙의 오지에도 찰떡을 쳐서 먹는 풍속이 있던가?…

도강언의 식품가게 앞에서 떡메질을 하는 직원.

  사실 떡판에 놓인 건 찰떡이 아니라 과자였다. 호두 씨를 엿에 버무리고 떡메로 쳐서 바삭바삭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순간 좌중에는 웃음이 터졌다. "이거 참, 표상(表象)에 다들 눈이 싹 가려졌네요."

  그러고 보면 눈에 보고 있는 형상은 실상인지 가상인지 구분키 어려운 오묘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762년 5월 19일, 무상은 성도의 정중사에서 가부좌를 한 채로 홀연히 입적했다. 이때 "해와 달은 빛을 잃었고 하늘과 땅은 백색으로 변했으며…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수행자들은 의지하던 곳이 끊어졌다"고 '역대법보기'가 통탄하고 있다. 하늘을 치솟는 무상의 위상을 알려주는 서술의 일부이다.정말이지 무상의 이름이 중국불교의 오백나한 명부에 들어간 그 이유를 이제는 잘 알 것 같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72
  •   태조 이성계의 왕릉인 건원릉에서 5일인부들이 벌초를 하고있다. 왜 태조의 무덤엔 잔디가 없고 억새가 자랄까?   5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태조의 묘인 건원릉에서 벌초가 진행됐다. 태조 이성계의 묘 봉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잔디 대신 억새가 식재돼 있다. 동구릉 문화해설사 한철수씨(55)에 따르면 태조...
  • 2017-04-05
  • 4월3일 청명절을 앞두고 연변과기대AMP총동문회 부분적 경제인들과 연변화린무역회사 당지부에서는 주덕해동지기념비와 연변렬사릉원에서 일련의 추모활동을 조직하였다. 이날 연변과기대AMP총동문회 제14기,제15기,축구협회와 연변화린무역유한회사 당지부성원들은 주덕해동지기념비로 찾아가서 로주장 주덕해동지와 김영...
  • 2017-04-04
  • 올해는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0돐, 연길현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건립 85돐이 되는 뜻깊은 한해이다. 이런 시점에서 왕우구의 항일렬사들을 추모하고 사료들을 발굴,선전하는것은 자못 뜻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 연변대학인문학원 력사학부,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 연변작가협회 남방창작위원회가 공동 주최하고 연변오덕된...
  • 2017-04-01
  • 책 "인류의 기억, 남경대학살의 실증"이 12일 남경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 제3자 그리고 전쟁후 심판 등 네개 측면의 문서기록 사료와 역사사진 약 200점을 정선하고 사진으로 역사를 증명하며 문서기록 사료로 기억을 전승하는 방식으로 일본군의 폭행을 까밝히고 역사의 진상을 환원했습니다. 1937년...
  • 2016-12-13
  • 지난 11월 19일, 북경조선족대학생 력사문화살롱에서는 중앙민족대학에서 44번째로 되는 행사를 가지고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세계전략연구원 동북아연구중심 주임이며 수석연구원이며 박사생 지도교수인 박건일교수를 청해 혁명가이며 화가인 한락연동지의 혁명생애와 이야기를 청취하고 박건일교수의 한락연 관련 연구성과...
  • 2016-11-22
  •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국제학술대회 개최 11월 18일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국제학술대회 개최한다.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관련사진보기 11월 18일 국제학술대회, 드러나지 않은 해외 3.1운동 밝힐 예정 "해외네트워크 구축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기회 마련" "3.1운동을 새로운 시...
  • 2016-11-09
  • [한겨레] 계명대박물관서 ‘어진 전시회’ 개최 조선시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어진은 많이 훼손됐지만 대략의 모습을 알아 볼수 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영잉군 시절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계명대 제공 조선시대 왕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티브이 드라머에 나오는 왕들과 비슷할까? 아닐까? 계명대학...
  • 2016-10-12
  • 오는 9일은 반포 570돌을 맞는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말은 하지만 글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집현전의 학자들과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합니다. 한글날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인데요, 처음 시작은 '가갸날'이었습니다. 1926년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이 모인 &...
  • 2016-10-09
  •       이토 정확한 저격장소 등 고증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민족 자결’의 평화 사상을 주창한 안중근 의사를 중국에 알리는 데 앞장서온 조선족 재야학자 서명훈 옹이 별세했다. 올해 86세인 서 옹이 5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에 함께 힘을 써온 김월배 다롄(大...
  • 2016-10-06
  • 《인물로 보는 조선족력사》를 주제로한 중국조선민족사학회제2기4차학술회의가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연변대학민족연구원, 연변력사학회의 공동주취로 8월 17일, 연변대학에서 펼쳐졌다.   이날 행사에서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정신철회장이 개막사를, 연변대학민족연구원 박금해원장이 환영사를 했다. 이어 원 국가민족...
  • 2016-08-17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헛갈리지 않도록 먼저 설명을 해둔다. 이 천태산(天台山)은 천태종이 일어난 그 천태산이 아니다. 대륙 남부의 녕파(寧波)가 아니라 동부의 일조(日照)에 있다. 일조는 일출의 첫 햇살이 제...
  • 2016-08-15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승려 무상(無相)이 신라 국왕의 암살명부에 오른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그가 왕자 출신이라고 할 때부터 이 암살사건은 미리 예고되고 있었다. '신승전(神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스님의 동생이 (신라) 본국에서 새...
  • 2016-07-28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복구 공사를 진행하면서 지상사는 문을 닫고 있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사찰은 공사현장 그 자체였다. 시멘트를 반죽하는 기계가 굉음을 뿜고 있었고, 전당을 에워싼 비계(飛階)로 인부들이 분주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오불꼬불한 산길...
  • 2016-07-20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아니, 그게 뭐꼬?" 제목을 미리 말했더니 사람들의 한결 같은 반응은 이 물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를 모두 그 무슨 환상소설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법어(法語) 같은 화두를 이야기의 꼭지로 삼게 된 이...
  • 2016-07-01
  •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특파원=지난 5월22일 기자는 관광코스차로 미·일 혈투의 전적지였던 미 연방 북마리아나군도 사이판 제2차세계대전시기의 일본군최후사령부와 자살바위를 관광했다.   현지에 가보니 일본군이 저항하다 남은 포,전차 등 무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지만...
  • 2016-06-25
  • 특별군사법정 옛터 진열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권덕원.          조선족 이야기 백년사          (흑룡강신문=하얼빈) "지금까지 취재하러 왔던 언론사가 50여개 되는 데요…" 권덕원(權德源)은 문서철에 보관한 신문 지상의 기사를 일행에...
  • 2016-06-25
  • 1. “외삼촌의 행적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문득 딩동 하고 벨이 짧게 울렸다. 짧은 메시지가 폰의 화면에 뜨고 있었다. 군인이었던 외삼촌 행적을 함께 알아봐 줄 수 없겠는가 하는 문의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주인은 북경의 박씨 성의 지인이었다. 취재차로 대륙의 조선인 노병(老兵)을 만나...
  • 2016-06-20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결론부터 쓴다면 양산(梁山)에는 무덤 귀신만 있었다. 양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양산에 도착하면서 눈앞에 언뜻 떠오른 것은 웬 풍만한 여인이었다. 택시기사가 말하는 산의 이름은 그대로 여인을 연상...
  • 2016-06-17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땅의 이름은 무심코 생긴 게 아니다. 설화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침반처럼 위치를 나타내며 또 거울처럼 모양을 흉내 낸다.한양(漢陽)은 "놈을 기르다"는 뜻의 한양(漢養)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실은 한강(漢江)의 북쪽에...
  • 2016-06-03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옛말에 "잉어가 용문을 뛰어넘으면 용이 된다"고 했다. 그럼 인간이 용문을 건너면 뭐가 될까?…"그거야 두발로 건너보면 금방 알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그래서 옛날부터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을지 모...
  • 2016-05-19
‹처음  이전 4 5 6 7 8 9 10 11 12 13 1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