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진용학, 정강산 홍군에 있었던 조선인 대대장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4월25일 16시06분    조회:230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정강산(井岡山)의 이름은 강서성 서남부의 산골마을에서 시작된다. 시초에는 마을 주변에 산이 둘린 지세가 우물을 방불케 하고 또 마을에 강이 흐른다고 해서 우물과 강을 합쳐 '정강산촌(井江山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현지인들의 발음에서 물 이름 '강(江)'이 언덕 '강(岡)'과 비슷하다고 해서 나중에 이처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작 중국 첫 농촌혁명근거지의 대명사로 된 것은 모택동(毛澤東)이 작성한 보고서에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1928년 11월,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서 《정강산의 투쟁》을 회부하면서 처음으로 '정강산'이라는 이 명칭을 사용했다.


모택동과 추수기의. (자료그림)

  이 무렵 당대표 모택동은 군단장 주덕(朱德)과 더불어 홍군(紅軍) 제4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약칭 홍4군(紅四軍) 즉 중국공농홍군(工農紅軍) 제4군은 1928년 4월 모택동이 인솔한 추수(秋收)기의의 부대와 주덕(朱德)이 영도한 남창(南昌)기의의 부대가 정강산에서 합류한 후 통합, 편성된 군부대의 번호(番號)이다. 정강산의 이 합류는 중국 혁명의 불씨를 확보했으며 미구에 들판의 큰 불길을 만들었다. 홍군은 항일전쟁시기 신사군,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등 이름으로 불리다가 종국적으로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한다.

  훗날 홍4군의 소대장이나 중대장은 물론 일반 병사까지 사단과 군단급 간부로 성장한 경우가 적지 않다. 홍4군 초기에 대대장으로 있던 임표(林彪)는 나중에 공화국의 원수로 등극했다.

  정강산 시기의 이 홍군 대오에는 진용학(陳龍鶴)이라고 하는 조선인 대대장이 있었다. 그 역시 임표처럼 황포군관학교 제4기에 입학하였고 북벌(北伐)전쟁에 참가했으며 또 임표가 남창기의에 참가하듯 추수기의에 참가했다고 전하는 전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진용학은 그때 그 시절의 난세에 혜성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두 부대 합류 기념비, 모택동과 주덕이 굳게 손을 잡았다.

  황포군관학교에 두 번 입학한 사람

  "진용학은 선배 학자들이 벌써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추적한 인물이지요." 사학자 최봉춘은 이렇게 진용학에 대한 학계의 연구를 일축하고 있었다.

  최봉춘은 관내 조선인의 연구에서 전문가로 꼽히는 조선족 사학자이다. 그는 진용학에 대한 사학계의 연구가 대부분은 부득불 제3자의 구술에 의거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직도 기연미연(其然未然) 하고 있는데요, 잘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뒷이야기이지만, 중국 최대의 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 백과에 진용학에 대한 소개는 겨우 300여자에 불과했다. 실제로 진용학은 출생일이나 고향이 미지수로 있는 등 세간에 남긴 흔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그때부터 몇 년 후 남방의 어느 한 전투에서 희생하기까지의 짧은 경력이 그의 전부로 되고 있으니 말이다.

  바이두 백과는 진용학이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의 창시자 손중산(孫中山)이 1924년 5월 광동성 광주시 황포구의 장흥도에 세운 정치군사학교이다.

  이 무렵 조선인 무장독립단체 의열단(義烈團, 1919)은 중산대학(中山大學), 황포군관학교 등의 입교를 통한 자기무장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조선인 학생은 1924년 시작된 제3기부터 1949년 졸업한 제22기까지 황포군관학교에 나타난다. 바이두 백과는 진용학이 1926년 10월 임표 등과 함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북벌에 투신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황포군관학교 동학록(同學彔)》의 제4기 졸업생 명부에는 진용학의 이름이 출현하지 않는다. "진용학이라는 인물이 애초부터 황포군관학교 4기생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최봉춘은 이렇게 똑 부러지게 말하고 있었다.

  1926년, 국민정부가 진행한 통일전쟁인 북벌(北伐)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한 후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즉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가 설립되었다. 진용학은 바로 이 무한분교 포병학과의 5기생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최봉춘이 밝히고 있다. 임표처럼 이미 4기를 졸업했다고 하면 무한분교에 다시 재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악(留鄂)한국혁명청년회'의 장정(章程)에 회원 진용학은 포병과라고 똑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봉춘은 《조선일보》의 1927년 3월 16일자 기사 내용을 이렇게 소상하게 설명했다. 유악한국혁명청년회는 1927년 초 호북성에서 결성된 조선인 진보단체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적극 가담하고 있었다. 무한분교는 이 청년회에 학생 모집을 위탁하고 그들이 모집한 조선인청년을 입교시키고 있었다.

  무한분교에는 역사상 5기 포병과와 6기 정치과가 있었을 뿐이다. 포병과는 광주에서 전학해온 황포군관학교 본교 5기생들이 북벌전쟁에 투신하여 무한에 도착한 후 곧 무한분교에 재편성된 것이다.


홍4군 위원들의 단체사진.

  정강산에 오른 조선인 군관

  1927년 무렵, 무한분교 포병과에는 조선인 2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고 한국혁명청년회가 전한다. 그러나 나중에 검색되는 조선인 졸업생은 6명뿐이며 진용학은 여기에 망라되지 않는다. 진용학의 고향과 출신, 나이 등도 이에 따라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다.

  솔직히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학생들의 구체적인 신상은 물론 정확한 수효도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인들은 입교할 때 조선과 중국의 이중 국적을 소지했고 또 만주지역 등으로 출신지역을 위장했으며 가명을 사용했다. 일본 정보망의 포착과 이로 인한 국제적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927년 7월,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후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문을 닫게 된다. 이 무렵 또 다수의 조선인 청년들이 무한 한국혁명청년회에 의해 제6기생으로 재학하고 있었다. 이들 무한분교의 일부 학생은 엽정(葉挺), 하룡(賀龍)의 부대에 편입되고 다른 일부 학생은 장발규(張發奎)부대의 교도(敎導)연대에 편입되었다. 이에 앞서 6월, 중국공산당은 장발규부대를 협조하여 총 지휘부 경위연대를 편성하는데, 진용학이 당의 위임, 파견을 받아 이 연대의 일원으로 되었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훗날 엽정, 하룡의 부대에 편입된 조선인들은 대개 남창기의에 참가하며 교도여단에 편입된 조선인들은 거개 광주기의에 참가, 진용학이 소속된 경위연대는 추수기의에 참가한다. 추수기의는 남창기의와 광주기의와 더불어 1927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우파에 반항하여 일으킨 3대 기의이다. 공화국의 창시자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홍기에는 조선인(족)의 피가 스며있다고 평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진용학은 1927년 9월 9일 추수기의에 참가하며 이어 기의부대와 함께 정강산에 오른다. 그는 선후로 정강산에서 벌어진 오두강(五斗江), 용원구(龍源口) 전투와 영신(永新)의 3차 공격 등 유명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1928년 8월, 모택동은 제31연대 주력을 인솔하여 이웃한 호남에 홍군 대오를 접응하러 갔다. 예하의 1대대는 정강산에 남아 수비를 담당했다. 이틈을 타서 국민당 군대 4개 연대의 병력이 정강산을 진공했다. 소대장 진용학은 다른 부대와 배합하여 국민당 군대의 여러 차의 진공을 물리쳤으며 황양계(黃洋界) 보위전의 승리를 거뒀다. 황양계는 정강산의 북쪽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이 시기 진용학의 전투경력은 제3자의 자세한 회억이나 증언, 기록이 없으며 따라서 영구한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그러나 진용학이 1929년 제31사단 31연대 1대대 3중대 중대장으로 (진급되어) 있었다고 하는 짧은 기술에 따르더라도 진용학의 뛰어난 전투능력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을 법한다.

  사실상 임표도 화려한 전투경력을 쌓으면서 북벌 시기의 소대장으로부터 남창기의 후에는 중대장, 홍4군 초기에는 대대장의 군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진용학의 전투경력은 아쉽게도 얼마 후 마침부호를 찍었다.


홍군의 유적을 따라 답사하는 사람들.

  조선인 중대장의 미스터리의 사망

  《정강산홍군인물지(人物志)》(2010, 강서인민출판사)는 정강산의 홍군열사를 소개한 권위적인 문헌이다. 이 책은 진용학이 희생된 경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29년 1월 (진용학은) 홍4군 주력을 따라 정강산을 떠났으며 공남(贛南, 강서성 남부), 민서(闽西, 복건성 서부)로 갔다. 1932년 4월, 홍12군은 복건성의 남부 중요한 도시 장주(漳州)를 공략하는 전역에 참가했다. 격전에서 진용학은 불행히 희생되었다."

  실제로 1929년 1월 14일, 정강산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 군대의 제3차 '포위토벌'을 타개하고 부대의 급양문제를 해결하고자 모택동과 주덕은 홍4군의 주력을 인솔하여 강서성 남부에 진군하며 공남혁명근거지를 설립한다. 1930년 봄, 공남과 민서에서 각기 공농(工農) 민주정부를 설립하며 두 지역의 지방무장은 각기 홍3군과 홍12군으로 편성되었다. 미구에 공남과 민서 두 지역은 한데로 이어지며 강서성의 서금(瑞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혁명근거지를 형성하였다.

  잠깐, 에피소드가 있다. 장주전역에서 홍군은 국민당 군대의 비행기 한 대를 노획하는 것. 이때 노획한 비행기를 홍군부대의 조선인이 조종했다고 공화국의 원수 섭영진(聶榮臻)이 그의 회억록에 기재하고 있다.

  "이 조종사가 운남항공학교를 다녔던 의열단 단원 장지일(張志日)로 추정됩니다." 최봉춘의 말이다.

  중앙혁명근거지의 홍군 부대에는 또 양림(楊林) 교관 등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이 여럿이나 출현하고 있었다. 이런 조선인의 대부분은 중국공산당 상해 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라고 최봉춘이 밝힌다.


모택동의 글, 한점의 불꽃도 들판의 불길로 타오른다.

  이 무렵 희생되었거나 실종된 조선인은 진용학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처럼 황포군관학교 학생이었다고 하는 최정무(崔鼎武)는 어느 한 전투에서 국민당 군대에 포로로 되면서 홍군 대오를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진용학은 이에 앞서 이미 희생되었다고 하는 다른 기록이 있다. 해방군출판사가 1990년 출판한 《장종손(張宗遜)회억록》의 기술에 따르면 1929년 8월경 홍4군 주력은 제3종대를 전위부대로 삼아 장평(漳平)으로 진군, 첫날 소속 제7지대가 적 3,4백 명과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비록 적을 격퇴했지만 이 전투에서 진용학 대대장이 중상을 입고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31연대는 서금 부근의 장정(長汀)에서 제3종대로 개편되었고 진용학은 제7지대 21대대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상기 회억록을 저술한 장종손은 북벌전쟁, 추수기의 등에 참가했으며 선후로 홍군 군단장, 홍군대학 교장으로 있었고 공화국 창건 후 상장 군함(軍銜)을 받은 인물이다. 장종손의 초기의 경력에는 진용학의 인생궤적과 중첩되는 부분이 적지 않게 있으며, 진용학에 대한 그의 서술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에 따라 일부 학자들은 진용학의 사망 일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홍군 대대장 진용학이 장주전역에서 희생되었다는 설은 재론이 필요하다는 것.

  사실상 장종손의 기술도 그렇지만 장평과 장주는 인접하며 또 그때 그 시절 홍군은 복건성 서부와 남부에서 빈번하게 활동하면서 크고 작은 많은 전투를 벌였다. 1929년의 장평전투와 1932년의 장주전역이 혼돈되었을 가능성이 십분 크다는 것이다. 더구나 홍12군은 진용학이 희생되었다고 하는 장주전역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최봉춘은 진용학의 희생 시일과 장소를 특정하지 않고 대체로 국민당 군대가 진행한 다섯 차례의 '포위토벌' 시기 즉 1930~1934년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아무튼 이처럼 홍군 시절에 희생되고 실종된 장병은 수만 명으로 헤아리고 있다. 진용학은 황포군관 학생이고 북벌군이며 홍군 대대장이고 또 외국인이라는 이 특이한 다종 신분 때문에 기억의 편린이나마 만들 수 있지 않았을지 한다.

  그러나 진용학 역시 기타의 많은 무명의 홍군 장병처럼 세상에 무덤 한기는 물론이요 비석 하나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 김호림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72
  •   태조 이성계의 왕릉인 건원릉에서 5일인부들이 벌초를 하고있다. 왜 태조의 무덤엔 잔디가 없고 억새가 자랄까?   5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태조의 묘인 건원릉에서 벌초가 진행됐다. 태조 이성계의 묘 봉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잔디 대신 억새가 식재돼 있다. 동구릉 문화해설사 한철수씨(55)에 따르면 태조...
  • 2017-04-05
  • 4월3일 청명절을 앞두고 연변과기대AMP총동문회 부분적 경제인들과 연변화린무역회사 당지부에서는 주덕해동지기념비와 연변렬사릉원에서 일련의 추모활동을 조직하였다. 이날 연변과기대AMP총동문회 제14기,제15기,축구협회와 연변화린무역유한회사 당지부성원들은 주덕해동지기념비로 찾아가서 로주장 주덕해동지와 김영...
  • 2017-04-04
  • 올해는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0돐, 연길현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건립 85돐이 되는 뜻깊은 한해이다. 이런 시점에서 왕우구의 항일렬사들을 추모하고 사료들을 발굴,선전하는것은 자못 뜻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 연변대학인문학원 력사학부,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 연변작가협회 남방창작위원회가 공동 주최하고 연변오덕된...
  • 2017-04-01
  • 책 "인류의 기억, 남경대학살의 실증"이 12일 남경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 제3자 그리고 전쟁후 심판 등 네개 측면의 문서기록 사료와 역사사진 약 200점을 정선하고 사진으로 역사를 증명하며 문서기록 사료로 기억을 전승하는 방식으로 일본군의 폭행을 까밝히고 역사의 진상을 환원했습니다. 1937년...
  • 2016-12-13
  • 지난 11월 19일, 북경조선족대학생 력사문화살롱에서는 중앙민족대학에서 44번째로 되는 행사를 가지고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세계전략연구원 동북아연구중심 주임이며 수석연구원이며 박사생 지도교수인 박건일교수를 청해 혁명가이며 화가인 한락연동지의 혁명생애와 이야기를 청취하고 박건일교수의 한락연 관련 연구성과...
  • 2016-11-22
  •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국제학술대회 개최 11월 18일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국제학술대회 개최한다.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관련사진보기 11월 18일 국제학술대회, 드러나지 않은 해외 3.1운동 밝힐 예정 "해외네트워크 구축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기회 마련" "3.1운동을 새로운 시...
  • 2016-11-09
  • [한겨레] 계명대박물관서 ‘어진 전시회’ 개최 조선시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어진은 많이 훼손됐지만 대략의 모습을 알아 볼수 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영잉군 시절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계명대 제공 조선시대 왕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티브이 드라머에 나오는 왕들과 비슷할까? 아닐까? 계명대학...
  • 2016-10-12
  • 오는 9일은 반포 570돌을 맞는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말은 하지만 글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집현전의 학자들과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합니다. 한글날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인데요, 처음 시작은 '가갸날'이었습니다. 1926년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이 모인 &...
  • 2016-10-09
  •       이토 정확한 저격장소 등 고증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민족 자결’의 평화 사상을 주창한 안중근 의사를 중국에 알리는 데 앞장서온 조선족 재야학자 서명훈 옹이 별세했다. 올해 86세인 서 옹이 5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에 함께 힘을 써온 김월배 다롄(大...
  • 2016-10-06
  • 《인물로 보는 조선족력사》를 주제로한 중국조선민족사학회제2기4차학술회의가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연변대학민족연구원, 연변력사학회의 공동주취로 8월 17일, 연변대학에서 펼쳐졌다.   이날 행사에서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정신철회장이 개막사를, 연변대학민족연구원 박금해원장이 환영사를 했다. 이어 원 국가민족...
  • 2016-08-17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헛갈리지 않도록 먼저 설명을 해둔다. 이 천태산(天台山)은 천태종이 일어난 그 천태산이 아니다. 대륙 남부의 녕파(寧波)가 아니라 동부의 일조(日照)에 있다. 일조는 일출의 첫 햇살이 제...
  • 2016-08-15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승려 무상(無相)이 신라 국왕의 암살명부에 오른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그가 왕자 출신이라고 할 때부터 이 암살사건은 미리 예고되고 있었다. '신승전(神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스님의 동생이 (신라) 본국에서 새...
  • 2016-07-28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복구 공사를 진행하면서 지상사는 문을 닫고 있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사찰은 공사현장 그 자체였다. 시멘트를 반죽하는 기계가 굉음을 뿜고 있었고, 전당을 에워싼 비계(飛階)로 인부들이 분주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오불꼬불한 산길...
  • 2016-07-20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아니, 그게 뭐꼬?" 제목을 미리 말했더니 사람들의 한결 같은 반응은 이 물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를 모두 그 무슨 환상소설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법어(法語) 같은 화두를 이야기의 꼭지로 삼게 된 이...
  • 2016-07-01
  •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특파원=지난 5월22일 기자는 관광코스차로 미·일 혈투의 전적지였던 미 연방 북마리아나군도 사이판 제2차세계대전시기의 일본군최후사령부와 자살바위를 관광했다.   현지에 가보니 일본군이 저항하다 남은 포,전차 등 무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지만...
  • 2016-06-25
  • 특별군사법정 옛터 진열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권덕원.          조선족 이야기 백년사          (흑룡강신문=하얼빈) "지금까지 취재하러 왔던 언론사가 50여개 되는 데요…" 권덕원(權德源)은 문서철에 보관한 신문 지상의 기사를 일행에...
  • 2016-06-25
  • 1. “외삼촌의 행적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문득 딩동 하고 벨이 짧게 울렸다. 짧은 메시지가 폰의 화면에 뜨고 있었다. 군인이었던 외삼촌 행적을 함께 알아봐 줄 수 없겠는가 하는 문의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주인은 북경의 박씨 성의 지인이었다. 취재차로 대륙의 조선인 노병(老兵)을 만나...
  • 2016-06-20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결론부터 쓴다면 양산(梁山)에는 무덤 귀신만 있었다. 양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양산에 도착하면서 눈앞에 언뜻 떠오른 것은 웬 풍만한 여인이었다. 택시기사가 말하는 산의 이름은 그대로 여인을 연상...
  • 2016-06-17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땅의 이름은 무심코 생긴 게 아니다. 설화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침반처럼 위치를 나타내며 또 거울처럼 모양을 흉내 낸다.한양(漢陽)은 "놈을 기르다"는 뜻의 한양(漢養)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실은 한강(漢江)의 북쪽에...
  • 2016-06-03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옛말에 "잉어가 용문을 뛰어넘으면 용이 된다"고 했다. 그럼 인간이 용문을 건너면 뭐가 될까?…"그거야 두발로 건너보면 금방 알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그래서 옛날부터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을지 모...
  • 2016-05-19
‹처음  이전 4 5 6 7 8 9 10 11 12 13 1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