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투의 백년사 희망찬 새 출발]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선진집단의 영원한 정신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연구제작에 뛰여난 기여를 한 23명의 과학기술전문가
중국과학원 력학연구소 청사 3층에는 2개의 사무실이 보류되여있다. 하나는 력학연구소 초임 소장인 전학삼의 사무실이고 다른 하나는 초임 부소장인 곽영회의 사무실이다. 전학삼과 곽영회는 모두 력사에 길이 남을 영웅집단인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선진집단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나의 사업은 중국에 있고 나의 성과는 중국에 있으며 나의 종착역도 중국에 있다.” 1955년 전학삼은 여러가지 장애와 어려움을 물리치고 조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그가 사랑하는 이 땅에 바쳤다. 귀국 후 전학삼은 중국 최초의 로케트, 유도탄 연구기관인 국방부 제5연구원을 설립하고 초임 원장을 맡았으며 제트기와 로케트 기술을 창시하고 완수했으며 단거리 유도탄, 중단거리 유도탄과 중국의 첫 인공지구위성 연구제작 등에 참여했다.
“비록 어려운 여건이였지만 모두가 아주 흥분되였다.” 중국공정원 원사이며 신주비행선 총설계사인 척발인은 당시 전학삼의 수업을 회억하면서 여전히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당시 몇기 양성반의 학원중 수많은 사람들이 후날 중국우주비행의 선두주자로 되여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및 중국 우주비행사업의 발전을 추동했다.
극비 실험자료가 든 서류가방을 품에 넣어 보호했다.
먼저 귀국한 전학삼은 동문 후배인 곽영회에게 여러차례나 편지를 써 빨리 돌아오라고 독촉했다. 곽영회는 귀국하자마자 바로 우리 나라의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건설에 투신했다. 1968년 12월 5일, 곽영회는 제1차 열핵탄두 시험 준비사업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가던중 비행기 착륙사고로 불행하게 조난당했다. 사람들이 기체 잔해에서 곽영회를 찾았을 때 그는 경호원과 부둥켜안은 상태였는데 그들은 극비 실험자료가 든 서류가방을 품에 꼭 껴안고 가슴으로 보호했던 것이였다.
전학삼, 곽영회와 같은 선배 과학자들은 많고도 많다. 일부 과학자들은 외국의 우월한 과학 연구와 사업 조건을 포기하고 여러가지 장애를 극복하며 정의를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새 중국 건설 사업에 투신했다. 어떤 과학자들은 수십년 동안 이름을 숨기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과학연구 기술난제를 공략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고 어떤 과학자들은 심지어 과학연구를 위해 자신의 귀중한 생명마저 바쳤다. 과학자들은 피타는 노력으로 전세계가 괄목하는 과학기술 기적을 하나하나 창조해나갔다.
1964년 10월 16일, 사막의 깊숙한 곳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리면서 우리 나라는 최초의 원자탄 폭발에 성공했다.
1966년 10월 27일, 우리 나라는 핵탄두가 장착된 첫번째 지대지 유도탄 비행과 폭발에 성공했다.
1967년 6월 17일, 우리 나라는 첫번째 수소탄 공중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1970년 4월 24일, 우리 나라는 ‘장정 1호’ 운반로케트로 첫번째 인공위성 ‘동방홍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은 불후의 공적을 세웠다! 그것은 새 중국의 안전에 장벽을 구축했고 새 중국 과학기술 발전에 견고한 토대를 다졌다.
1999년 9월 18일, 당중앙과 국무원, 중앙군위는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연구제작에 뛰여난 기여를 한 23명 과학기술전문가들을 표창하고 우민, 왕대형, 왕희계, 주광아, 손가동, 임신민, 오자량, 진방윤, 진능관, 양가지, 주광소, 전학삼, 도수악, 황위록, 정개갑, 팽환무에게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공훈메달’을 수여했으며 왕감창, 등가선, 조구장, 요동빈, 전기, 전삼강, 곽영회에게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공훈메달’을 추서했다.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공훈메달’ 수상자들은 시종일관 초심을 잊지 않고 충성을 다하며 실사구시적이고 실무적이며 자신의 피와 청춘을 조국의 로케트, 유도탄과 우주비행 사업에 바쳤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력사에 길이 빛날 탁월한 공훈을 세웠다. 그들의 이름과 공훈은 력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위대한 사업은 위대한 정신을 주조한다. 조국을 사랑하고 사심없이 기여하며 자력갱생하고 간고분투한 ‘원자탄, 유도탄과 인공위성’ 정신은 중화민족의 귀중한 정신적 재부로 되여 한세대 또 한세대의 과학연구사업자들이 과감히 새로운 고봉에 오르도록 격려하고 있다.
우량한 전통을 간직한 ‘남경로의 훌륭한 8련’
상해시 보산구에 위치한 ‘남경로의 훌륭한 8련’ 사적전람관에는 참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상해민항직업기술학원 퇴직 간부 진룡화는 ‘남경로의 훌륭한 8련’은 우리 상해의 명함장이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1947년 8월 6일, ‘남경로의 훌륭한 8련’ 전신인 화동군구 특무퇀 4대대 치중련대가 산동성 래양현 소원촌에서 편성되였다. 해방전쟁 기간 련대는 선후하여 회해, 도강, 상해 등 전역과 전투에 참가했다. 상해가 해방된 후 련대는 부대를 따라 상해에 주둔했으며 내위 1퇀 2영 8련으로 개편되여 남경로 등 지역의 순라임무를 책임졌다.
전람관 해설원 공명휘는 “편성된지 2년도 되지 않는 8련은 남경로에서 훌륭한 성적을 따냈다. 전사들의 몸은 번화한 도시에 있어도 물욕과 나쁜 습관에 전혀 물들지 않았으며 언제나 우량한 전통을 간직했다.”고 소개했다. 20세기 50, 60년대 8련은 번화한 도시에 주둔하면서도 시종일관 간고분투하는 우량한 기풍과 우량한 전통을 발양했다. 당시 전사들이 손수 제작한 목공함, 신발 수선함, 리발함 등은 오늘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1961년, 심서몽, 막안, 려흥신 등 8련 전사들을 원형으로 한 연극 <네온등 밑의 초병>이 창작되였다. 모택동, 주은래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선후하여 연극을 관람했으며 모택동 동지는 전 군에 8련을 따라배울 것을 호소했다. 1963년, 8련은 국방부로부터 ‘남경로의 훌륭한 8련’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듬해 연극을 개편한 영화 《네온등 밑의 초병》이 전국에서 방영되였다.
사명과 임무의 변화에 따라 8련은 남경로에서 근무를 더는 감당하지 않게 되였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남경로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매달 10일, 20일은 8련의 ‘인민을 위한 봉사하는 날' 이다. 1982년부터 이날이 되면 8련 장병들은 모두 남경로에 와 주민들에게 무료로 리발, 신수리, 칼 갈아주기 등 봉사를 제공했다. 1983년부터 8련은 남경동로가두 운중주민위원회 30여명 독거로인과 자매관계를 맺고 정기적으로 문전봉사를 제공하고 있다.
2017년, ‘남경로의 훌륭한 8련’은 신형의 특종 작전력량으로 전환했고 1년도 되지 않아 ‘특전 첨병’으로 탈바꿈했다. 전환 후 8련은 중국국제수입박람회 경호 등 임무를 출충하게 완수했다. 지금까지 8련이 거둔 영예는 무려 100여가지나 된다. 2018년, 8련은 집단군으로부터 ‘기층건설 기준병 련대’로 평의되였고 2019년에는 영광스럽게 ‘가장 아름다운 분투자’칭호를 획득했으며 2020년에는 륙군 선진단위로 평의되였다.
현임 8련 정치지도원 왕홍서는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8련 정신의 핵심이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사랑의 마음을 기여하며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전통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우리는 특전기술을 련마하고 전투기능을 닦아 승리로 거두는 것으로 인민을 위해 장애를 제거하고 발전을 보장할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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