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과학자 리상영 장정4호 을형로케트 련속 14차 발사 성공시켜
2006년 4월 27일 새벽 6시 48분, 원격탐지 1호위성이 태원위성발사기지에서 서서히 하늘로 솟아올랐다. 우리 나라에서 제1호로 발사한 원격탐지위성(遥感卫星)은 환경탐사, 재해예방, 자원탐사 등 데이터를 수집하고 전송하는 역할을 담당한 인공위성이다. 이 위성을 탑재한 장정4호 을형로케트는 1999년에 처녀발사된후 이번까지 “9발 9중”으로 100%의 성공발사기록을 세웠다.
장정(长征)계렬 로케트는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력사적장거로 되는 대장정에서 이름을 따온 운반로케트로서 우주공간으로 향한 중국인민의 끈질긴 념원을 보여주고있다.
상해항공우주국에서 연구제조한 장정4호 을형로케트는 길이 45.8메터, 리륙시 무게 250톤, 추진력 300톤급, 운반탑재능력 1800킬로그람으로서 3단 점화방식으로 주로 태양 동기궤도 위성을 발사하고있다. 1999년 첫 발사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백발백중을 기록한 장정4호 을형은 “금메달 로케트”란 별칭을 가지고있다.
금메달 로케트의 100% 발사성공을 이뤄낸 주인공은 조선족출신의 로케트발사전문가인 리상영이다. 리상영의 주최로 설계된 15기의 운반로케트는 전부 성공적으로 발사됐고 이가운데 장정4호 을형로케트는 련속 14차 안전하게 발사과업을 완수함으로써 “백발백중의 명장”이란 명성을 날리게 되였다.
그럼 100% 발사성공의 신화를 이뤄낸 리상영은 과연 누구인가?
흑룡강성 오상출신인 리상영은 1941년 9월 조선족농민의 가정에서 6남매중 둘째로 출생하였다. 지금은 록색입쌀로 명성높은 오상은 일찍 1865년 조선족 선인들이 진펄을 갈아번지고 논을 풀어 벼농사를 시작한 고장이다. 1936년, 일제가 조선으로부터 대량의 이주민을 중국 동북에 옮기면서 오상현의 조선족가구수는 780여호, 조선족인구수는 3800여명으로 급증하였다. 이가운데는 1940년대초 경상북도 청송군으로부터 오상현 산하툰으로 이주한 리상영의 일가족도 들어있었다. 광복이후 오상에서 조선족 소학교와 초중을 다닌 리상영은 고향에 조선족고중이 없는 연고로 한족학교인 오상1중에 입학하여 한어를 익혔다.
이 시절 리상영의 운명에 꿈을 심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나타났다. 1957년 10월 4일, 쏘련에서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우주공간에 발사한것이다. 당시 물리과 대표인 리상영은 물리선생님이 인공위성발사와 관련하여 조직한 전문강좌를 청강하면서 자신도 앞으로 로케트전문가가 되여 위성을 쏘아올릴 거창한 꿈을 품게 되였다. 1959년, 오상1중 제1기생으로 졸업한 리상영은 높은 성적으로 북경공업학원(현재 北京理工大学)에 입학하여 우주개발의 신비한 세계에 입성하였다.
새 중국의 첫번째 국방공업대학인 북경공업학원은 당시 우리 나라 국방공업분야의 고급엘리트를 육성하는 5년제 본과대학으로서 국방과학기술위원회와 중공업부의 이중령도를 받고있었다. 1953년말부터 1960년까지 북경공업학원에서는 쏘련전문가들을 초청하여 화포, 땅크, 레이다, 로케트 미사일 등 병기(兵器)학과를 륙속 창설하였다.
입학초기 기계학과에 배치된 리상영은 2학년부터 로케트학과(火箭专业)에 전입하여 고중시절 자신이 지향했던 우주의 꿈에 나래를 돋칠수 있었다. 1964년 5년간의 학업을 마친 리상영은 “홍색국방 엔지니어”의 신분으로 중국의 첫번째 미사일 로케트 연구기관인 국방부 제5연구원(1956년 창설, 1964년 제7기계공업부로 개칭, 1982년 항공우주공업부로 개칭) 제2분원에 배치되였다. 1965년전까지만 해도 국방부 제5연구원은 부대편제로서 대외호칭 번호는 중국인민해방군 총자 742부대였다. 제5연구원 초대 원장은 중국 우주과학의 정초자인 전학삼이였다.
1965년 5월, 제7기계공업부 제2분원의 5개 연구소가 상해시 기계전기 제2공업국(현 상해항공우주국)과 합병하면서 리상영은 북경으로부터 상해로 발령되여 지면대지면 미사일 연구에 전력하였다.
1970년은 중국 우주항공력사의 신기원을 열어놓은 해이다. 이해 4월 24일 장정1호 운반로케트가 우리 나라의 첫번째 인공위성인 동방홍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한것이다. 1970년은 리상영의 생애에서도 획기적인 기록을 남긴 해로 된다. 29세밖에 안된 리상영이 이해 “폭풍1호”로케트 연구팀의 총체성능 설계사의 중임을 떠맡게 된것이다. “폭풍1호”는 상해항공우주국에서 장정2호 운반로케트의 설계기술을 참조하여 시험제조한 로케트였다. 전 두차례의 위성발사에서 실패하는 고배를 마셨지만 리상영과 그의 연구팀은 끊임없는 수정을 거쳐 1975년 7월 26일, 주천위성발사기지에서 “폭풍1호” 로케트로 1톤이 넘는 과학위성인 “장공1호”를 처음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맨 마지막으로 제11회 발사때인 1981년 9월 20일에는 폭풍1호 로케트로 3기의 위성을 동시에 발사해 세계적으로 쏘련과 미국 다음으로 “3위성 동시발사” 기술을 보유하게 됐다.
폭풍1호 로케트의 10년 개발과정에 리상영의 재능은 충분히 과시되였다. 이로부터 리상영은 선후로 장정4호 갑형로케트의 부총설계사, 장정2호 정(丁)형 로케트의 부총설계사, “신주비행선”의 부총설계사를 력임하다가 1996년부터 10여년간 장정4호 을형운반로케트의 총지휘와 총설계사 직무를 동시에 짊어지게 되였다.
리상영이 총지휘와 총설계사를 맡은후 처음 발사하게 된 장정4호 을형로케트는 리상영 개인에게 각별한 의의를 가지고있었을뿐만아니라 당시의 특수한 시대적배경으로 하여 심원한 정치적의의를 시사하고있다.
발사일을 이틀 앞둔 1999년 5월 8일, 유고슬라비아주재 중국대사관이 미국을 위시한 나토 공군의 의도적인 폭격을 받아 3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당했다. 국제법을 무시한 공공연한 강도행위는 중화민족의 의분을 불러일으켰다. 사건발생 이틀 뒤인 5월 10일 오전, 태원에서 풍운1호 기상위성과 실천5호 과학위성을 동시에 발사하는 과업을 맡은 리상영의 어깨에 짊어진 중임은 그 어느때보다도 무거웠다.“실패는 없다. 성공만을 허용한다”는 각오아래 리상영은 한걸음도 물러설수 없는 벼랑가에서 침착하게 발사과정을 지휘해나갔다.
기상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된후 오전 11시 30분경, 우룸치기상위성접수소와 북경기상위성접수소에서는 동시에 풍운1호가 보내온 기상데이터를 받았다. 위성발사의 성공이 확인되자 발사팀 전원은 서로 얼싸안고 격동의 환호성을 올렸다.
장정4호 을형로케트의 처녀발사 성공은 중국우주항공기술의 저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을뿐만아니라 중화민족의 기개를 떨치는 장거로도 기록되였다.
2002년 10월 27일 오전, 태원 위성발사기지에서 장정4호 을형로케트의 위성발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번에 발사하는 자원2호는 리상영이 로케트 발사의 총지휘를 맡은 다섯번째 위성이였다. 당 16차 전국대표대회의 개막을 앞둔 특수한 시기에 발사되는 이 프로젝트는 각별한 정치적의의를 가지고있었다. 더구나 당시는 강택민 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하고 메히꼬APEC 회의에 출석하게 되는 민감한 시기라 의례적인 위성발사가 중국의 국제적인 위상에 관련되는 중요한 프로젝트로 된것이였다. 발사를 앞둔 동원대회에서 리상영은 “나는 성공만을 갈망한다”고 짤막한 발언을 하였다. 그가 받고있는 압력이 어느 정도임을 실감하는 구절이였다.
위성의 성공적인 발사가 확인되자 리상영은 지하통제실에서 대청으로 올라왔다. 환호성이 넘치는 지휘대청에는 전문가, 학자들은 물론 총장비부와 총참모부의 장군들도 30여명이 나와있었다. 우리 나라의 로케트와 위성발사는 총장비부에서 총책을 지고있기에 당시 총장비부 부장을 담임하고있던 조강천상장은 언제나 발사현장에 직접 나와 독려하였다. 그를 기다리고있던 조강천상장은 으스러지게 리상영을 포옹하였다.
장정4호 을형로케트의 발사성공은 리상영의 엄격한 팀관리와 갈라놓을수 없다. 발사팀의 성원들은 리상영의 세심함에 탄복할뿐만아니라 문제를 발견하면 추호의 사정도 보지 않는 그의 성격에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이에 리상영은 자신이 엄격하지 않으면 남들도 방심하게 되여 로케트를 안전하게 발사할수가 없다고 한다.
풍운1호 D위성을 발사할 때의 일이다. 10만여개 부속품이 달린 장정4호 을형로케트를 검사하던 리상영은 부분적인 케블 플러그(电缆插头)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즉각 전부 다시 용접할것을 명령하고 플러그마다 100% 확대경으로 검사할것을 요구하였다.
모든 세부적인 사항에서 리상영은 엄격한 요구를 제기하면서 가장 저급적인 실착이 생겨도 추호의 사정도 두지 않는다. 로케트 발사에 성공하면 모두가 영웅이 되지만 티끌만치의 문제가 생겨 사고가 생기면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것을 너무나 잘 알기때문이다.
장정4호 을형로케트는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의 금상을 받을 정도로 완성된 기술력을 가지고있었지만 리상영은 총설계사와 총지휘의 립장에서 항상 살얼음을 밟듯이 신중하게 발사과정을 지휘해나갔다.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 압력속에서 긴장된 생활을 해온 리상영은 건강에 적신호가 여러번 나타났다. 어느 한번 위성발사 30분을 앞두고 지휘부의 경보기가 울려왔다. 로케트에 이상이 생긴것이였다. 한달음에 발사탑밑에 이른 리상영은 철사다리를 타고 10층 높이의 로케트 발사체에 이르러 고장을 신속히 해제하였다.
지면에 내려온 리상영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져 몸에 지니고 있던 사향보심환을 삼키고 지휘부에서 버텨냈다. 엄중한 심근허혈(心肌缺血)증상을 가지고있는 상황이지만 리상영은 이날 24시간 동안 꼬박 눈을 붙이지 않고 현장을 지켰다.
과학탐구자의 길은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인생이 포기된 외롭고 힘든 길이다. 국가의 우주개발에 혼신을 바쳐온 리상영은 자신의 튼튼한 뒤심이 되여온 가정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있었다.
1970년 1월, 리상영은 천진공정기계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동갑내기 조선족처녀 손광옥(길림공업대학 졸업)과 결혼하였다. 결혼후 상해와 천진에 별거하다보니 가사일과 자녀교양은 부인 손광옥씨가 전담할수밖에 없었다. 1971년과 1973년 아들과 딸이 태여나 두 아이를 키우면서 출근하다보니 가정주부의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휴가차 천진에 가 어린 자녀들을 잠간이나마 돌보던 리상영은 천진으로 전근하여 한가정 생활을 하려고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다. 남편의 동요심을 알아차린 손광옥은 마음놓고 사업을 잘하라고 부탁하면서 남편이 걱정할가 천진에서 어려운 일에 봉착해도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1976년 1월, 손광옥은 두 자녀를 데리고 상해로 이사갔다. 네 식솔이 한지붕아래 모였지만 리상영은 나름대로 로케트발사연구에 전념하다보니 1년중 3분의 2의 시간을 외지에서 보냈고 상해에 있다 해도 매일 저녁 늦게 퇴근하다보니 아이들이 아버지얼굴 한번 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안해 손광옥녀사의 든든하고 착실한 내조가 있었기에 리상영은 과학연구에 전념할수 있었고 자녀들도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독립할수 있게 되였다. 미국 하버드대 MBA를 졸업한 리상영의 아들은 현재 상해 모 외자기업에서 근무하고있고 딸은 상해 제2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의사로 역시 상해에 거주하고있다.
70 고희를 앞둔 리상영은 현재 상해항공우주국 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 연구원직을 담임하면서 중국의 우주개발사업을 위해 계속 여력을 쏟아붓고있다.
대학교정을 나와서 평생을 로케트발사연구에 몰두해온 리상영에게 당과 정부는 전국우수과학기술사업자(2001년), 전국5.1로력로동상장(2004년), 전국로력모범(2005년), “하량하리 기금상”(2006년) 등 많은 영예칭호를 수여하였다.
중국 우주인이 전설속의 상아처럼 달나라에 날아가는 꿈은 멀지 않은 현실로 눈앞에 다가오고있다. 2025년경, 중국유인우주선이 달착륙을 이뤄내는 그 순간 우리는 중국 운반로케트의 연구제조력사에 기록된 조선족과학자 리상영의 이름을 다시한번 되새겨보아야 할것이다.
김영훈/중앙인민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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