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중국동포(조선족)인 이만용(40) 포스코경영연구원(POSRI) 수석연구원은 지난 6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유년의 중한 양국관계에 관한 질문에 '폭넓게', '긍정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등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큰 흐름을 읽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1994년 민간연구소로 출범한 POSRI는 철강산업 연구 분야에서 세계 유수의 싱크탱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철강은 물론 미래사회를 선도할 소재, 에너지 등 녹색산업 분야에서 창조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국내외 경제와 경영 이슈에 대한 해결책을 적기에 제공한다. 100여 명의 연구원 가운데 조선족은 이 박사를 포함해 2명이다.
그는 양국 관계를 낙관하는 이유로 우선 중국이 한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여긴다는 점을 내세웠다. 중국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과 관계를 신속하게 발전해 왔고, 여러 분야에서 교류협력을 추진해 왔다는 설명이다.
이 연구원은 "지정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중한 두 나라는 문화·경제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런 틀에서 교류·협력해 온 중한관계는 "서로 신뢰를 더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양국관계에서 언론의 역할이 상당히 크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가령, '한한령'(限韓令)이라는 말은 중국 언론이 만들었고 이를 한국의 한 경제지가 '금한령'(禁韓令)으로 번역했는데. 두 단어의 뜻은 '제한'과 '금지'로 완전히 달라 이를 접하는 국민의 감정도 증폭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단어 하나라도 신중하게 번역해 국민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언론에 당부했다.
이 연구원은 한중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말로 매듭지으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털어놨다.
그의 조부는 경남 밀양이 고향이고, 어머니는 강원도 출신이다. 헤이룽장(黑龍江) 성 발리(勃利)에서 나고 자란 조선족 3세로, 발리조선족고교를 졸업하고 지린(吉林) 성 옌지(延吉)시에 있는 연변과기대에서 무역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1998년 교환학생으로 연세대로 왔다가 눌러앉아 경영대 대학원에서 석사(2000∼2002년), 박사(2002∼2006년) 학위를 취득했고, 곧바로 산업은행 연구소에 취직했다. 1년간 중국 금융 관련 연구를 하다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이직했으며, 2010년 POSRI에 수석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내부자 거래에 대한 실증 연구-유가증권 시장 상장기업을 대상으로'라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은행의 '금융안정포럼' 토론자로 활동했다. 매 분기 금융안정 보고서를 내고 이에 대한 평가를 하는 업무였다. 2009년에는 중국 동북 삼성 지역을 방문해 '북한 화폐개혁'과 관련, 북한의 가격체계·주민 생활 여건, 시장 등을 조사해 분석했다.
10년째 연구소에서만 근무하는 그는 주요 일간지와 경제지, 3대 방송사에 한중관계의 단골 인터뷰이로 출연하는 베테랑이다.
1년에 4∼5차례 포스코가 진출해 있는 중국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모기업이 당면한 전략 등을 수립하는 것은 물론 현업과 관계된 과제를 수행한 뒤 결과를 발표한다.
"대기업 평균 수준의 연봉을 받고, 4년 전 조선족 여성과 결혼해 16개월 된 딸을 키우며 평범한 한국 생활을 하고 있는데, 제가 성공한 축에 끼일 수 있는 건가요? '성공시대'에 초대된 분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앞으로 모실 분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결혼 전에는 한국에 나와 있는 연변과기대 친구들과 모임도 하고, 후배들과 '재한 조선족의 미래'를 논의하기도 했는데, 결혼하면서 가정에 충실하다 보니 '공처가'가 됐네요."
아직 중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영주권자 신분으로 사는 그는 요즘 고민이 많다. 한국 체류 및 출입국 제도가 상당히 개선돼 영주권만으로도 큰 불편함이 없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양육과 교육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중에 우리 아이가 커서 학교에 갔을 때 '다문화'라는 이유로 소외당하게 되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아요.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국적취득을 하는 것도 호들갑인 것 같고요. 할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에서 계속 살 건데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생각입니다. 아울러 이를 계기로 재한조선족과 다문화에도 관심을 가져보려 합니다."
그는 한국이 IMF로 위기를 맞았을 때 유학을 와 어렵게 공부한 탓에 조선족 후배들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지만 앞장서서 단체를 만들고 조직적으로 그들의 권익 신장과 삶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자칫하면 한국 국민과 이질감 내지는 이원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인터뷰를 하면서 후배들에게 "한국에는 다문화 내지 외국인에 대한 법과 제도가 있기에 그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운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가치를 실현해 나가달라"는 당부를 건넨 것은 지금도 그 생각에 크게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후배를 양성하는 일에는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저는 연구소에서만 일했지만, 사실은 강단에 서는 것이 꿈입니다. 연세대 학위 과정 밟을 때 경험을 했는데 희열을 느꼈을 정도니까요. 그때는 책에서 배운 내용만 전달했지만, 이제는 사회 경험까지 더해 알려줄 수 있으니 생각만 해도 떨립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인재를 키우는 일에 매진하고 싶고요. 제가 가진 것을 나눠주고 싶어요. 조선족 후배들이면 더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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