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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유명한《주정뱅이》연극인생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월24일 23시24분    조회:9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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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대들로부터는 《방기도》, 50대들로부터는 《주정뱅이》, 로인들로부터는 《지현장》으로 불리우는 연변연극단의 인기배우 김동현씨가 2009년 음력설야회에서 소품 《부조사계절》에 출연하며 시청자들과 재회하게 된다. 야회촬영장에서 김동현씨를 만난 필자는 2006년 내부퇴직후 모처럼 새로운 작품에 출연하게 되는 그를 붙잡고 취재를 접수할것을 부탁했다.

진정 연극에 대해 눈을 뜨기까지
1954년생인 김동현씨는 연변연극단에서 단장, 연출사업을 해온 아버지 김수룡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려서부터 문예방면에 소질이 있었고 지식청년으로 룡정시 장안진 하동촌(지금은 도문시에 귀속)에 내려갔을 때는 대대과외문예선전대에서 무용수로 활약하였었다.

1977년 연변연극단의 배우모집시험에 합격되여 연극인생을 시작한 김동현씨는 처음으로 연극 《장백의 아들》에서 호랑이역(B)을 맡고 표현상을 받았다.     
      
이것을 발단으로 그는 지금까지 연극 《눈속에 핀 꽃》, 《요란한 사랑》, 《털없는 개》, 《사랑의 품》등 창작작품과 아동극 《뢰녕》등 번역작품 그리고 《사위감점고》, 《세배》, 《갑속에 든 사람》, 《국제전화》, 《시대련애》 등 많은 소품에 출연하여 어린이역으로부터 할아버지역 지어 녀성역까지의 무수한 인물형상을 성공적으로 창조하였으며 동북3성소품콩클 1등상을 비롯한 묵직한 상도 적지 않게 따내게 되였다.

이 모든 성과들을 두고 김동현씨는 《제가 연극에 대해 진정 눈을 뜰수 있게 된데는 허동활선생님의 도움이 컸지요.》라고 말한다.

처녀작에 출연하여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표현상을 따낸 김동현씨는 맡겨진 배역의 대사만 제대로 암송해서 실수없이 공연을 마무리하면 만사대길인걸로 착각하고 새로운 작품에 출연할 때마다 대사를 빨리 외우는데만 신경을 도사렸다. 그런데 점점 어려운 배역이 차례지면서 시련에 부딪치게 될줄이야?!

1980년대초 연변연극단에서 조선고전명작 《성황당》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한후에 발생한 일이였다. 련습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여 돌쇠의 역을 맡은 김동현씨는 돌쇠가 비자루로 마당을 쓸면서 처량하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의 연기가 잘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몇번이나 되풀이해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를 두고 연출인 원주삼선생이 화를 냈고 그자신은 참다 못해 연극을 더는 못해먹겠다며 문을 차고 련습장을 뛰쳐나와버렸다. 

연극단 력사에서의 《기록》을 창조하고 비판까지 받은 그가 의기소침해있는데 허동활선생이 다가와 저녁에 집에 왔다가라고 한마디 했다. 그날 김동현씨가 댁에까지 찾아가니 허동활선생은 극본은 내놓으면서 도대체 어느 장면이 그렇게 안되는가고 넌지시 물었다. 돌쇠가 비자루로 마당을 쓸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잘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허동활선생은 연극의 사회배경, 돌쇠의 처지와 성격 등을 깊이있게 분석해주면서 그 장면에서 돌쇠가 꼭 그런 표현을 해야 하는 내심세계를 제시해주었다. 그리고 나서 허동활선생은 연극배우는 연기에 앞서 인물을 파악해야 한다고, 인물속에서 살고 인물과 고락을 함께 할수 있을 때에야 연기를 제대로 펼칠수 있다고 차근차근 일깨워주었다.

허동활선생의 가르침에서 계발을 받은 김동현씨는 이튿날 련습장에서 전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연출과 기타 배우들을 놀래웠다. 오죽하면 첫번에 무릎을 탁 치면서 “그래, 바로 그렇게 하라는거야!”라고 환성을 올리던 원주삼연출이 휴식시간에 슬그머니 김동현씨를 찾아와 어떻게 하루사이에 그렇게 뚜렷한 진보를 가져올수 있었는가고 미주알고주알 캐여묻기까지 했을가?

그번의 실천을 거쳐 진정 연극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김동현씨는 그후부터는 새로운 배역을 맡으면 자기가 맡은 대사를 외우는데 급급해하는것이 아니라 극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전반 작품의 내용을 리해하고 해당 배역의 인물성격을 파악하는데 정력을 기울였다. 그 보람으로 김동현씨는 그 어떤 배역이 차례져도 연기를 리상적으로 해낼수 있는 기량을 련마해내고 비교적 성숙된 연극배우로 성장하게 되였다.

연기의 전성기
연기력이 상승선을 그으면서부터 김동현씨는 크고 작은 작품들에서 주역을 맡으며 장끼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장막연극 《삼동이의 울음과 웃음》에서 남주인공의 칠복이역을 맡은 김동현씨는 녀주인공역을 맡은 방미선양과 손을 잡고 능란한 연기를 펼치여 긍정을 받았다. 그후부터 그는 《청춘소야곡》 등 창작작품과 《뢰녕》 등 번역작품들에서 주역을 맡았고 국가문화부의 신극목상을 획득한 연극 《털없는 개》에서는 중요한 배역의 하나인 아들 덕수역을 맡아 동북3성 연극콩클 1등상과 길림성 연기1등상을 수상하였으며 수도 북경에서 공연하는 기간에는 호텔에까지 찾아온 중앙군위 후근부장 조남기상장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김동현씨가 연극배우로서의 최고인기를 누린 작품은 그래도 길림성1등상을 따낸 연극 《사랑의 품》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 작품에서 남주역 용우의 배역을 맡은 김동현씨는 팔을 하나 잃은 장애자의 연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몸은 비록 장애이지만 마음만은 뜨거워 구두를 닦고 넝마를 주으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형편에서도 불쌍한 백설이를 친딸처럼 키워주는 용우의 형상이 잘 부각되여야만 전반 연극이 성공을 안아올수 있었다. 따라서 배역에 대한 요구가 높아서 연기를 해나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특히 외팔로 구두를 닦는 장면은 어떻게 해보아도 신통치 않아 연출은 걸레 한끝을 입에 물면 어떻겠는가는 제의를 내놓았다. 그렇게 하면 용우의 형상이 너무 비참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 김동현씨는 저녁에 집에 가서 사색을 거듭 하던중 내복을 꺼내 허리를 뭉청 자른후 그걸 한쪽 발에 걸고 구두닦는 동작을 해보았다. 별로 힘들지도 않고 곁에서 보기도 너무 민망스럽지 않아 안성맞춤일듯싶었다. 이튿날 련습장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동작은 그후 공연때마다 인정을 받았고 수도 북경의 무대에서 공연할 때에는 박수갈채까지 받았다. 제일 비참한 장면에 박수갈채를 보낸다는것은 배우의 내심행위통일과 외부적인 행위통일의 일치로 창조하는 연기절정에 대한 최고의 대우였다.   1990년대에 와서  소품의 전성기가 도래하게 되자 김동현씨는 《사위감점고》, 《노랑각시》, 《갑속에 든 사람》, 《국제전화》, 《경계선》, 《시대련애》 등 많은 소품들에 출연하면서 출중한 연기력을 과시하였다. 

김동현씨가 소품에서 창조한 인물형상가운데서 환영을 많이 받는것으로는 《세배》에서의 외팔쟁이 《지현장》이다. 설이 당금이라고 현장사무실에 찾아왔다가 현장이 잠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현장의 의자에 앉아 “로동자들의 로임을 10배로 올려주겠다”고 연설을 발표하는 《지현장》, 정리실업로동자들의 맘속말을 하는 《지현장》의 형상이 너무 인상깊어 년세가 많은 로인네들은 지금도 김동현씨를 《지현장》이라고 다정하게 불러오고있다.

연변연극단에서 처음으로 음악극 《사랑의 샘》을 공연할 때 김동현씨는 주인공 아버지의 배역을 맡고 출중한 노래실력을 자랑하였으며 선후로 3차나 한국에 다녀오면서 연극제에도 참가하고 무대에 올라 소품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밖에도 김동현씨는 《하얀 꽃》을 비롯한 TV극에도 출연하고 연변TV의 《음력설야회》, 《토요무대》, 《아리랑극장》 등 문예프로에 수없이 참가하여 소품에 출연하기도 하고 리동훈, 김영식 등과 더불어 녀성들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기도 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물했다. 

《주정뱅이전문호》
인기소품 《사위감점고》에서의 방기도로부터 TV련속극 《사랑의 품》에서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연극 《요란한 사랑》으로부터 연변TV 토요무대 《모아산의 여름》에 이르기까지 전문 주정뱅이역만 맡아 소문을 놓고 무대에서의 주정뱅이형상으로 전주전업단체소품콩클에서 최수우연기상을 수상한 김동현씨를 《주정뱅이전문호》로 불러도 무방할것이다.

김동현씨가 창조하는 주정뱅이형상을 통해 미적향수를 만끽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 그 본인이 이런 형상들을 창조하느라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렸는지에 대해서는 감감 모르고있을것이다.

1988년, 연극 《요란한 사랑》에서 처음으로 주정뱅이역을 맡은 김동현씨는 식당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도 술에 취한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관찰하였고 일부러 알콜중독환자들과 접촉하면서 생활체험을 하였는데 특히 평형을 잡지 못하는 주정뱅이걸음걸이를 모방하는데 큰 공력을 들이였다. 이러는 가운데서 주정뱅이들의 특점을 모색해낸 그는 무대에서  실감있게 연기를 펼치여 제3차 연변예술제 표현1등상을 따냈으며 1990년에는 음력설야회에서 선을 보인 소품 《사위감점고》에서 주정뱅이 방기도의 형상을 창조한 뒤를 이어 소품 《주정뱅이사위》에서 또 주정뱅이역을 맡고 주급 1등상을 획득였다. 따라서 김동현씨는 무대에서의 주정뱅이형상을 운운할 때면 제1호로 손꼽힐 정도로 대중들에게 익숙해졌다.

김동현씨가 창조한 주정뱅이형상가운데서 비교적 인상이 깊은것으로는 또 TV련속극 《사랑의 품》에서의 철학이 있다.

연변TV문화예술중심에서 연극 《사랑의 품》을 TV련속극으로 개편할 때였다. 연극에서 용우라는 긍정인물의 배역을 맡고 인기몰이를 한 김동현씨는 계속 그 배역을 맡을 준비를 하고 제작조에 불리워갔다. 그런데 연출이 김동현씨를 보자마자 주정뱅이역의 적임자라고 하면서 기어이 백설의 친아버지 철학의 역을 맡아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댈줄이야?!극본까지 밀어맡기며 《억지》를 부리는 연출의 성화에 김동현은 이튿날에 다시 보자고 대답하는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철학이가 백설이를 잃어버리고 혼자 세집에서 강술을 마시는 장면을 시험적으로 연기하자 대번에 《OK!》라고 환성을 지르는 연출, 이렇게 김동현은 한가지 내용으로 된 연극과 TV련속극에서 완전히 부동한 두가지 형상으로 대중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연극배우의 희로애락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직업에 전문 종사하는 연극배우들은 근심걱정을 모르고 언제나 유쾌하게 살아가는줄로 알고있다. 그러나 생활속에 심입하여 보고 듣노라면 그들도 나름대로 희로애락이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관객을 황제로 모시는것을 천직으로 간주해야 하는 그들은 일단 공연시간만 결정되면 앓은 권리도 없고 지어 부모님이 세상을 떴다고 해도 낮에 장례를 치르고나서 저녁에는 어김없이 공연에 참가해서 웃고 떠들어야 한다. 

후배인 최성훈씨의 소개에 따르면 김동현씨도 이러루한 체험이 많다고 한다.
몇년전 북경시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이 마련하는 음력설야회에서 소품 《경계선》을 출연해달라는 초청을 받은 김동현씨는 리옥희,    와 함께 련속 10여일간 밤을 패며 련습에 땀동이를 쏟았다. 그런데 떠나기 전날에 어머니가 중풍에 걸릴줄이야?! 그렇다고 이미전에 약속한 출연을 취소할수도 없게 된 그는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놓고 규정된 시간에 출발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극인들이 진정 고생을 하며 대가를 치러야 하는것은 순회공연이다. 특히 장막연극을 가지고 순회공연을 떠날 때면 무대장치만도 해방표트럭으로 서나차싹 되는데 경제사정때문에 전문일군이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에서 령도든 배우든   자각적으로 육체로동에 종사해야 한다.

1980년대에 연극 《심청전》과 《누구를 닮았나요?》를 가지고 밀산으로 공연을 떠났을 때였다. 이튿날 오후에 공연을 해야 하는지라 먼저 도착한 배우들은 밤잠도 자지 못하고 무대설비를 실을 자동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1시가 되여 설비가 도착하자 초대소에서 대기하고있던 배우들은 극장으로 달려가 무대를 장치하기 시작했는데 뜻밖의 사고가 발생하면서 천정조의 김동현씨와 최성훈씨가 15메터 높이의 고공에서 작업을 하다 떨어졌다. 이리하여 최성훈씨는 팔을 크게 상하고 《누구를 닮았나요?》에서 주역을 맡은 김동현씨는 운신을 제대로 할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중해서 배우출신인 조명일군이 하루 오전을 돌격적으로 련습을 하여 무대에 올랐다.

공연지점에 도착하기 바쁘게 로동복을 입고 먼지속에서 땀을 흘리는 그들은 때로 품팔이군으로 오해받고 기시를 당하기도 한다. 언젠가 《심청전》공연차로 길림시에 갔을 때였다. 허술한 로동복차림에 위생모자를 쓰고 뛰여다니는 김동현씨와 동료들을 보고 “주제에 위생모자를 썼네.”라고 비웃던 길림극단의 배우들은 저녁공연시 낮에 자기들한테 놀림을 당하던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뒤늦게야 실수를 깨달은 그들은 공연이 끝나는 즉시로 무대에까지 찾아와 악수를 청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심산골에 가서 공연을 하게 되면 때로는 자동차나 뻐스가 마을까지 들어가지 못해 짐은 소수레에 싣고 배우들은 도보로 공연지점까지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봄가을도 아닌 엄동설한에 길을 떠나고보면 그 고생이 말이 아니다. 몇해전의 동지섣달 산간벽지에 위치한 룡정시 백금향 립신촌에 순회공연을 내려갔을 때였다. 뻐스를 타고 10리 밖의 산아래에 도착한 배우들은 생산대에서 보낸 소수레에 짐을 싣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어찌나 맵짠지 털모자도 없이 바람을 맞받으며 발을 옮겨놓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얼굴이 너무 시려 와이샤쯔로 얼굴을 가렸던 김동현씨는 그것마저 수건도 없이 오돌오돌 떨고있는 처녀배우한테 씌워주고 걸음을 다우쳤다. 목적지에 도착한 배우들은 너무도 추워서 막 오한이 날 지경이였지만 저녁에 온돌공연이 펼쳐지자 정신을 가다듬고 연기에 최선을 다했는데 공연을 관람하면서 웃음꽃을 피우는 관객들을 보니 모든 피로가 가뭇없이 사라지더라고 한다. 그리고 무대를 장치하느라 땀을 철철 흘리다가도 농민들이 찾아와 음료수도 갖다주고 배우들이 이런 험한 일까지 하느라 수고많다며 손을 잡아줄 때면 감동이 되여 힘들줄도 모르고 일손을 다그치게 된다고 한다.

 연기사랑 가족사랑
연기사업을 무한히 열애하는 김동현씨는 선후로 두번이나 적을 연극단에 남겨두고 하해하였었으나 번마다 무대의 유혹을 떨쳐버릴수 없어 돌아오고말았다. 연극, 소품, TV련속극들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날린 김동현씨에게 있어서 연기는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다. 하기에 정책에 의해 사업터를 떠난 지금도 김동현씨는 연기생활을 잊지 못하고 기회만 닿으면 소품이든 TV련속극이든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작품을 접수하고 연기에 푹 빠져버린다.

2006년에 내부퇴직을 하고서도 소품공연에 참가한 김동현씨는 지난해 년말에 중앙TV 제8채널에서 제작하는 24회 TV련속극 《산너머 강너머》에 보조역으로 출연하고 돌아오자마자 연변TV의 2009년 음력설야회에서 《부조사계절》에 등장할 임무를 맡았다.     

노력형의 연극인 김동현은 가정생활에서는 정많은 남편, 자애로운 아버지이다. 당년에 공연때문에 해마다 8,9개월씩 외지에 나가있을 때 혼자서 딸애를 키우느라고 수고많았다며 늘 안해한테 감사한 마음을 갖고있은 그는 여러해전에 안해가 출국하게 되자 딸애를 학교에 보내고 살림을 하는 중임을 자기가 떠메였다. 아버지한테서 엄마사랑까지 받으며 고중을 마친 딸애는 몇해전에 일본에 갔는데 거기에서 분장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취직을 해서 열심히 일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하고있다.
아침마다 시간맞춰 출근하느라 허둥댈 필요도 없고 텔레비죤을 마음껏 시청하는것을 주업으로 삼을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김동현씨는 편안한것은 좋지만 금방 연극에 대해 좀 알게 되고 연기를 확실하게 할수 있게 되였는데 무대를 떠나게 되니 마음이 허전할 때가 많다고 터놓았다. 자기를 수요하는 작품이 있다면 아무때든 출연에 나서고싶다는 김동현씨에게 보다 많은 기회가 차례지기를 기원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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