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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화작곡가의 끝나지 않은 음악애착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7월24일 08시35분    조회:7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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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 주임 성기화의 실적

연변음악을 흥기시킬 꿈을 안고

《만천성》, 《해바라기》, 《웃는 얼굴》 등 대중들이 즐기는 노래 100여수를 작곡해 중국조선족음악에 자신의 이미지를 심은 작곡가 성기화는 비단 우수한 한명의 작곡가일뿐만아니라 음악편집으로서 직책을 다하는 등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무대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착실하게 해내여 주변으로부터 “사심없는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고있다.

 작곡가로 자리를 굳히기까지

1955년 10월 27일,  길림성 교화시 신잠진에서 4남매중 둘째로 태여난 성기화에게는 우로 누님이 한분 계시고 아래로 남동생 둘이 있었다. 림업종목공장 공장장으로 계시던 아버지는 2등영예군인으로서 시력이 좋지 못했으나 기타를 잘 다루었고 어머니는 노래를 잘 불렀다.  인심좋은 당지 지방습관으로 해마다 정월 초하루날부터 보름까지 하루 한집씩 상을 차려놓고 동네사람들을 청해 소래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군 했는데 그때 성기화의 어머니가 주력이였다. 부모들의 영향을 적잖게 받았으나 그래도 생물에 흥취가 깊었던 성기화의 어릴적꿈은 농학원이나 림업학원에 입학하는것이였다.           
                                                                        
1960년,  6살 어린 나이에 공사조선족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누님과 한학년에서 공부하게 되였다. 1965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진학이 중지되자 성기화는 누님과 함께 상영삼림경영국자제소학교(한족학교)로 전학했다.

어릴 때 성기화는 휘파람을 즐겨불었는데 그의 부모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그에게 피리를 사주었다. 하여 피리련습을 고심히 하였는데 어느새 “수준”급에 도달했다.

1970년 노래 잘 부르고 활발한 그의 누님은 학교진출에 추천받았으나 5류분자자제라는 신분때문에 정치심사에서 탈락되였다. 1968년 8월에 지금의 서란시 조선족제1중학교에 입학해 독신생활을 하게 된 성기화는 누님이 정치심사에서 탈락된것을 목격하고 자기의 어릴적꿈을 깨고 한학년 내려앉아 예술에 전념했다.       

그의 싹수를 알아보았던지 일어에 능숙했던 박원준음악교원은 감춰두었던 일본의 음악리론책을 번역해 성기화를 가르쳤다.  문화대혁명후기라 일본의 음악리론책을 번역한 사실이 발각되기만 하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조차 무서웠다.  그런 은사의 가르침속에서 성기화는 차츰 음악리론을 터득했다.

1970년, 초중을 졸업한후 성기화는 피리를 잘 부는 덕에 선전대에서 노래가수로 있던 누님의 알선으로 선전대에 합류했다.  그는 남들이 부는 트롬본이 부러워 또 트롬본을 배웠다.

1972년, 연변예술학교에서 전 성 범위내에서 학생 84명을 모집할 때 성기화도 그 시험에 참가하여 시험관을 넘고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해보니 박원준선생한테서 배운 지식이 예술학교에서 배워야 할 1년반정도의 지식에 해당되는것이였다.  그때 성기화의 전업은 호른이였다.  하지만 얼마후 그는 한평생 무쇠붙이를 안고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전업을 바꿔보려는 생각을 품고 교장을 찾아가 사자반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교장은 보내줄수는 있지만  졸업할 때까지 호른을 견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되여 성기화는 사자반에서 종합적인 학습을 하게 되였다.

경제난으로 해서 배를 몹시도 곯았던 성기화는 도망칠 생각도 여러번 했으나 검은 호적으로 되는것이 두려워 주저앉군 했다.  많은 학생들은 배가 고파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지경이였고 약한 몸이라 어쩌다 기름튀기에 콩물 같은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되면 설사하기가 일쑤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교단에서 교수를 제대로 못해본 교원들은 열정이 드높았는바 학생의 성적이 낮으면 교원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진취심이 강했던 학생들은 배고파 누웠다가도 누군가 련습하는 소리가 들려오면 다 같이 련습하러 나갔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장소를 찾지 못해 변소에서 련습하기도 했다.

졸업시 성기화는 호른으로 가무극 《백모녀》에 출연했으며 졸업작품으로 《변강녀민병》을 창작하였는데 지금 예술학원에서 교원사업을 하고있는 동창생 리애순박사가 무용창작을 맡아 졸업무대에 올렸다.

졸업후 성기화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왕청현문공단에 배치받아 21살나이에 악대지휘로 일했다.  문공단에 배치받은 이듬해 문공단 단장이 정규적인 지휘반에 보내주어 작곡리론을 학습하게 되였고 그것을 계기로 성문화국 부국장 김봉호를 찾아가게 되였다.  김봉호의 연줄로 길림성 가무극원의 주광경교원을 만나게 되였고 그한테서 악대지휘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예술학교를 다닐적에 배워두었던 민족무용기초가 지휘동작을 배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성기화가 악대지휘로 있으면서 왕청대대(당시 명성높은 과외선전대)에 편곡해준  《양돈처녀》는 길림성 1등상을 탔다.  연변예술학교에서 왕청으로 배우러 오면서 편곡자의 이름을 보고 우리 학교 학생이라며 연변예술학교로 전근시키려 하였으나 왕청문공단에서는 성기화를 놓아주지 않았다.

얼마후 성기화는 기본로선공작대 일원으로 왕청현 쌍하공사 화성대대로 하향하게 되였다.  그곳에 14개월 있으면서 조선말을 잘 할줄 몰랐던 성기화는 조선말수준에서 큰 제고를 가져왔다.  하향생활을 마치고나니 피아노를 다루던 손이 꽛꽛해졌다.  성기화는 공작대에서 사업하는 기간에도 각 단위의 활동을 위해 편곡을 해주었다. 그는 어린나이인 “자기를 독립작업할수 있도록 얻어준 분들이 그렇게도 고마울수 없었다”고 말했다.

1984년, 성기화는 연변군중예술관에 전근되여 사업하다가 연길시문화관으로 전근되여 음악부장직을 맡았다. 성기화는 문화관에 한대밖에 없는 피아노로 문화관의 음악수준을 많이 제고시켰는데 길림성문화관계통에서 있은 업무시합에서 단연 1등상을 받아안았다.

그후 성기화는 시험을 거쳐 연변청년예술극단으로 자리를 옮기고 전직작곡, 지휘로 사업했다. 얼마 안지나 도급제가 실시되면서 극단에 있던 70명이 전부 단장직을 도맡으려고 경쟁에 나섰다. 전부 한족들로 구성된 극단에서 유일한 조선족인 성기화도 경쟁에 나섰는데 경쟁상대를 전부 물리치고 단장으로 되였다.

단장으로 당선된후 성기화는 전국에서도 1, 2류에 가는 경음악설비로 공연질을 올렸다. 성기화는 상해음악학원을 졸업하고 성가무극원에서 사업하던 김춘복을 극단에 합류시키고 정상공연을 많이 다녔다.  비상( 祥)과 함께 전국공연을 다니면서 대만, 향항 등지의 연예인들과 련계가 있었던 김춘복은 다른 작곡가들보다 다른 풍격으로 편곡했다.  리론은 익숙히 알고있으나 실천이 없었던 성기화는 김춘복한테 가르침을 청했고 김춘복도 사심이 없이 아는대로 배워주었다. 학습을 하면서 성기화는 먼저 반주곡을 작성한 다음 작곡하는 기능작곡법이 점차 익숙해졌다. 편곡이 많은 때는 한해에 200여수씩 편곡했으며 가수들마다에게 20여수씩 여남이 있게 편곡해두었다.  그외 그는 구연단, 화극단, 해란강예술단, 청년예술단 등 단위의 편곡도 도맡아했다.

1990년대초, 성기화는 롯데, 두만강, 백산호텔 등 여러 호텔에 가서 음악반주를 한적이 있었다.  드문드문 친구들이 찾아와서 함께 술을 마실라치면 누구도 성기화의 주량을 당하지 못해 쓰러지는통에 나중에 결산은 자연히 성기화가 하게 되였다. 그래도 그는 그런 곳에서 백성들의 흥취를 알아낼수 있는것으로 해서 무등 기뻤다.

그러던 1993년에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 주임인 한병낙선생이 전화를 걸어와 연변인민방송국에 출근할 의향이 없는가고 물었다.  몇년전부터 방송국에 출근할수 있기를 희망했던 성기화는 단마디로 대답했고 1993년 7월 27일부터 정식으로 방송국에 출근하게 되였다.

사업심이 강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성기화는 다른 사람들의 퇴고당한 작품도 몇년씩 보관해두면서 자주 심사하군 했다. 《타향의 봄》과 《나의 목장》이 그중의 대표작이다. 《타향의 봄》은 처음 투고되였을 때 그 당시의 풍격과 맞지 않아 합격선을 넘지 못했다.  성기화는 그 작품을 자기의 서랍에 보관해두었다가 2년후 김성삼을 찾아갔다.  김성삼은 곡이 그닥잖다고 하면서도 선생님의 부탁이니 한번 불러보겠다고 대답했다. 생각밖으로 반달후 《타향의 봄》은 연변을 들썽해놓았다. 1997년, 작곡가 정근포의 작품을 성기화는 검사해보고 “당신의 실력으로는100% 수준을 발휘하지 못했다”며 퇴짜를 주었다.  그러자 정근포는 성나하면서 10년전에 퇴고당한 작품이 하나 있으니 보라고 가져왔다. 그 작품을 보고 마음에 든 성기화는 그것을 다시 제작해서 먼저 매주일가에 올렸는데 또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작품이 바로 《나의 목장》이였다. 《나의 목장》은 전국 1등상을 수여받았을뿐만아니라 연변, 길림성, 료녕성,  전국소수민족대회에서도 빛을 뿜었다.

1998년에 성기화는 자신의 작곡집 《성기화작곡집》을 록음테프로 출판했다.
당뇨병으로 1년에 3차이상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성기화는 2006년 10월 26일에 내부퇴직하였다.

성기화는 도합 20여개의 상을 수여받았는데 그중 《선생님 안녕》이 1등상, 박춘화가 부른 《우리네 명절》이 제2기 진달래상 1등상을 수여받았다.   그의 예술생애 최고상으로는 2009년 4월 15일에 있은 조선 평양 국제예술절에 피바다가극단의 지휘자 김남철과 함께 제작한 MIDI반주한 《우리는 잊지 않으리》가 금상을 수여받은것이다. 그통에 많은 사람들이 그한테 작곡을 부탁해와 눈코뜰새없이 바삐 보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로인복지관을 위해 싼 가격으로 봉사를 제공해주었다.
금년초 성기화는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에서 주최하고 연변라지오텔레비신문에서 대행하는 민들레문예부간의 초심원으로 초청받고 많은 작품들을 심사정리했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

성기화와 그의 안해 최숙의 만남은 순탄했다. 성기화와 당시 왕청현 대선대대 집체호에서 공청단사업을 책임지고있던 최숙은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서로 상대방에 대해 알고있는 상황이였다. 그때 성기화는 23살, 최숙은 21살이였다.  혼인문제에서 성기화는 처음에 자기가 조선말을 잘 모르는지라 한족처녀면 만족이라고 생각했고 왕청에서 배우자를 찾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녀자를 만났다가 서로가 마음에 들어 관계가 확인되면 녀성측이 자기를 따라 외지로 고생살이를 떠나야 한다는 근심에서였다. 그러나 최숙이만은 달랐다.  3남매중의 막내인 최숙은 훌륭한 가정교양을 받으며 자랐고 인물체격이 미끈한데다가 성격 또한 명랑하고 활발하며 경우가 바른 처녀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이렇게 좋은 녀자를 다시 만날수 없다는 생각이 든 그는 알심들여 련애편지를 썼다. 다 쓴 련애편지를 친구들한테 보였더니 친구들은 편지를 잘 쓴다고 그를 칭찬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그는 인차 최숙이한테 련애편지를 보냈다.  진작부터 서로 마음이 있었던지라 첫대면에서 련애관계가 성립되였다. 최숙의 아버지는 주공회에서 사업하셨던분으로서 1955년도에는 모택동주석을 만난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부련회사업을 했다.  그때는 고린내나는 아홉째라고 교원을 무시하고 군인을 우러러보던 시절이라 최숙의 부모는 처음에 그들의 교제를 반대했다. 그러나  성기화에 대한 최숙의 사랑을 막을수 없어 나중에는 할수 없이 동의했다.  후에 최숙은 왕청현병원 간호원으로 사업하는 한편 위생학교에 가서 연수했다.               
                                                                                                          
1981년 1월 25일,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9평방메터되는 숙소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처가집의 도움이 아주 컸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사업을 지지해주면서 달콤한 생활을 누렸다.  남편이 연길로 전근하면서 최숙도 연길시병원으로 전근했다. 지금도 안해를 끔찍이 사랑하는 성기화는 안해가 저녁늦게 들어오거나 외박해도 안해를 리해해주고 신임해주었다.  부부사랑이 두터운 그들은 어쩌다 사유로 10일가량 떨어져있게 될 때면 그리운 심정을 자제할길이 없다고 한다.  평소 그들은 친구처럼 지내면서 아침에는 먼저 깨여난 사람이 밥을 짓군 했다.

어렸을적 어머니한테서 료리재간을 배운 성기화는 료리수준이 중급은 간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 손님을 맞을 때면 중국음식은 자기가 맡아하고 조선음식은 안해에게 맡긴다.

안해가 성기화를 제일 감동시킨것은 시부모에 대한 효도였다.  금년에 81세인 아버지와 76세인 어머니는 지금 장춘에 거주하고있고 최숙은 시부모한테 아들보다도 더 효도를 하려고 애쓰는 며느리다. 해마다 문안을 다니는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어느 한번 시부모들의 신체가 불편해 문안을 갔던 최숙은 장춘에서 한국건강제품을 4년동안 경영하여온 친구를 찾으려고 장춘시내를 훑다싶이 해서 끝내 찾고야말았다. 최숙의 효도에 감동된 친구는 일전한푼 받지 않고 건강제품을 최숙에게 선물했다. 이런 안해라면 어느 남자인들 감동되지 않으랴!

성기화가 퇴직한후 최숙은 남편한테 음식을 해드리면서 남편이 산책하거나 낚시질을 하는것을 절대적으로 지지해나섰다.  지금 안해의 관심으로 성기화의 당뇨병은 많이 호전된 상태다.

그들 부부는 누구든지 늦게 귀가할 때면 서로 불러 단란히 마주앉아 식사한다. 활발한 성격인 최숙은 2007년도에 퇴직한후 드문드문 동창생들과 만나게 되면 떠들썩하면서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술상도 벌린다. 그들 부부는 가끔 일방이 밖에 나갔다 귀가할 때면 가끔씩 집에 있는 일방을 전화로 불러내여 자기들이 자주 다니는 음식점에 가서 외식한다.

무남독녀로 자란 그들의 딸 성홍매는 금년에 28살이다.  성홍매가 5살때 성기화는 집에 피아노를 마련하고 딸을 가르치려 하였다.  그러나 나어린 홍매는 피아노건반을 두드리는것이 너무 힘들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기화는 딸애를 설득하느라 무진 애를 썼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예술에 애호는 있으나 확실한 예술세포는 보이지 않는지라 성기화도 딸애를 연예인으로 키우려던 생각을 포기했다.  성기화는 종래로 딸한테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면서 어린애들이 음악으로 연예계에 소문을 날리는것을 본 홍매는 그때에야 예술학교에 입학해 작곡학부를 지망했다. 비록 예술학교작곡반을 졸업했으나 아버지가 바쁘게는 보내지만 경제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것을 보고 성홍매는 연예쪽으로 발전하는것을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17살때 《나는야 행복새》,  《버릴수 없는 너》 두 노래에 작곡하였는데 연변방송국음악프로에 요청되여 자주 방송되고있다. 현재 성홍매는 한국에서 몇년째 가게를 경영하고있다.

음악에 대한 애착심

연변음악에 대해 성기화는 이렇게 자기의 견해를 토로했다. “비록 연변음악도 진보했지만 타지방의 음악은 그보다도 훨씬 더 진보했다.  때문에 우리는 늘 남의 뒤에 떨어져있는것이다. 그 주요한 원인은 경제뒤받침이 약한데 있다. 경제만 받쳐주면 연변음악도 흥기될수 있다. 그외 대도시진출로 인해 인재보류가 힘든것도 한가지 원인으로 된다. 게다가 외국문화를 접촉하면서 시청자들의 인식이 앞서가는데 반해 연변음악은 백성의 사유를 따르지 못하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연변풍격을 되살리려면 남들의 좋은것을 많이 흡수하여 우리의 민족바탕에 새 관념을 주입하며 핵심을 만드는것이다. 즉 수입제가구도 내가 사면 내것으로 되는것처럼 음악소재도 마찬가지로 남들의 우수한것들을 허심하게 학습하면서 대중들이 즐기는 노래를 많이 창작해내는것이 연변음악발전의 기본인것이다. 절대 내 장점을 다른 사람의 결점과 비기지 말고 나의 결점을 다른 사람의 장점과 비기면서 실속있게 노력해야만이 진보를 가져올수 있다. 이 방면에서 후배들이 선배들의 작품을 잘 연구하면서 그중의 알맹이를 흡수하고 더 많은 노력을 들일것을 기대한다.”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성기화는 “나는 비록 연변에서 태여나지는 않았지만 연변에서 사업하면서 모든 성과를 올리고 가정도 이루었다.  연변이란 이 땅이 나에게 무수한 영예와 기쁨을 가져다준만큼 이젠 내가 연변에 뼈를 깎아넣을 때가 되였다”고 감개무량하게 말하면서 “기왕 음악사업에 몸을 담갔을바엔 특히 연변음악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 한국에도 다녀오며 음악연구를 하는 한편 좋은 정보라도 있으면 가져다 연변음악의 발전에 도움되는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연변라지오TV신문     허명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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