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작곡가이기 앞서 음악편집이였다.
“맑고 푸른 하늘가에 기러기 줄지어 가면/ 잊지 못할 학창시절로 마음은 날아가네/ 선생님 품속에서 즐겁게 뛰놀던/ 넓은 운동장 밝은 교실로 돌아가본다네/ …” 듣기만 해도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가슴벅차는 노래 《추억의 노래》(석화 작사/ 황영애 노래)는 1980년대 대중가요로 널리 불리웠을뿐만아니라 후에는 조선족중학교음악교과서 8학년 상권에 수록되면서 중학생들속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이 노래를 작곡한 원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 주임 한병낙은 이 노래외에도 《조국땅은 어디가나 내 고향》, 《이 밤도 달은 둥글다》 등 80여수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그럼에도 한병낙작곡가는 늘 이렇게 말하군 한다.
“나는 작곡가라고 하기보다는 음악편집이라고 하는것이 더 적절하다. 그것은 나 자신이 작곡보다는 음악편집에 갑절 정력을 기울였기때문이다. 또한 음악편집으로서의 자부심을 안고 수십년을 하루같이 음악편집사업에 빛과 열을 다 바쳤다.”
그도 그럴것이 1964년에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후 연변인민방송국 음악편집으로 배치받아서부터 2002년도에 퇴직할 때까지 장장 38년이란 세월을 한우물파서 기술직함도 “주임편집”으로 받은 한병낙한테는 “작곡가”라는 호칭보다는 “음악편집”이라는 호칭이 더 귀에 익었다.
뒤늦게 가진 꿈
1942년 1월 14일, 길림성 화룡시 동성향 흥성촌의 한 농민가정의 3남2녀중 둘째아들로 태여난 한병낙의 학생시절은 지극히 평범했다. 형님처럼 공부를 뾰족하게 한것도 아니고 음악적인 재질을 보이지도 않았다. 째지게 가난한 집형편때문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에 나왔는데 겨우 15살인 그에게 농사일은 너무나 힘겨웠다.
힘든 나날에 유독 지친 마음을 달랠수 있는 일은 과외문예활동에 참가하는것이였다. 마침 마을에는 로윤관(원 화룡현문화관 관장)이라는 음악을 잘하는 분이 있었는데 한병낙은 늘 그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바이올린도 배우고 음악지식에 대해서도 간단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자신의 목청이 좋다고 생각한 한병낙은 목청을 틔우느라고 늘 산에 올라고 발성련습을 했다. 마을사람들은 매일 발성련습을 하는 그를 보고 “저자식 미쳤는가보다”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러거나말거나 그는 하루도 련습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덕분에 현문예콩클에도 자주 참가하였다. 그러면서 차츰 음악을 하고싶다는 욕구가 생겼고 학교에 가서 정규적으로 배워야겠다는 결심도 섰다.
1958년, 째지게 가난한 집형편을 잘 아는 한병낙은 장춘예전에 시험을 보러 갈 려비를 마련하려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는 25리나 되는 룡정에 가서 팔았고 또 물고기를 잡아서 팔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해 락방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락심하지 않고 1960년에 다시 연변예술학교 시험을 보았는데 행운스럽게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오매에도 그리던 음악을 배우게 된 그는 세상의 행복을 독차지한듯싶었다.
고학의 나날들
한껏 부풀어오른 가슴을 안고 연변예술학교에 온 그에게 있어서 매 한발자국마다 너무 힘들었다. 음악기초가 약해서 전업과지식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집이 가난하여 다른 학생들보다 돈없는 고생도 말이 아니였다. 당시 그의 형님은 동북사범대학에 다녔고 동생들은 중학교에 다녔다. 농사질을 하여 5남매의 학비를 대기 위해 부모는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다 하였지만 어느 자식한테도 돈을 넉넉히 줄수 없었다. 그래서 한푼이라도 아껴써야 했던 한병낙은 동학들이 다 시내에 놀러나갈 때에도 학교밖을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대신 그는 모든 정력을 공부에 몰부었다. 리론지식은 물론 짬만 나면 피아노를 열심히 련습했다. 언젠가는 하루에 12시간 친적도 있었다.
늘 돈이 딸리여 고생하던 고학의 나날에 잊을수 없는 일은 형수(당시 형님의 련인였음)가 그에게 생활비에 보태라면서 준 15원이였다. 나서 처음 받아본 큰 돈에 그는 매우 감격되였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날에도 그때를 회상하면 맘씨 고운 형수의 사랑에 가슴이 훈훈해났다.
간고했던 음악편집사업
1964년 8월,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한병낙은 연변인민방송국 문예부 음악편집으로 배치받았다. 겨우 7개월정도 일하면서 이제 막 하는 일에 익숙해지려는데 국에서 의무병역때문에 22살까지 신체검사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마침 22살이였던 그는 신체검사에 참가하였고 합격되여 생각지도 못했던 군대생활을 하게 되였다. 1965년 봄에 입대한 그는 부대에서도 각종 문예활동에 참가하였다.
한병낙은 1968년도에 제대한후 다시 연변인민방송국 문예부 음악편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치운동의 영향으로 지방음악은 다루지 않고 주로 경극과 한족노래를 방송하였다. 그러다가 1972년이 되여서야 지방프로가 나오면서 음악편집생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새롭게 시작하여 음악재료가 결핍한 조건하에서 1년에 300 ~ 400곡을 록음해야 하였기에 번역가요외에도 지방의 문공단에 내려가서 록음을 했고 농촌구락부도 조직해서 록음했다. 아무리 간고한 환경이였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여서 늘 힘이 솟았고 또한 보람도 느꼈다.
작곡도전과 히트곡 탄생
1976년에 음악부 동희철주임이 한병낙한테 “작곡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하면서 가사를 주었다. 하여 처녀작인 《모주석 주신 총 굳게 잡았네》가 탄생하였고 방송전파를 탔다. 그후 1978년도에는 림원춘작가로부터 가사 《조국땅은 어디 가나 내 고향》을 받아 작곡하였는데 대중들에게 널리 불리우면서 호평을 받았다. 이 노래는 인차 예술학교 성악교재에 수록되였고 상해에서 제작한 연변노래레코드로 출판되였다. 그러면서 한병낙은 작곡에 신심을 가지게 되였고 창작욕심이 생겼다.
1982년도에는 한족가사에 곡을 달았는데 후에 가사편집이였던 석화시인이 그 곡에 가사를 붙였다. 그게 바로 대중가요로 널리 불리운 《추억의 노래》이다. 그는 또 방송극 《백옥란》, 《샘골에 핀 꽃》 등의 주제곡을 창작하였고 《우정만만세》(석화 작사), 《꽃피는 사시절》(김일 작사) 등을 비롯하여 선후로 80여수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그중에서 허광과 황영애가 함께 부른 노래 《이 밤도 달은 둥글다》(최기자 작사)는 썩 후인 1994년도에 작곡하였다. 최기자로부터 작곡을 부탁받은후 가사를 읽어보았는데 내용이 아주 마음에 와닿았다. 당시 한국에서 고생하는 안해를 보는것 같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안해가 눈앞에 선했다. 또한 가족이 함께 했던 지난 세월이 떠오르면서 애틋한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노래 《이 밤도 달은 둥글다》에서 고향을 그리는 애잔한 마음이 바로 그때 그 자신을 표현한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통속가요와 대중가수 발굴
1982년에 그는 사업분야가 늘어나면서 지식의 한계를 느꼈다. 하여 상해음악학원 음악학부에서 연수할것을 조직에 신청하였다. 2년간 상해에서 공부한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중가수들의 활약이 적고 통속가요가 적은데 비추어 한병낙은 1985년에 “연변통속창법콩클”을 조직하였고 이듬해에는 “민족창법콩클”을 조직하였으며 “가요창작콩클”도 여러차례 조직하였다. 하여 구련옥, 한해연, 현철, 윤행성 등 대중가수들이 대거 발굴되였고 《요렇게 조렇게》, 《세월은 흘러도》, 《까만 눈동자》, 《들놀이 가자 봄놀이 가자》 등 수많은 대중가요들도 탄생되였다.
1987년, 한병낙은 라디오방송이 저조기임을 감안하여 연변에서 처음으로 《대중무대》를 조직하였는데 인기가 대단하였다. 1회부터 21회까지 방송국에서 진행하고 그후부터는 각 시, 현, 진, 향에 내려갔다. 그래서 농촌의 꼬마들까지도 무대에서 자신의 재간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는 기회가 되였고 남녀로소 할것없이 《대중무대》를 즐겨 관람하고 청취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병낙은 2002년도에 퇴직할 때까지 줄곧 음악편집사업에 종사하면서 지방노래편집, 매주일가, 음악감상, 음악생활 등 프로그램책임자로 활동하고 가수콩클, 가요창작콩클 등 대형음악활동을 수십차 조직했으며 새 노래를 수백편 편집, 제작했고 “교향악에서 쓰이고있는 여러가지 악기”, “세계음악박람회” 등 음악지식성프로그램을 편집했으며 음악생활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 저명한 음악가들과 명곡들을 많이 소개했다. 퇴직후에도 《연변가요대전》의 편집에 참가하는 등 음악활동을 계속하고있다.
자랑스러운 안해
1969년도에 동료의 소개로 연길시복장공장에 다니는 지금의 안해를 만난 한병낙은 만나서 3개월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감정기초든 경제기초든 아무런 기초없이 시작한 결혼생활이였지만 깨가 쏟아졌다. 그래서 그는 늘 “사업때문에 집일은 뒤전이였고 돈에 쪼들리기까지 하였지만 싸움 한번 한적이 없다. 하냥 웃어주는 무던한 안해덕분에 난 편한 마음으로 사업할수 있었다”면서 안해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가난은 늘 한병낙한테 붙어다녔다. 큰 딸만 키울 때에도 넉넉하지 못했던 살림이 아들 한욱이 태여나서부터는 더욱 쪼들렸다. 태여나서부터 건강하지 못했던 한욱은 두살이 되여서부터 페염으로 앓기 시작해 자주 입원하면서 절반은 병원에서 살다싶이 했다. 마침 한병낙이 상해에서 공부할 때여서 안해는 출근하면서 집안살림을 해야 했고 또 한욱의 병간호를 해주어야 했다. 혼자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언제한번 남편한테 투덜거리거나 얼굴을 찡그린적이 없는 안해로 하여 그는 무난히 공부를 마칠수 있었다.
한병낙은 그때를 떠올리면 “당시 나는 단위에서 1등 보조대상이였고 친척들의 보조대상이였다.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에 우리 부부는 큰힘을 얻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며 감개무량하게 말한다.
1993년에 퇴직한 안해는 이듬해 바로 돈을 번다고 한국에 갔다. “덕분”에 집일이라고는 손도 대지 않던 한병낙은 3년간 가정수업을 제대로 받았고 안해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도 느꼈다. 3년간 엄청난 고생을 하고 돌아온 안해덕에 생활은 많은 호전을 가져왔다.
바쁜 사업으로 신체상황이 좋지 못했던 한병낙은 퇴직후 등산을 꾸준히 하여 건강을 되찾았다. 쉽게 만족을 느끼는 그는 “잘산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만족한다. 지금은 온 가족이 건강하게 생활하는것을 제일 큰 행복으로 간주한다”면서 “사람은 역시 건강이 최고가 아닌가”며 호탕하게 웃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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