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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철 - 국가1급배우의 분투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3월29일 14시45분    조회:7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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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예는 과거일뿐 미래가 아니다
ㅡ국가1급배우 박홍철가수에 대한 이야기

무릇 어떤 일을 하든간에 출발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 출발점이 있기에 과정이 있고 결과가 있게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그 출발점을 기초로 결과에 가서 영예의 꽃다발을 받아안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다. 하지만 그런 영예를 과거로 밀어버리고 오늘은 또 오늘의 출발점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달리는 사나이가 있다. 그 사나이가 바로 클래식발성을 기초로 하여 민족창법의 가창력을 구사하고 류행가곡들을 겸해서 다방면의 가창력을 발휘할수 있는 가수로 각광받고있는 박홍철가수, 국가1급배우로 성장하기까지 그가 엮어온 련속극같은 이야기들을 적어본다.
1967년 6월 24일, 안도현 명월진의 로동자가정에서 3남매중 맏이로 태여난 박홍철은 어릴적부터 장차 가수가 되려는 야무진 꿈을 품었다. 아버지의 엄격한 교양을 받으며 자라난 까닭에 너무 일찍 셈이 든 그였지만 마을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어머니가 늘 건드러지게 부르던 《바다의 노래》, 《그네뛰는 처녀》 등 조선가요들이 그처럼 성수날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의 어머니는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출뿐만아니라 농촌운동대회때면 배구선수로도 뽑히는 등 마을에서 소문난 “팔방미인”이였다. 그런 어머니의 뒤를 따라다니며 박홍철은 나도 언제쯤이면 어머니처럼 노래를 멋지게 부를수 있을가 하고 부러워했다. 결국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가수꿈을 키우게 되였고 그 꿈을 향해 오늘까지 달려오게 된것이였다.                                    (2면으로)
아버지의 사업수요에 의해 안도현 연경향으로 가정이 이사가면서 연경향중심소학교에 입학한 박홍철은 소학교 1학년때부터 문예선전대에 가입해 독창을 하면서 인기를 모았다. 당시 연경향중심소학교에 상해에서 온 지식청년으로 성이 로씨인 녀선생이 음악교편을 잡고있었는데 바로 그 녀선생이 그때 이미 중국의 10대 경극을 통달한 음악인이였다. 하지만 한어를 잘 몰랐던 박홍철은 그 녀선생에게서 배운 경극을 부른다는것이 그만 가사발음이 틀려 한족관중들이 배를 끌어안고 웃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처음에 자신의 가사발음이 틀린줄 몰랐던 박홍철은 관중들이 왜 웃는지 의아해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노래를 잘못 불러 그런줄 알고 무척 기분이 나빴다. 어린 나이에 향내에 흩어져있는 각 촌으로 10여리씩 걸어다니며 공연무대에 나서는 자신의 고생을 알아주지는 못할망정 되려 비웃는다고 고까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후 내막을 알게 된 그는 우선 한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일부러 한족친구들과 사귀면서 열심히 한어를 배웠고 그렇게 한어에 차츰 익숙해지자 그의 노래를 듣고 웃는 한족들이 다시는 없게 되였다. 오히려 노래를 잘 부른다고 갈채를 보내는가 하면 늘 재청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집체호의 지식청년들은 자주 그를 찾아 노래를 부르게 하고 노래를 부른후에는 꼭꼭 다 쓰고 텅 빈 크림통을 “보수”로 주군 했다. 그때 크림통들은 포도모양, 사과모양으로 다양했는데 비록 크림은 다 쓰고 없었지만 빈통에 여전히 남아있는 크림냄새가 너무나 좋았다. 아무튼 그 크림통을 가지기 위해 박홍철은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자신의 꿈을 간직한 박홍철은 아버지의 엄격한 교양을 받은것도 있었겠지만 특히 항렬로 맏이다보니 일찍 셈이 들어 공부여가에 집안일을 곧잘 돕군 했다.
박홍철이 14살나던 때였다. 어느날 점심시간에 하학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모두 된감기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는것이였다. 그래서 집에 불을 지피려고 살펴보니 땔나무조차 하나도 없었다. 결국 어른들이 알면 욕을 먹을가봐 가만히 소발구를 메워가지고 10살난 녀동생과 함께 나무하러 10여리 떨어진 산으로 떠났는데 처음 하는 나무라서 그런지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런대로 한발구 박아싣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노루꼬리만한 겨울해가 진작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버렸다. 녀동생을 나무우에 앉혀가지고 어두운 산길을 걷는데 사처에서 승냥이울음소리가 청승맞게 들려왔다. 그때는 승냥이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연경마을에 가끔 20여마리씩 무리지어 기여들어서는 돼지우리문을 주둥이로 밀어올려 열고 돼지를 몰아가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승냥이울음소리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녀동생은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며 우는데 사실 박홍철이도 두려운 나머지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어린 녀동생앞에서 울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여 도끼등으로 나무를 탕탕 치고 일부러 목청껏 노래부르면서 소를 몰고 어두운 산길을 걸었다. 정말이지 10여리 산길이 그때처럼 멀어보이기는 처음이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던지 아무튼 산속을 거의 벗어나 길이 좀 넓어보일가 하는데서 인기척과 함께 박홍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것이였다. 사실 그때 집식구들이 아이들이 잃어졌다고 법석을 떨어서 온 마을사람들이 총동원해 그들을 찾으러 나섰는데 결국 소발구가 없어진것을 발견하고 나무하러 간줄 알고 산으로 향했던것이다.
연경향중심소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연경향에서 중학공부를 하다가 초중 1학년때 아버지의 사업수요로 가정이 다시 안도현소재지로 이사하면서 안도4중에 전학한 박홍철은 아쉽게도 중학교에 선전대가 없었던 까닭에 계속 음악을 배울수 있는 무대를 잃고말았다. 하지만 꿈을 버릴수 없었던 그는 라지오를 통해 노래를 배우면서 《오래오래 앉으세요》, 《둥실타령》등 연변노래와 향항가수 장명민이 부른 노래 《조국을 그리는 나의 마음(我的中 心)》을 어찌나 신통하게 모방했던지 오락판 어디에 가서 부르든 재청소리가 끊을줄 몰랐다. 결국 예술지망의 꿈에 푹 빠진 그는 초중 1학년때 어벌크게도 자기절로 안도예술단에 찾아가 시험을 쳤지만 체계적으로 배운게 없었던 까닭에 락방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후에도 신심을 잃지 않고 목단강시조선족예술단 등 여러 예술단체들에 찾아가 시험을 보았으나 마찬가지로 락방의 고배를 마시고말았다. 그런 과정에서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워야 함을 절실히 느낀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후 1984년도에 연변예술학교(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시험을 쳐서 무난하게 예술학교 연극학부(당시는 화극반이라고 불렀음)에 입학했다.
본의 아니게 연극학부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가수꿈을 이루기 위해 연극공부를 하는 한편 선후로 성악교원 정정문선생과 고 송대윤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과외로 음악을 배웠다. 당시 과외로 음악공부를 하는 비용이 한시간에 20~30원씩 되였는데 경제원천이 없는 그로서는 그 비용을 이어댈수가 없었다. 하여 신화인쇄공장에 가서 보이라불도 때고 벽돌공장에 가서 힘든 일도 하며 겨우겨우 그 학비를 마련하군 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고 송대윤선생이 오직 배우기 위해 모지름을 쓰는 박홍철의 소행이 기특해서 아예 모든 학비를 면제해주어 마음놓고 체계적으로 음악공부에 전념할수 있게 되였다.
이처럼 어렵게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인민방송국에 성우로 배치받은 박홍철은 좋은 직장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어릴적부터 품었던 가수꿈을 이루지 못한게 마음에 걸렸던것이다. 그렇게 1년가량 지났을 때 마침 무한음악학원에서 학생모집차로 연변에 왔다. 그때 “바로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한 박홍철은 무작정 학생모집시험에 응시했고 결국 길림성에서 700 대 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유일하게 합격되는 행운을 얻었는바 그때로부터 그의 앞에는 가수로 성공할수 있는 탄탄대로가 열리게 되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무한음악학원을 졸업한 뒤 심양군구 전진가무단에 시험을 쳐서 독창가수로 입사한 박홍철은 꿈처럼 중국연예계 명배우들인 왕강, 황굉, 공한림 등과 한무대에 서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였고 3년후에는 료녕성무장경찰부대문공단으로 자리를 옮겨 조본산 등 명배우들과 함께 한무대에서 공연하며 자신의 립지를 굳혔다. 그 기간 즉 1994년도와 1995년도에 그는 각각 료녕성TV가수콩클과 심양시TV가수콩클에 참가해 두번 다 1등의 월계관을 석권하는 영예를 지니기도 했다. 또 여러차례 전군(全 )가수콩클에 참가해 1등상을 수상하면서 2등공 1차, 3등공 2차를 세웠을뿐만아니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영광도 누리였다. 1998년도에는 또한번 배움을 목적으로 한국으로 건너가 세계채널연예기획사에서 3년간 계약가수로 활약하며 한국의 대부분 유명가수들과 한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많은 갈채를 받았다. 귀국후 고향 연변에 돌아온 박홍철은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에 복귀해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있다.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에 돌아온후에도 박홍철은 자신의 기량을 점검하기 위해 각종 콩클에 참가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바로 2004년도에 제11기 중앙TV청년가수콩클이 열렸는데 당시 길림성지역 전직가수조 1등의 신분으로 중앙TV청년가수콩클에 참가한 그는 대번에 결승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로서 2년후인 2006년에는 제12차 중앙TV청년가수콩클이 열렸다. 당시 중앙민족가무단에서 콩클에 참가할 가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한 박홍철은 시험을 거쳐 변영화와 함께 중앙민족가무단대표로 콩클에 참가, 역시 결승전까지 진출하며 확실한 실력을 검증받았다. 그로써 박홍철의 실력을 보아낸 중앙민족가무단에서는 그때로부터 국내공연이든 해외공연이든 언제나 그를 불러 1선독창배우로 지금까지 기용하고있는 상황이다. 하다보니 중앙민족가무단을 따라 박홍철이 남긴 발자국은 국내는 물론 해외로는 전반 아태지구를 포함해 유럽지역의 프랑스, 체스꼬, 세르비아, 웽그리아 등 10여개 나라와 지구에 달한다. 특히 공연차로 대만에 갔을 때는 중국가요 《아버지(父 )》를 불러 당시 국민당주석 련전을 비롯해 모든 관중들이 눈물을 흘리게 했고 향항에 갔을 때는 향항의 아시아TV, 무선TV, 봉황TV의 단독인터뷰를 받음으로써 동남아시아에 널리 얼굴을 알렸다. 또한 어느 나라에 가든 가는 곳마다 당지언어로 가사를 외워 노래를 부름으로써 뛰여난 노래실력과 함께 우수한 직업정신으로 많은 찬사와 갈채를 받았다.
박홍철이 피타는 노력으로 받아안은 영예는 이뿐만아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4월의 봄 예술축전에 2005년부터 지금까지 련속 5차례 참가한 그는 2005년도에 연변가요 《떼목이 내린다》와 조선가요 《금강산타령》을 불러 금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도 연변가요 《소방울소리》와 《회양닐리리》를 불러 금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도 역시 연변가요 《행복아리랑》과 조선가요 《뻐꾹이》를 불러 금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조선가요 《얼룩소야 어서 가자》와 《모란봉》을 불러 금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에도 역시 조선가요 《압록강 2천리》와 《금강산타령》을 불러 금상을 수상함으로써 5년 련속 금상을 수상하는 “금상개근생”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밖에도 박홍철이 얻은 크고 작은 영예는 이루다 헤아릴수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의 영예를 두고 박홍철가수는 “영예는 과거일뿐 미래가 아니”라면서 “나는 영원히 출발점에 서있고 모든 일을 새롭게 령으로부터 시작하는것으로 생각한다. 노래기량을 더한층 제고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배우고 남의 우점을 자신한테 결부시키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관중들한테 선물하고 우리 민족의 얼을 지켜가는데 저그마한 기여라도 하고싶다”고 표시했다.
말과 같이 오직 예술지향의 꿈을 향해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뛰고있는 국가1급배우 박홍철가수, 새해의 출발점에 나선 현재에도 그의 일정은 빽빽하기만 하다. 간단하게만 보아도 오는 3월에는 중앙민족가무단을 따라 향항공연을 떠나야 하고 4월에는 미국행이 기다리고있다. 불철주야 대부분 일정을 객지에서 생활하기때문에 “고향에 살면서 고향이 그립다”는 박홍철가수는 “국내는 물론 세계각지를 돌면서 한상에 2만원씩 하는 음식도 먹어보았지만 그래도 연변의 된장국과 김치가 최고”라며 고향정에 대한 애틋한 심정도 내비쳤다.
지금까지 많은 영예를 받아안았지만 이후에도 땀흘린것만큼 박홍철가수에게 더욱 큰 영광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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