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남자, 미운 남자 5 ]
문학의 터전을 굳혀가는 원예사의 향기
글/김태현
김태욱 략력
1938년 10월1일 출생.
1956년 중학교 졸업, 농업에 종사.
1978년~1979년 재담《다시만납시다》가 현, 주, 성 우수창작상 수상.
1982년 전주 농촌문예회보공연서 가사 《도거리농사 좋구좋다》 우수상.
지금까지 각종 문학작품 수십편 발표. 화룡시농업국 특산과 과수기술고문, 연변농민과수협회 리사장,화룡시작가협회회원, 연변작가협회회원.
나는 과수원예사이고 연변작가협회 회원인 김태욱의 략력을 보면서 취재수첩을 펼치고 그를 바라 보았다. 그의 눈가와 얼굴에 얼기설기 깃든 주름살속에서 강한 눈빛을 느꼈다.
《아마, 제가 문학예술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소학교시절부터…》말머리를 떼는 김태욱.
1
1952년 겨울방학, 박길웅 반주임선생님이 김태욱과 몇몇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렀다.
《너희들을 부른것은 음력설에 마을청년들과 연극을 하기 위해서다. 할만하겠느냐? 연극은 ‘류호란’이다》
《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김태욱은 이튿날부터 련습에 들어갔고 처음 무대에 오르게 되였다.
연극 《류호란》에서 김태욱의 역은 민병이였는데 류호란과 함께 염석산비도들에게 체포되여 작두에 목을 잘리우는 장면이다.
그때 누군가의 기발한 생각으로 김태욱이 작두에 목을 잘리우게 될 때 배구뽈에 눈, 코, 입을 그려가지고 모자까지 씌워서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날밑에 밀어넣는다.
순간 관중석에서 《우야?!》 하는 비명이 터졌다.
그때는 마을에 전기가 없었기에 초롱불이거나 광산에서 쓰는 까스등이 최고의 조명으로 사용됄때여서 희미한 등불아래 작두날밑에 진짜 사람의 머리가 들어간줄로 알고 촌민들이 비명을 질렀던것이다.
그날밤 박길웅선생님은 김태욱에게책을 주면서
《너는 장차 연극배우로 될수 있을것 같구나. 그러니 꼭 공부도 잘하고 책도 많이 읽어라》고 말했다.
그때로부터 김태욱은 문학작품과 접촉하게 되였던것이다.
《박길웅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아마 80고령쯤은 되셨겠죠. 나의 인생에 문학의 예술적 재능과 연극이라는 활동무대를 가르쳐 준 계몽 선생이이죠》.
2
김태욱은 1956년 초중을 졸업하고 병으로 고중입학시험에서 미역국을 먹고말았다.
그리하여 집에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게 되였다.
그때 이종 8촌되는 분이 찾아오더니《이봐 조카,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게. 자네는 나보다 더 많은 지식을 배우지 않았나? 묘포장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과수원예에 애착도 있으니 함께 과수원일을 해보지 않겠나?》했다.
과수원예는 어려서부터 꿈꿔오던 일이라 김태욱은 얼른 대답하고 이튿날부터 과수서책과 실기경험을 학습하면서 과수원에서 일한것이 오늘까지 장장 반세기를 과수원예에 이바지하였다.
《세상사람들은 과수원예라고 하면 대뜸 탐스럽게 무르익은 과일만을 생각할것입니다. 그러나 한알의 과일이 사람이 먹게 될 때까지의 기나긴 행정을 돌이켜본다면 과수원예도 일종의 예술이라는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김태욱은 수십년을 과수원예의 길을 걷게 되면서 가졌던 지금까지의 인식을 이렇게 피력했다.
1990년 봄, 전 주 원예학회 회의에서 김태욱의《사과배의 쌍층개심형》수형에 관한 론문이 발표되여 전문가들의 긍정을 받으면서 김태욱은 회의끝에 설립된 연변농민과수협회의 리사, 비서장으로 추대되였다. 그후 인츰 리사장으로 지금까지 연변 과수농들의 코기러기로 뛰고있다.
김태욱은 수십년동안 과수원예사업을 하면서 생산실천중에 돌파적인 성적도 많이 따내였고 여러편의 론문도 발표하면서《선진생산자》,《과수장원》,《사과배재배능수》,《선진과학기술자》 등의 아름찬 영예와 묵직한 상품을 받았다.
3
1978년 겨울, 서성진문화소의 책임자로부터 급히 다녀오라는 기별을 받고 진 정부에 도착하니 《 금년 겨울에 문화대혁명이후 처음 열리는 전 현 농촌문예회보공연대회가 개최되는데 당신이 재능을 발휘하여 종목 창작을 해야 하겠습니다》며 문화책임자가 말했다.
그번 공연에서 김태욱이 창작한 재담《다시 만납시다》는 우수창작상을 받았다. 그해 《다시 만납시다》는 전 주, 전 성 농촌문예회보공연대회에서 우수상을 획득, 1979년 3월에는 《연변문예》 건국 30주년 응모작품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1982년 김태욱은 연변주 문화국으로부터 《농촌선진문화공작자》라는 상패를 받았다.
4
김태욱은 《그러나 나에게는 복만이 차려진것이 아닙니다. 복이 화를 불렀는지는 몰라도 뒤따라 이어진 불행은... 후~》 김태욱은 땅이 꺼지는듯한 괴로운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26살에 김련자와 결혼한 김태욱은 아들 하나 딸 하나 두었다. 1988년에 결혼한 아들은 얼마 안되여 자식까지 보게 되였다. 그러나 운명의 조롱이라 할가 아니면 기구한 팔자라고나 할가, 딸애의 결혼식을 스무날 앞두고 갑자기 뜻밖의 교통사고로 아들애가 목숨을 잃고 뒤따라 다섯살에 나던 손군이 급작스레 요절하고말았다.
너무나 큰 타격이였다. 김태욱은 끝내 쓰러지고말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려야만 하였다.
사람들은 부모가 세상을 뜨면 선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속에 묻는다고 하였다.
김태욱은 자식과 손군을 한꺼번에 잃고 힘겹게 살면서 과수농사도 버릴수가 없었고 또 과수생산중에서 어렵게 쌓은 경험도 참답게 총화하여야만 하였다.
김태욱은 다시 한번 굳건히 일어섰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안해와 그리고 귀여운 딸애가 있었다. 그는 비통을 힘으로 바꾸어 과수농사에 전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딸애의 뒤바라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5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의 앞날은 한치도 내다볼수 없다는 말을 가끔 하게 된다. 30년전 까지만 해도 과수원을 도급맞고 힘들게 일하면서도 문학작품을 쓰느라고 밤을 지새우던 김태욱이였다.
지난 2005년 어느날 우연하게 화룡시작가협회에서 과거에 글을 쓰던 로작가들도 인입하여 신진 작가들의 뒤심이 되게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필을 놓은지 무려 20여년이나 넘는다. 내 머리는 이미 텅 빈 상태다. 그런데 다시 글을 쓸수가 있을가?)
김태욱은 고민끝에 과감히 시작가협회 입회수속을 마무리 하였다.
《나는 작가다! 나도 이제부터 화룡시작가협회의 떳떳한 회원으로 되였다.》
김태욱은 글을 쓰려면 우선 가까운 거리에서 주제발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짬짬의 여유시간을 타서 가족사를 제재로 한 산문《우리들의 뿌리》를 완성하여 그때 시 문련에서 발간하는《청산리》 잡지에 발표, 《예술성과상》 이란 값진 영예도 따내였다.
그러나 현성으로 오르내리면서 로친의 성화와 잔소리도 신물이나게 들었다.
그날 시상식에 참가하고 저녁늦게 집에 도착하여 잠든 로친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곧 이어질 푸념이 두려워 성급히 가방속에서 《상패》를 꺼내는데 잠든척하고 누워있던 로친이 벌떡 뛰쳐일어나더니 다짜고짜 령감의 손에서《상패》를 받아들고 말도 없이 오래도록 들여다보더니 시무룩히 웃기만 하였다 한다.
이튿날 아침, 동네 아낙네들이 마실을 오게 되니 로친은 그《상패》 를 꺼내들고 작가령감이 글을 지어 상까지 받아왔다며 령감자랑으로 입이 함박만해졌단다.
이때 김태욱은 불현듯 무엇인가 머리를 스치는것이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안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로 만드는것이였다.
(근 50여년을 함께 살면서 온갖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으면서 나를 성공하게끔 내조를 참답게 잘한 평생의 동반자가 아닌가?!)
김태욱은 즉시로 필을 들고 원고지를 메워가기 시작했다.
그때 쓴 수필 《서쪽하늘에 황혼이 잠잔다》가 연변일보에 발표되면서 그는 선후《연변녀성》,《연변일보》, 《한국KBS방송국 한민족방송》에 글을 발표하고 여러편이 우수상을 받아안는 영예를 기쁨도 만끽하였다.
6
누군가 글쓰는 이들을 두고《작가가 되려면 우선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김태욱은 지금도 이 말을 명기하고 《문학동인》으로 과수원예사라는 직업으로 충실하게 살아가고있다.
그는 지금까지 근 50여편의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김태욱은 자기의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2010년 2월 8일, 연길 백산호텔에서 열린 《문학의 밤》 활동이라고 했다.
늦깍기로 연변작가협회에 가입하여 회원증을 받는 그 순간부터 그의 심장은 세차게 뛰였다고 했다.
김태욱과수원예사의 가슴은 충만과 신심으로 벅찼으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쌓아갈《보탑》들을 눈앞에 환히 보는것만 같았다.
그는 오늘도 문단에 부끄럽지 않는 작가로, 과수원예사로, 연변농민과수협회 리사장으로 한 가족의 가장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이 세상에 영원히 남길 찬란한 이름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필생의 정력을 쏟아가고있다.
길림신문 홍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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