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강 푸른 물결 그를 잊지 않으리
심양군구 모 집단군 공병퇀 참모장 관희지렬사를 그리며
2010년 한여름, 백년에 한번 만나는 홍수가 길림성 대지를 휩쓸었다. 정원이 훼손되고 경작지가 물에 잠겼으며 폭우는 사람들의 눈물을 비추며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위기의 시기에 중국인민해방군전사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선에 뛰여들어 홍수와 사생결단을 벌였다. 심양군구 모 집단군 공병퇀 중교 참모장인 관희지는 바로 이 특대 홍수와의 투쟁에서 전우와 무기장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38세밖에 안되는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8월 3일 오전 9시, 길림시장례식장. 어둠침침한 하늘에서 처량한 비가 흩날리고있다. 38개의 자동소총을 하늘을 향해 쏘았다. 이는 38세의 관희지의 생명을 대표한다. 이렇게 정의롭고 용감한 사나이가, 이렇게 훌륭한 지도원이 이리도 총총히 떠나다니...... 그의 가족들, 그의 전우들, 그가 구조한 사람들, 그리고 그가 지켰던 어머니강도 모두 믿기 어려웠다.
관희지 동지의 추도현장.
관희지의 모친과 그의 안해는 비통한 심정으로 렬사를 보내고있다.
격류에 투신하여 영웅본색을 보여주다
위험한 순간에 용감히 나서는것은 예로부터 모든 영웅들의 공동한 특점이다. 당의 충실한 전사이며 인민의 훌륭한 아들인 관희지는 위험이 닥치는 순간 후회없는 생사결단에 나섰다.
7월 28일 특대홍수로 영길현내 두 화학공장의 7000여개 원료통이 갑자기 송화강에 흘러들었다. 퇀참모장 관희지는 상급의 명령을 접한 후 가장 빠른 속도로 병사들을 이끌고 송화강 송원 하달산구역 수리중심지에 달려가 큰 땜 상류 1000메터 되는 곳에서 성내 마지막 한갈래 수상관문인 제7번째 부교를 설치하여 그 곳까지 표류한 원료통 차단, 인양을 준비했다. 관희지는 과학적으로 병사들을 지휘하여 련속 50여시간을 분전했다. 30일 13시 55분, 마지막 한조의 부교가 잡아당기는 단계에 들어섰다. 차단의 마지막 이은 곳이고 또 4.5메터/초 류속에서의 조작위험계수가 너무 높은것을 고려하여 원래 륙상에서 지휘하던 관희지는 그 외 4명의 병사와 함께 그 부교에 올랐다.
모터보트는 18톤에 달하는 부교를 끌고 이은 곳으로 역행했다. 갑자기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대급류로 모터보트와 부교가 평형을 잃어 모터보트의 스로틀을 끝까지 밟아도 효과가 없었다. 보트와 부교는 함께 큰 땜 갑문에 빨려들어 겨우 몇초내에 큰 땜 11호 갑문과 20메터밖에 안되는 곳으로 표류했다. 보트와 사람이 함께 멸망하는것을 보는 순간 관희지는 과단적으로 모터보트와 련결한 부교의 쇠사슬을 풀라고 명령했다. 모터보트의 6명 병사들은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더욱 평형을 잃은 부교는 11호 갑문으로 향했다. 위급한 시기 관희지가 《뛰여내렷》하고 크게 소리치자 부교의 병사들은 신속히 물살이 센 강물에 뛰여내렸다.
《관참모장은 제일 마지막으로 물에 뛰여들었다. 그가 뛰여내릴 때 갑문과의 거리가 5메터도 안되였다. 활동공간이 좁았기에 물에 뛰여들 때 구명복이 부교에 걸렸다》하달산 큰 땜 수문 오퍼레이터이며 수전13국 로동자인 손예명이 관희지 등 병사들이 물에 뛰여드는 그 순간을 목격했다.
부교우에 있던 5명이 물에 뛰여드는것을 본 전사들은 돌격선을 짊어지고 미친듯이 갑문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반소근, 양범, 마서춘 3명 전사들이 곧 구조됐다. 부교영 부영장 염세성이 마지막으로 구조됐다. 관희지동지는 불행하게도 격류에 떠밀려 장렬하게 희생됐다.
사후 염세성이 회억하기를 그가 물에 뛰여든 후 즉시 소용돌이로 물밑에 말려들어 몇차례 뜨고 가라앉아 정신이 이미 모호해졌다. 그가 곧 절망하려고 할 때 갑자기 몸아래에서 누군가가 그를 힘있게 받쳐주는것을 느끼고 흠칫 떨면서 신속히 수면에 떠올랐다...
구조된 후 3명의 전사가 이미 상륙한것을 발견했다. 염세성은 그제야 바로 참모장이 자신을 떠받들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생의 희망을 전우에게 남겨준 관희지는 떠났다. 그렇게 총총히 떠났다. 마치 무지개처럼 비록 아주 짧지만 비교할수 없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영웅의 마지막 장거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한테서 발생한 많은 용감한 순간들을 떠오르게 했다.
바로 사고 발생 전날 《7월 29일, 6명의 지방 구조인원들이 강에서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관희지는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선을 타고 갇힌 군중들을 구하기에 서둘러 나섰다. 바로 사고 발생 석달 반 전인 4월, 부대에서는 실탄투척훈련을 실시하였는데 한명의 신전사가 긴장한 나머지 수류탄을 참호곁에 던졌다. 곁에서 친히 투수를 보호하던 관희지는 쏜살같이 달려가 있는 힘을 다하여 연기나는 수류탄을 투척하고 신속히 어린 전사를 엎어뜨렸다. 거의 바로 동시에 수류탄이 폭발하고 관희지의 얼굴은 포연에 까맣게 되였다.
관희지는 떠났다. 당과 인민들이 그를 수요할 때 그는 조금도 주저 없이, 회한이 없이 돌진했다.
대렬의 선두에 용감히 서서 군인의 풍채를 보여주다
관희지의 찬란한 일생을 추억해보면 무릇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를 순수한 직업군인이라고 칭찬한다. 그의 사전에 전쟁터에서는 최고밖에 없고 사업과 학습에서도 응당 완벽하여 선두에 용감히 서야 한다고 적혀있다. 그는 전반 군인생애에서 모두 당대 군인의 《당에 충성하고 인민을 열애하며 국가에 보답하고 사명에 헌신하며 영예를 숭상》하는 핵심 가치관을 실행하기에 노력했다.
전사 시절 그는 주동적으로 부대훈련교수안의 편집에 참여하여 곧 전 퇀에서 명성높은 어린 교원으로 되였다. 군사학교의 신입생모집을 맞이하여 그는 한편으로는 사업하고 훈련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습을 견지하면서 때때로 새벽 한두시까지 공부했다. 피곤하면 다리를 꼬집고 고추를 먹으면서 온갖 피곤방지 방법을 다 써보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그후 그는 정말로 군사학교에 합격했다. 그 뒤 그는 대학보병학원에서 연수하였는데 단기 훈련학원중 유일한 중등전문학교 필업생이였고 수료심사에서 모든 본과필업생을 초과하여 첫 자리를 쟁취했다. 희생전 그는 이미 연구생공부를 하고있었다.
련장 시절 그가 이끄는 중대는 마침 공공사무, 잡일의 보장임무를 책임졌다. 뒤전에 서고싶지 않은 관희지는 자신의 중대를 《잡일》부대로 여기지 않았다.
그해, 그는 전 중대를 이끌고 정상사업임무를 완성하는 전제하에서 적극적으로 군사훈련을 조직했다. 훈련중 취사반의 한 전사가 물에 멀미하여 수영성적이 항상 표준에 이르지 못했다.
관희지는 날마다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그 전사를 데리고 표준에 이를 때가지 꾸준히 수영을 련습했다. 년말 전 퇀에서 조직 훈련한 무예겨루기에서 관희지가 이끈 중대의 많은 과목 성적이 전 중대의 성적을 초과했을뿐만 아니라 그중 체능과목은 전 퇀 첫자리를 차지했다.
이 몇년래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페품 수배소에서 부속품을 찾아 무기장비를 혁신하고 리비리아에 가서 국제평화유지임무를 집행했으며 그 기간 유엔 유조차전복사고를 과단적으로 처리하고 선후로 20여차례 군사연습, 중대군사활동에 참가, 조직했으며 그가 친히 가르친 《제자》는 집단군 백명 우수참모인원 무예겨루기에서 각각 10등과 11등의 우수한 성적을 따냈다...관희지의 당대 군인의 가치관과 명예심은 평화시대를 지키는가운데서 철저하고 빈틈없이 표달되였다.
관희지의 생전 딱친구인 군인 가정 출신 류송은 근년래 줄곧 현역군관 딱친구의 내심세계에 들어서려고 시도했다. 딱친구가 희생된 비보가 전해오자 류송은 눈물을 가득 흘리며 즉시 처자를 이끌고 100킬로메터밖의 주둔지에 달려가 조문했다. 류송은 다음과 같이 관희지를 평가했다. 《희지는 신시대 군인의 본보기답게 넓은 시야와 예민한 사유를 갖고있고 시종 다퉈 일류를 창조하는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기는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간고한 학습과 실천을 통해 자신의 군사기능과 종합자질을 제고하기에 노력했다. 우리가 같이 있을 때 다른 화제를 얘기하면 능숙하지 않지만 군사변혁, 선진전법을 얘기하면 즉시 정신이 들었다.》
3차례 영광스럽게 다섯가지 세우고 훈련기재혁신성과가 군구에 의해 과학기술진보 우수상을 획득했으며 선후로 《현대병종》, 《공정병학술》 등 군사간행물에 3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고 심양군구참모 업무무예겨루기에서 뛰여난 참모로 평가되였으며 유엔에서 《2급평화영예훈장》을 수여받고 2008년 《전군우수지휘관》의 특별한 영예를 획득했다...
하나하나의 학생필기, 한장한장의 수상증서, 한매한매의 종군기장들은 관희지의 인생발자취를 그대로 남김없이 보여줬다.
인품을 련마하여 장려한 인생을 쓰다
관희지는 흑룡강성 쌍성시에서 7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는 운이 나빴는데 7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당시 림시공이였던 자신이 그들을 고생스럽게 키웠다고 말했다. 가정의 막내로서 관희지는 어릴적부터 어머니의 몸에서 강건함과 강인함을 배웠다. 10살, 바로 어린애들이 부모와 어리광을 부리는 나이에 그는 이미 형님, 누나들을 따라 석탄덩어리를 주었다. 오후 하학하면 끓인 물 한주전자 혹은 작게 썬 수박을 들고 집과 멀지 않은 역전에 가져가 팔았고 조금 자란 후에는 여가시간을 리용하여 한 두부방에서 막일을 하였다. 그는 언제나 매번 벌어온 적은 용돈을 어머니에게 드려 생활비에 보태도록 했다. 비록 생활이 간고했지만 관희지는 시종 인생의 추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짠지를 반찬으로 하고 숙제책을 사지 못하면 면을 포장한 종이에 산수문제를 풀면서 고중수료를 견지했다.
1991년 고중을 졸업한 관희지는 참군을 선택했다. 떠나는 날 그는 형님과 누나들이 막내의 가방에 먹을것을 가득 넣어주는것을 모두 거절하고 물건을 담을 자리에 모두 책을 넣었다. 곧 출정할 때 관희지는 온 집안식구들과 친구들앞에서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련속 3번 절하면서 말했다. 《어머니, 근심하지 마세요! 부대에 가서 꼭 잘할것입니다!》
어려운 성장환경은 관희지의 의지품성과 고상한 심경을 련마했다. 몇년 후 관희지는 부대에서 간부로 발탁됐지만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한마디는 바로 《우리 집은 비록 가난하지만 사람의 의지는 가난해서는 안된다》였다. 몇년후 그는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고 직위는 부단히 승진하였지만 그가 겨울에 입는 평복은 여전히 그가 결혼할 때 장인이 선물한 일반 다운재킷이였다.
관희지의 76세 어머니 류사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들은 대효자다. 금방 입대했을 때 매달 보조금이 18원밖에 안됐지만 언제나 모았다가 집에 부쳤다. 10여일전 나한테 전화 와서 자신이 도울터이니 병보이는 돈을 아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뜻밖에 그것이 바로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였다니...》
관희지의 이미 전업한 지방의 전우 황신광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우리 전업한 전우들은 관희지에 대해 리해되지 않는 3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전우모임에 자주 참가하지 않고 인정이 적었으며 두번째는 집은 비록 단위와 10분의 거리밖에 안되지만 집에 자주 가지 않아 혈육간의 정이 적으며 세번째는 의식을 따지지 않고 생활에 능숙하지 못한것이다. 하지만 후에야 모두 희지는 정의가 있는 좋은 사람이라는것을 비로소 알았다. 다만 그는 전부의 정력을 모두 부대의 현대화건설에 쏟았을뿐이다.》
비록 안해가 일자리가 없고 쌍방가정의 경제부담이 모두 비교적 컸지만 그는 줄곧 청렴하고 공정했으며 강직했다. 한번은 친구가 그에게 《철로 만든 병영, 흐르는 물과 같은 병사로서 왜서 현재 있는 직권으로 활동하여 자신의 미래를 위해 좋은 조건을 마련하지 않는가》고 물었다. 친구의 관심에 그는 다만 대범하게 웃으면서 《나는 그리 멀리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눈앞의 사업을 어떻게 하면 잘할것인가만 고려했을뿐이다.》고 대답했다.
비록 자신의 생활에서 아주 절약하지만 매번 전우가 곤난에 부딪쳤을 때는 언제나 린색하지 않고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었다. 입대한 19년래 그는 선후로 20여명의 곤난한 전우를 경제적으로 도운것이 루계로 5만여원에 달하여 주변의 전우들은 그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불렀다.
그는 그의 《큰 가정》과 《작은 가정》을 깊게 사랑한다. 년로한 장인, 장모가 몸이 허약하여 병이 많기에 처가집에 큰 일, 작은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관리》인 사위가 바삐 뛰여다닌다. 6살의 딸은 그들 부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국제평화유지임무 집행시에로 딸의 귀여운 사진은 언제나 그의 컴퓨터 바탕화면을 점했다. 8월 2일 안해는 딸을 데리고 북경에 가서 이야기왕웅변대회에 참석하려고 이미 기차표도 사놓았다. 근데...
《국가를 보위하고 어깨에 신성한 사병을 짊어지다》, 《홍수를 방지하고 위험을 제거하며 열정으로 충성을 주조하다》이는 관희지렬사에 드리는 사람들의 애도의 주련련이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의 인생에 대한 진정한 묘사이다. 일전 국무원과 중앙군위 지도자들은 홍수방지 위험제거 제일선에서 전투하고있는 광범한 군중들로 하여금 관희지동지를 따라배우도록 호소하고 심양군구 모 집단군 정치부에서는 그를 혁명렬사로 비준했으며 성당위, 성정부에서는 그에게 《홍수방지위험제거용사》의 명예칭호를 추가로수여했다.
홍수는 정원을 휩쓸어버렸지만 영웅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재해는 백성들로 하여금 아주 힘든 환경에 처하게 하였지만 영웅의 정신은 영생불멸할것이다.
어머니는 그를 잊을수 없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 그 광경은 매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관희지의 어머니는 사람들의 부축에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신변의 사람들을 위안하며 《난 괜찮다. 이겨낼수 있다.》고 말했다. 작별홀에 들어서자 로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아들의 시체에 달려가 마음이 찢어지도록 울면서 소리쳤다. 《어머니가 너 보러 왔다!》
인민들은 그를 잊을수 없다. 렬사의 령구차가 길림시에 돌아온 그날 밤 수백대의 택시들이 자발적으로 연선에 달려가 영웅을 맞이했다. 추도회 당일 수천명의 강성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렬사를 송별하였는데 줄지은 차량은 3, 4킬로메터에 달하고 지나가던 차들도 멈춰 영웅을 향해 기적을 울리며 경의를 표했으며 인터넷에는 관희지 게시판이 등장했다. 많은 네티즌들이 메시지를 남겼다. 한 군인은 관희지를 《진정한 사내》라고 불렀고 한 네티즌은 이렇게 적었다. 《수재군중들을 구하기 위하여 해방군은 생명도 바쳤다하다면 우리 또한 무엇이 아깝겠는가? 우리 모두 전력으로 기부하여 수재군중들을 도와 난관을 극복하자.》
전우들은 그를 잊을수 없다. 그 당시 모터보트에서 참모장이 희생되는것을 목격한 전사 선국흠은 8월 3일 저녁에 열린 길림시홍수방지위험제거리재민구조야회현장에 초청되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존경하는 참모장을 향해 소리쳤다. 《참모장님, 우리는 영원히 당신 수하의 병사들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못다한 사명을 계속 완성하여 수재인민들을 구제할것입니다. 당과 인민들은 우리를 믿으십시오! 참모장님, 부디 잘 가십시오!》
길신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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