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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투쟁사의 큰 “별”- 리홍광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9월12일 11시32분    조회:18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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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항일투쟁사의 큰 “별”- 리홍광

 김혁 정리


 약관의 나이에 항일에 투신해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조선족항일장령 리홍광 렬사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일전 리홍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가 심양에서 열려 학술회의에 전국정협 조남기 전 부주석,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 전 주임등이 제자를 보내왔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학자들이 리홍광 및 조선족의 항일투쟁사를 재조명하는 론문 발표하는 등 그 추모와 연구가 뜨겁다.

본지는 몇회에 나누어 리홍광의 일생을 조명,  양정우, 조상지등과 더불어 동북항일투쟁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걸출한 항일장령을 추모하고저 한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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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한 리홍광 관련 전기물



리홍광은 1910년 조선 경기도 용인군에서 빈농 리보경의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리홍해(李弘海)였으며 리홍규(李弘奎), 리의산(李义山) 등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홍광”이라는 이름을 쓰게것은 후일 항일운동에 투신하면서부터였다.
빈한한 가정이였지만 조부 리상준은 학식을 갖춘 분이여서 리홍광의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부모를 도와 힘겨운 농사일을 하는 한편 할아버지로부터 한문과 경서 등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의병투쟁이야기와 리순신장군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리홍광이 10세때에 매우 쪼들리는 생활형편에서도 부친 리보경은 가문의 맏아들인 그를 보통학교로 보냈다. 하지만 리홍광은 학교를 1년밖에 다니지 못하고말았다. 학교에서 일본 경찰관의 아들이 조선인 아이를 때리는것을 보고 격분하여 그 일본 학생을 때려눕힌것이다. 결과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학부모인 그의 아버지도 1주일 구류당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풀려났지만 그후로 리홍광의 가정은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되였다.

리홍광이 9살되던 해에 일본제국주의의 노역과 억압에 더는 참을수 없어 그의 부모는 온 가족을 데리고 중국 길림일대로 이주하여 1926년 길림성 이통현 류사취자툰에 정착하였다. 일제의 억압과 어려운 생활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주였지만 이곳의 생활 역시 낫지는 않았다. 길림성 반석현(磐石縣) 일대는 중남부 지방 출신 조선인농민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는데 인들은 연변지역과는 달리 중국 국적이 없으면 전혀 토지소유를 할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중국인 지주나 귀화 조선인 지주밑에서 소작농으로 봉건적 수탈을 받으며 굴욕적인 삶을 살고있었다.

더구나 당시는 중국동북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장작림(張作霖) 군벌정권이 조선인들에 대한 박해정책을 시행하고 있던때여서 그 어려움은 더욱 컸다. 리홍광 은 이처럼 일찍부터 일제의 탄압과 수탈, 그리고 부패한 군벌정권의 박해와 지주, 소작관계의 모순에서 초래된 고통 체험으로 인해 리홍광은 점차 일본침략에 반항하고 번신과 해방을 추구하려는 신념을 수립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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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홍광 의 활동은 만 17세 되던 1927년부터 시작됐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영향력아래 있던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해 농민운동에 동참한것이다. 그는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 사상서적을 탐독하고 대중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중국어를 습득해 항일무장투쟁의 밑바탕을 쌓아갔다.
그는 반일회와 농민회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조직하고 농민들의 “추수투쟁”에도 적극 가담하여 20대 초반의 어린나이에 벌써 력량있는 활동가로 지목됐다.
1930년 3월, 리홍광은 이통현 삼도구에서 로농적위대를 세우고 대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1931년 7월 대원 7명으로 구성된 적위대를 꾸려 대장이 되고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을 이끌게 된다. 적위대의 별칭은 “타구대(打狗队)” 즉 “친일파(개)를 때려잡는다”는 뜻이였다. “타구대”는 친일분자를 견결히 타격하고 악패지주를 엄벌하여 군중들의 옹호와 환영을 받았다. 이 조직은 조선인 밀정 및 만주국 관헌, 일본 군경 등을 대상으로 투쟁하는 조직으로 남만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첫 무장조직으로 기록돼 있다. 그후 낡은 양포(洋炮) 2문과 두발배기 총 한자루밖에 없던 “타구대”는 남만 최초의 항일유격대인 반석유격대로 발전하게되였다. 이 한점의 불꽃은 남만의 광활한 대지우에 거세찬 항일의 불길을 지펴놓았다.
리홍광은 적극적으로 진보활동에 참가하여 곧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 되였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8월, 중공만주성위는 군중항일투쟁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반석중심현위를 건립하고 중심현위가 령도하는 “쌍양이통특별지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특별지부 조직위원을 담임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반석중심현위 위원으로 조동되여 반석적색유격대 대장을 담임하였다. 같은해 4월, 그는 반석”4.3”반일폭동을 친히 조직하고 령도하였다.
1932년 6월,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동북 첫 항일무장- 만주공농반일의용군 제1군 4종대가 반석지역에서 성립되였다. 리홍광은 대부(队部)에서 사업하며 종대를 이끌었다. 그후 의용군은 중국공농홍군 제32남만유격대로 개칭되였으며 양정우가 대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교도대 정위를 담임하였다. 1933년 9월, 남만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로 개편되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군참모장 겸 제1사 사장을 담임하였다.
지극히 간거한 조건하에서 리홍광과 양정우 등 공산당원들이 령도하는 동북인민항일무장은 동북지역에서 투쟁을 견지하여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의 항일투쟁사적은 눈부셨다. 그의 신출귀몰하고 배포 큰 “기만전술”은 동북 항일투쟁사의 장쾌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1934년 봄 리홍광 은 양징위와 함께 2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류하(柳河)현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2천여명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였다. 리홍광은 침착하게 예전에 탈취한 일본군복을 부하들에게 입혔다. 마치 새롭게 보충된 일본군 부대로 속이고 극적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일본군 부대와 교차하는 순간에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2개 소대를 섬멸했다. 이어 식품과 탄약을 싣고 가던 일본군 차량을 세운 뒤 “왜 이리 보급이 늦냐”고 호통을 친 뒤 군수품을 가로채기도 했다.
리홍광의 두드러진 활약중의 하나는 평안북도 진공작전이다. 그동안 반석 남부와 압록강 상류 건너편 일대에서 일제와 투쟁하고 있던 리홍광은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에서까지 승전고를 울렸다. 이곳이 일제 국경경비 및 만주 침략의 거점이 되는 군사요충지였던것이다. 1934년 12월과 1935년 1월 리홍광 은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 하성읍과 동흥성을 습격했다. 압록강국경지대의 “금성철벽”으로 불리던 동흥성은 리홍광부대에 의해 무너졌다. 몇십명의 수비대와 경찰대를 소멸했고 한간주구 10여명을 생포 군수품창고의 탄약, 피복, 식량을 로획하였다.
작전이 얼마나 신출귀몰했던지 당시 신문들은 “리홍광은 녀장군”이라는 오보를 냈고 항간에서도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생포한 일본군과 그 주구들을 심문하던 20대 초반의 녀간부가 일본군 주구를 조롱하며 일부러 “내가 리홍광 ”이라고 했던데서 나온 일화다.
이 사건은 당시 중국 동북에서 발행되는 “대동보”, 조선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며칠간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리홍광 의 활동은 만 17세 되던 1927년부터 시작됐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영향력아래 있던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해 농민운동에 동참한것이다. 그는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 사상서적을 탐독하고 대중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중국어를 습득해 항일무장투쟁의 밑바탕을 쌓아갔다. 그는 반일회와 농민회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조직하고 농민들의 “추수투쟁”에도 적극 가담하여 20대 초반의 어린나이에 벌써 력량있는 활동가로 지목됐다. 1930년 3월, 리홍광은 이통현 삼도구에서 로농적위대를 세우고 대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1931년 7월 대원 7명으로 구성된 적위대를 꾸려 대장이 되고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을 이끌게 된다. 적위대의 별칭은 “타구대(打狗队)” 즉 “친일파(개)를 때려잡는다”는 뜻이였다. “타구대”는 친일분자를 견결히 타격하고 악패지주를 엄벌하여 군중들의 옹호와 환영을 받았다. 이 조직은 조선인 밀정 및 만주국 관헌, 일본 군경 등을 대상으로 투쟁하는 조직으로 남만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첫 무장조직으로 기록돼 있다. 그후 낡은 양포(洋炮) 2문과 두발배기 총 한자루밖에 없던 “타구대”는 남만 최초의 항일유격대인 반석유격대로 발전하게되였다. 이 한점의 불꽃은 남만의 광활한 대지우에 거세찬 항일의 불길을 지펴놓았다. 리홍광은 적극적으로 진보활동에 참가하여 곧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 되였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8월, 중공만주성위는 군중항일투쟁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반석중심현위를 건립하고 중심현위가 령도하는 “쌍양이통특별지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특별지부 조직위원을 담임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반석중심현위 위원으로 조동되여 반석적색유격대 대장을 담임하였다. 같은해 4월, 그는 반석”4.3”반일폭동을 친히 조직하고 령도하였다. 1932년 6월,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동북 첫 항일무장- 만주공농반일의용군 제1군 4종대가 반석지역에서 성립되였다. 리홍광은 대부(队部)에서 사업하며 종대를 이끌었다. 그후 의용군은 중국공농홍군 제32남만유격대로 개칭되였으며 양정우가 대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교도대 정위를 담임하였다. 1933년 9월, 남만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로 개편되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군참모장 겸 제1사 사장을 담임하였다. 지극히 간거한 조건하에서 리홍광과 양정우 등 공산당원들이 령도하는 동북인민항일무장은 동북지역에서 투쟁을 견지하여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그의 항일투쟁사적은 눈부셨다. 그의 신출귀몰하고 배포 큰 “기만전술”은 동북 항일투쟁사의 장쾌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1934년 봄 리홍광 은 양징위와 함께 2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류하(柳河)현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2천여명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였다. 리홍광은 침착하게 예전에 탈취한 일본군복을 부하들에게 입혔다. 마치 새롭게 보충된 일본군 부대로 속이고 극적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일본군 부대와 교차하는 순간에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2개 소대를 섬멸했다. 이어 식품과 탄약을 싣고 가던 일본군 차량을 세운 뒤 “왜 이리 보급이 늦냐”고 호통을 친 뒤 군수품을 가로채기도 했다. 리홍광의 두드러진 활약중의 하나는 평안북도 진공작전이다. 그동안 반석 남부와 압록강 상류 건너편 일대에서 일제와 투쟁하고 있던 리홍광은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에서까지 승전고를 울렸다. 이곳이 일제 국경경비 및 만주 침략의 거점이 되는 군사요충지였던것이다. 1934년 12월과 1935년 1월 리홍광 은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 하성읍과 동흥성을 습격했다. 압록강국경지대의 “금성철벽”으로 불리던 동흥성은 리홍광부대에 의해 무너졌다. 몇십명의 수비대와 경찰대를 소멸했고 한간주구 10여명을 생포 군수품창고의 탄약, 피복, 식량을 로획하였다. 작전이 얼마나 신출귀몰했던지 당시 신문들은 “리홍광은 녀장군”이라는 오보를 냈고 항간에서도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생포한 일본군과 그 주구들을 심문하던 20대 초반의 녀간부가 일본군 주구를 조롱하며 일부러 “내가 리홍광 ”이라고 했던데서 나온 일화다. 이 사건은 당시 중국 동북에서 발행되는 “대동보”, 조선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며칠간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리홍광 의 활동은 만 17세 되던 1927년부터 시작됐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영향력아래 있던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해 농민운동에 동참한것이다. 그는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 사상서적을 탐독하고 대중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중국어를 습득해 항일무장투쟁의 밑바탕을 쌓아갔다. 그는 반일회와 농민회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조직하고 농민들의 “추수투쟁”에도 적극 가담하여 20대 초반의 어린나이에 벌써 력량있는 활동가로 지목됐다. 1930년 3월, 리홍광은 이통현 삼도구에서 로농적위대를 세우고 대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1931년 7월 대원 7명으로 구성된 적위대를 꾸려 대장이 되고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을 이끌게 된다. 적위대의 별칭은 “타구대(打狗队)” 즉 “친일파(개)를 때려잡는다”는 뜻이였다. “타구대”는 친일분자를 견결히 타격하고 악패지주를 엄벌하여 군중들의 옹호와 환영을 받았다. 이 조직은 조선인 밀정 및 만주국 관헌, 일본 군경 등을 대상으로 투쟁하는 조직으로 남만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첫 무장조직으로 기록돼 있다. 그후 낡은 양포(洋炮) 2문과 두발배기 총 한자루밖에 없던 “타구대”는 남만 최초의 항일유격대인 반석유격대로 발전하게되였다. 이 한점의 불꽃은 남만의 광활한 대지우에 거세찬 항일의 불길을 지펴놓았다. 리홍광은 적극적으로 진보활동에 참가하여 곧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 되였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8월, 중공만주성위는 군중항일투쟁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반석중심현위를 건립하고 중심현위가 령도하는 “쌍양이통특별지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특별지부 조직위원을 담임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반석중심현위 위원으로 조동되여 반석적색유격대 대장을 담임하였다. 같은해 4월, 그는 반석”4.3”반일폭동을 친히 조직하고 령도하였다. 1932년 6월,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동북 첫 항일무장- 만주공농반일의용군 제1군 4종대가 반석지역에서 성립되였다. 리홍광은 대부(队部)에서 사업하며 종대를 이끌었다. 그후 의용군은 중국공농홍군 제32남만유격대로 개칭되였으며 양정우가 대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교도대 정위를 담임하였다. 1933년 9월, 남만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로 개편되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군참모장 겸 제1사 사장을 담임하였다. 지극히 간거한 조건하에서 리홍광과 양정우 등 공산당원들이 령도하는 동북인민항일무장은 동북지역에서 투쟁을 견지하여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그의 항일투쟁사적은 눈부셨다. 그의 신출귀몰하고 배포 큰 “기만전술”은 동북 항일투쟁사의 장쾌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1934년 봄 리홍광 은 양징위와 함께 2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류하(柳河)현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2천여명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였다. 리홍광은 침착하게 예전에 탈취한 일본군복을 부하들에게 입혔다. 마치 새롭게 보충된 일본군 부대로 속이고 극적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일본군 부대와 교차하는 순간에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2개 소대를 섬멸했다. 이어 식품과 탄약을 싣고 가던 일본군 차량을 세운 뒤 “왜 이리 보급이 늦냐”고 호통을 친 뒤 군수품을 가로채기도 했다. 리홍광의 두드러진 활약중의 하나는 평안북도 진공작전이다. 그동안 반석 남부와 압록강 상류 건너편 일대에서 일제와 투쟁하고 있던 리홍광은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에서까지 승전고를 울렸다. 이곳이 일제 국경경비 및 만주 침략의 거점이 되는 군사요충지였던것이다. 1934년 12월과 1935년 1월 리홍광 은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 하성읍과 동흥성을 습격했다. 압록강국경지대의 “금성철벽”으로 불리던 동흥성은 리홍광부대에 의해 무너졌다. 몇십명의 수비대와 경찰대를 소멸했고 한간주구 10여명을 생포 군수품창고의 탄약, 피복, 식량을 로획하였다. 작전이 얼마나 신출귀몰했던지 당시 신문들은 “리홍광은 녀장군”이라는 오보를 냈고 항간에서도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생포한 일본군과 그 주구들을 심문하던 20대 초반의 녀간부가 일본군 주구를 조롱하며 일부러 “내가 리홍광 ”이라고 했던데서 나온 일화다. 이 사건은 당시 중국 동북에서 발행되는 “대동보”, 조선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며칠간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리홍광 의 활동은 만 17세 되던 1927년부터 시작됐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영향력아래 있던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해 농민운동에 동참한것이다. 그는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 사상서적을 탐독하고 대중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중국어를 습득해 항일무장투쟁의 밑바탕을 쌓아갔다. 그는 반일회와 농민회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조직하고 농민들의 “추수투쟁”에도 적극 가담하여 20대 초반의 어린나이에 벌써 력량있는 활동가로 지목됐다. 1930년 3월, 리홍광은 이통현 삼도구에서 로농적위대를 세우고 대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1931년 7월 대원 7명으로 구성된 적위대를 꾸려 대장이 되고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을 이끌게 된다. 적위대의 별칭은 “타구대(打狗队)” 즉 “친일파(개)를 때려잡는다”는 뜻이였다. “타구대”는 친일분자를 견결히 타격하고 악패지주를 엄벌하여 군중들의 옹호와 환영을 받았다. 이 조직은 조선인 밀정 및 만주국 관헌, 일본 군경 등을 대상으로 투쟁하는 조직으로 남만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첫 무장조직으로 기록돼 있다. 그후 낡은 양포(洋炮) 2문과 두발배기 총 한자루밖에 없던 “타구대”는 남만 최초의 항일유격대인 반석유격대로 발전하게되였다. 이 한점의 불꽃은 남만의 광활한 대지우에 거세찬 항일의 불길을 지펴놓았다. 리홍광은 적극적으로 진보활동에 참가하여 곧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 되였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8월, 중공만주성위는 군중항일투쟁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반석중심현위를 건립하고 중심현위가 령도하는 “쌍양이통특별지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특별지부 조직위원을 담임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반석중심현위 위원으로 조동되여 반석적색유격대 대장을 담임하였다. 같은해 4월, 그는 반석”4.3”반일폭동을 친히 조직하고 령도하였다. 1932년 6월,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동북 첫 항일무장- 만주공농반일의용군 제1군 4종대가 반석지역에서 성립되였다. 리홍광은 대부(队部)에서 사업하며 종대를 이끌었다. 그후 의용군은 중국공농홍군 제32남만유격대로 개칭되였으며 양정우가 대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교도대 정위를 담임하였다. 1933년 9월, 남만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로 개편되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군참모장 겸 제1사 사장을 담임하였다. 지극히 간거한 조건하에서 리홍광과 양정우 등 공산당원들이 령도하는 동북인민항일무장은 동북지역에서 투쟁을 견지하여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그의 항일투쟁사적은 눈부셨다. 그의 신출귀몰하고 배포 큰 “기만전술”은 동북 항일투쟁사의 장쾌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1934년 봄 리홍광 은 양징위와 함께 2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류하(柳河)현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2천여명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였다. 리홍광은 침착하게 예전에 탈취한 일본군복을 부하들에게 입혔다. 마치 새롭게 보충된 일본군 부대로 속이고 극적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일본군 부대와 교차하는 순간에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2개 소대를 섬멸했다. 이어 식품과 탄약을 싣고 가던 일본군 차량을 세운 뒤 “왜 이리 보급이 늦냐”고 호통을 친 뒤 군수품을 가로채기도 했다. 리홍광의 두드러진 활약중의 하나는 평안북도 진공작전이다. 그동안 반석 남부와 압록강 상류 건너편 일대에서 일제와 투쟁하고 있던 리홍광은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에서까지 승전고를 울렸다. 이곳이 일제 국경경비 및 만주 침략의 거점이 되는 군사요충지였던것이다. 1934년 12월과 1935년 1월 리홍광 은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 하성읍과 동흥성을 습격했다. 압록강국경지대의 “금성철벽”으로 불리던 동흥성은 리홍광부대에 의해 무너졌다. 몇십명의 수비대와 경찰대를 소멸했고 한간주구 10여명을 생포 군수품창고의 탄약, 피복, 식량을 로획하였다. 작전이 얼마나 신출귀몰했던지 당시 신문들은 “리홍광은 녀장군”이라는 오보를 냈고 항간에서도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생포한 일본군과 그 주구들을 심문하던 20대 초반의 녀간부가 일본군 주구를 조롱하며 일부러 “내가 리홍광 ”이라고 했던데서 나온 일화다. 이 사건은 당시 중국 동북에서 발행되는 “대동보”, 조선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며칠간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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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5월 리홍광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재소를 습격해 80여필의 말을 로획했다. 싸움을 마치고 남만의 신빈현과 환인현의 경계지점인 로령(老嶺)을 지나다가 200여명의 일만군 (日滿军) 련합부대와 조우했다. 적아쌍방이 모두 불리한 지형으로 인해 사전에 서로 발견하지 못한데서 쌍방의 거리는 불과 30보남짓, 그야말로 지척에서 만나게 되였다. 뜻밖에 벌어진 조우전은 그지없이 가렬하였다. 적들을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미친듯이 사격을 가했다. 격전은 세시간 넘어 지속되였다. 흉악하게 달려드는 적들앞에서 침착하게  전투를 지휘하던 리홍광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총탄에 격중된것이다. 왜놈들이 격퇴된후 중상을 입은 리홍광은 환인현부근의 항일군 밀영으로 후송되였다. 더없이 간거한 시기였기에 밀영에는 구급시설이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구급약이라야 행경나무껍질과 약담배로 만든 “황납고”밖에 없었다. 흉부의 관통상에 “황납고”를 붙이며 구해내려 했지만 상처가 과중해 리홍광은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리홍광이 희생된후 전우들은 그의 유해를 비밀리에 대청골의 큰 호두나무밑에 안장하였다. 이 나젊은 수령을 기념하기 위해 “동북항일련군제1로군 군가”의 가사에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넣었다.
우리의 하늘에 높이 걸려서
승리의 군기를 비춰주는 홍광
돌격하라! 우리의 제1로군!
약관의 나이에도 용맹무쌍하게 싸우 일제침략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리홍광의 업적은 사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37년 7월 10일 빠리에서 출판된 한문판 “구국시보” 20호는 “동북항일련합군 제1사 사장 리홍광렬사는 동북항일련합군에서 가장 성망이 높은 수령의 한 사람이다”고 격찬했다.
모택동 주석은 “중국공산당과 동북삼성의 항일의용군은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있다. 양정우, 조상지, 리홍광 등동지들의 간거한 환경속에서도 결결히 항일한 업적은 누구나 다 아는바이다.”고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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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녕 신빈에 건립된 리홍광렬사의 동상.

리홍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남만지구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리홍광지대를 창립하였다. 그후 리홍광지대는 해방전쟁터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다.  
현재 남만주 일대에는 그의 짧지만 의미있는 생애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즐비하다.이름이 홍광중학교이고 학교 정면에는 “항일 민족영웅 리홍광  장군”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988년 리홍광장군을 기념하고저 김림성 반석시의 조선족중학교는 학교이름을 홍광중학교로 명명하였다. 당시 전국인대상무위원회 위원장이였던 팽진동지가 친필로 “항일민족영웅 리홍광장군”, “홍광중학”이란 제자를 써주었다.
이통현과 신빈현등지에도 리홍광의 기념비와 흉상이 있다.


참고문헌: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3부/민족출판사
중국조선족인물전/연변인민출판사
리홍광의 이야기/료녕인민출판사
불멸의 투사/민족출판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종합신문” 2010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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