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조선민족의 정초자- 주덕해 (2)
김 혁 (소설가, 위인전기 “주덕해의 이야기”의 저자)
야학선생을 따라 혁명에 투신하다
주덕해의 고향마을 수동촌은 룡정에서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으로 가는 길 대목에 위치한 곳에 있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늘 출몰하던 고장이였다. 야학에 다니면서부터 기섭은 점차 시골청년의 몽매한 의식에서 깨여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근심하는 마음으로 여러문제들을 깊이 사색하게 되었다. 그후 민족독립운동이 공산당의 항일혁명운동으로 변화되면서 그는 독립운동가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하게 되였다.
주덕해의 계몽스승- 김광진
주덕해의 야학선생 김근(金根,1903-1937)은 1903년 1월 조선 함경북도 경홍군 웅기읍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김광진이였는데1908년초에 중국 길림성 화룡현 상천평에 이주하여 왔다. 화룡시 광제욕소학교에 입학하였고 길림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5월에 남경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923년에 가정이 곤난하여 공부를 그만두고 개산툰 상천평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맑스-레닌주의를 접수하고 청년동맹 등 혁명단체에 가입하여 점차 공산주의자로 육성되였다.
1926년에 그는 승지 부채골 공립 화룡현제14소학교로 전근하여 교장으로 사업하면서 야학을 꾸리고 순회강연대회를 조직하는 등 방법으로 광범한 청년들에게 역시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혁명대오를 묶어세웠다. 그의 이와 같은 활동에 의하여 주덕해등은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승지에서 소학교학생들을 중심으로 “동자단”을 조직하였고 그해 겨울에는 룡정에서 7명으로 이루어진 “철혈단”을 조직하였다. 이 철혈단은 첫째, 자금을 모으고 항일무장을 조직하여 둘째, 간첩과 주구를 청산하는것 등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직접 선전삐라를 인쇄하는 사업을 책임지고 하였다.
그리고 돈을 꾸어다 무기를 구입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30년 중공 길동국의 지시에 좇아 9월에 왕청 라자구에 가서 리춘근 등 동지들과 함께 군사위원회를 세웠다. 그리고 놈들의 무장을 탈취하여 10월에는 왕청유격대를 창건하였다.
“9.18”사변후에는 약 30명의 조선족청년들로 구성된 북만로농의용대를 조직하여 자신이 직접 대장직을 맡고 그들을 이끌어 악질적인 반동지주를 청산하는 등 항일구국사업을 하였다.
인물전기 "주덕해의 이야기"의 삽화 (그림: 신순칠)
1933년 일제는 화룡, 연길, 왕청, 훈춘 등 현의 일본군과 위만군 1천 4백여명을 동원하여 토벌을 감행하였다. 김근은 부대를 거느리고 이번 반포위토벌전에 참가, 자신의 탁월한 군사지휘능력을 발휘하여 그번 전투에서 적 200여명을 살상했다.
1934년까지 김근은 밀산항일유격대를 창건하였고 일본군과 위만군과의 여러차례 전투를 거쳐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34년 10월에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이 창건, 김근은 참모처처장 겸 2퇀 대리퇀장으로 임명되였다.
적들은 항일무장부대에 대한 봉쇄와 포위토벌에 혈안이 되였고 이리하여 김근의 머리에는 현상금 천원이 붙어 있었다.
1937년 10월 12일 아침, 김근은 일제의 사촉을 받은 한 반역자의 배반으로 화천현 7리라자산에서 살해되였다. 그때 그 나이가 34세였다.
(계속)
"문화시대" 2011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 http://khk6699.blog.me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