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왜 그처럼 축구를 즐겼을까?”하는 물음에 확답을 줄만한 문헌자료는 아직 찾지못했다. 필자는 중국조선족 축구발원지로 알려진 연변의 룡정시 덕신향의 축구역사를 쓰는 과정에 우리 민족이 축구를 즐겨하는 원인을 대충 알아 내였다.
일제치하의 지난세기를 돌이켜 보면 축구운동을 즐기고 경기가 활발이 펼쳐진 고장일수록 항일투쟁의 봉화가 세차게 타올랐다고 하는데 일리가 있는 얘기인듯 싶다. 연변에서 항일의 전적지나 다름없는 덕신향에서 축구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독립투사도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당시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항일투사들은 백성을 조직하여 전투승리와 기념일을 계기로 각이한 형식의 축구경기를 펼치었다. 또한 경기에서 우승을 하면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소나 돼지, 개를 잡아놓고 성대하게 경축하였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우리 민족의 축구는 끊임없이 발전하여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였다. '중형땅크', '분사식 비행기', '기계다리','쌕쌔기'등등의 별호가 얼마인지 모른다.
그중에 '명중포'라는 별호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 박익환이란 스타가 있었다.
지난해 9월말 필자는 박익환이 일찍 다녔던 서울의 연세대학 체육학부를 찾아 60여 년전 연세대학팀 선수로 활약했고, 당년의 만주(지금의 동북3성)와 조선반도, 그리고 일본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박익환에 대해 알아볼 의향을 털어 놓았다.
이틀후 학교박물관의 강희숙 연구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선생님이 부탁한 자료를 찾아냈습니다."
필자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사실 박익환 명장의 사진은 중국과 조선반도의 그 어느 신문과 간행물에도 실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박익환 명장의 문헌자료를 받아 쥐였다. 그리고 한국 '일간스포츠'신문사 편집국 이해준 축구팀장(축구부 주임)의 도움으로 30여년전 '한국일보'에서 박익환 축구명장을 연재한 문헌자료들도 찾아 내였다.
1918년 12월 출생한 박익환은 황해도 재녕 명신중학교와 광도현 오시흥문중학교(일본 히로시마)를 거쳐 1940년 4월 연전(연세대학)에 입학하였다. 박익환은 일찍 중학시절에 간도성(지금의 연변)팀의 선수로 활약하면서 명성을 떨치었다.
박익환은 덕신향 남양촌에 있는 부모님 뵈러 왔다가 소학교 주위에 있는 백양나무들을 겨냥하고 공을 날리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룡정대성중학교(지금의 룡정중학교) 운동장에서 숱한 관중들이 보는 가운데 문대를 겨냥하고 공을 날리는 묘기를 펼치었다. 문대에 튕겨 나온 공을 받아차며 문대 맞히기를 열번씩이나 하여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간도팀의 선수시절 박익환은 전 만주국 경기에 참가하여 번마다 팀에 우승의 영예를 안겨주는데 공신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중국 조선민족 축구문헌자료에 의하면 1937년 8월초 동양 축구대회에 출전할 '만주선수선발대회'가 신경(지금의 장춘시)남령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 대련, 길림, 간도, 신경, 삼강, 용강, 봉천(지금의 심양시), 하얼빈 등 팀과 치렬한 각축전을 펼쳐 간도팀은 모든 적수를 누르고 만주 축구계서 우러러보는 강호로 확인받았다.
그중 중앙방어수(하프)로 활약한 박익환의 축구기술은 만주 축구계서 으뜸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후에 박익환은 더 큰 뜻을 품고 축구무대를 찾아 조선으로 갔다.
조선에 나가 처음 선수로 활약했던 학교는 부전(고려대학)이었다. 그의 축구재주를 알게 된 연전(지금의 연세대학)에서 인츰 그를 스카우트하였다. 박익환은 돌파능력이 강하고 드리블이 좋은데다가 가동작이 민첩하고 문전슛이 준확하여 득점율이 높았다. 게다가 두 날개(공격수)에는 공을 자로 재듯 패스하여 수많은 축구팬들을 열광케 하였다.
당시 조선반도 강한 축구팀들로는 함흥팀, 평양팀, 경성(서울)팀, 연세대학, 고려대학팀 등이었다. 이런 팀가운데서 우승팀이 세계대회에 나갈수 있었다.
1940년 5월 2일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된 전 일본축구선수권 대회에서 박익환의 소속된 연세대학은 경성구락부(서울)을 6:0으로 압승하여 서울을 대표하여 조선예선 대회에 출전하게 되였다. 5월 18일에 개막된 제4회 조선축구선수권대회결전 일본 축구선수파견선발전에서 강팀인 평양팀을 3:2로 격퇴하고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는 함흥팀을 1:0 으로 눌러 패권을 잡았다.
우승한 연세대팀은 조선을 대표하여 5월 24일 일본에서 열린 제6회 전 일본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와세다대학팀과 각축을 벌였다. 와세다대학팀은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맹장들을 주축으로 일본에서 최강을 자랑하였다.
일본은 으례 '원정팀'을 패배시킬 목적으로 부정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연세대팀과도 예외가 아니였다. 하지만 허리 (하프)가 든든한 연세팀은 1골을 올려 크게 우세였다. 후반에 들어와서 일본심판의 도를 넘은 행위가 시작했다. 어처구니 없는 업사이드를 수차 묵과하여 두골을 넣게 함으로써 연세대팀이 패하고 말았다.
박익환을 비롯한 선수들은 억울한 분위기에서도 패하기 전 동북대학팀을 6:0으로, 관서대학팀을 또 3:0으로 격파했던 것이다.
'한국일보'는 1979년 5월 12일자에 "당대에서 가장 뛰여난 하프를 고르자면 연전팀의 박익환이다. 모든 경기에서 허리구실을 잘하는 박익환 팀은 가장 기대를 모았다."고 기사화했다.
중국 조선민족 체육사에서도 "만주의 축구계는 명장들이 매우 많았다.그 때의 중앙방어수에서 가장 뛰여난 선수를 고르자면 박익환을 꼽을수 있다"고 적었다.
1978년과 1979년 '한국일보'는 "박익환은 간도에서 어렵게 자랐으나 몸이 건장하였다. 남달리 운동신경이 발달하여 기린아적 존재로 중학시절에 이미 만주와 조선반도, 그리고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고 적었다.
신문은 또 "박익환은 뜻밖의 사고로 가 버렸으니 연세대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계의 큰 손실이었다"라고 적었다.
축구명장 박익환은 어떻게 되어 저 세상 사람으로 되었는가? 박익환의 돌연사망에 대해 당시 조선반도와 전 만주에 같지 않은 설이 돌았다.
수년간 노력을 들여 출판한 우리 민족의 체육사에는 병사로 기재되었다. 실은 모두 사실과 달랐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69년전 연세대학 박익환의 학적부를 찾아보았다. 학적부에는 '교내수영장에서 물 사고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1942년 7월 6일 박익환은 선수들과 함께 학교수영장에 갔다. 박익환이 좀 늦게 나오자 장기량 골 키퍼가 "왜 늦었어?' 하면서 그를 수영장에 밀어 넣었다. 헤염을 모르는 익환이는 옷을 입은채 허우적거리었다. 선수들은 그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한참후 다시 보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박익환의 죽음은 그와 절친한 사이었던 골 키퍼 장기량의 경솔한 탓이었다. 연세대학에서는 축구영웅 박익환의 죽음을 슬퍼하여 학교장(葬)을 지내었고 대학교 본관뒤 뒤동산에 유해를 매장하였다.
우리 민족의 축구영웅 박익환은 앞날이 창창한 24세 어린 나이에 이렇게 생을 마쳤다. 그가 고인이 된지 이미 69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찍 만주의 넓은 땅과 조선반도의 그라운드를 누비며 쌓은 박익환의 업적은 우리 민족의 축구사에 영원히 남아 있을것이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