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원 매하구시 제지공장에 대한 연변의 기여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1월7일 09시47분    조회:1007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서춘원



원 매하구시제지공장 당위서기 서춘원로인

[길림신문 2011-11-05 리창근 기자] 매하구시에 거주하는 올해 81세나는 서춘원로인은 지난세기 60년대 연변 국영석현제지공장의 기관당총서기 겸 조직부 부부장으로 사업하였다.

1966년2월 중앙경공업부의 지방공업을 지원할데 관한 명령을 받고 매하구에 전근되여 와서 매하구시제지공업을 발전시키면서 매하구땅에서 한생을 늙어왔다.

 지난세기 연변의 많은 많은 대학생들이 산재지구의 조선족학교,병원,농업연구소에 배치되여 왔다.그들은 동북3성의 조선족교육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으며 의료사업발전과 농업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20세기 70년대까지 길림성산재지구의 각현 병원의 주치의사 대부분이 연변의학원 졸업생이였고 농업연구소의 기술골간들도 주로 연변농학원 졸업생들로 구성되여 있었다.조선족학교의 교편은 주로 연변사범과 연변대학 졸업생들이 잡고 새일대를 배양하고 있었다.하지만 공업건설에서 변강인 연변에서 내지의 건설을 지원했다는것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지고 있다.그들은 고향인 연변을 떠나 타지방에서 새중국 경제건설을 위하여 자신의 청춘을 바쳤으며 이제는 타지방에서 고향을 그리면서 늙어가고 있다.

연변을 떠나 매하구로

 1932년 한국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출생한 서춘원로인은 1939년에 길림성 서란현으로 이주하였다.1945년 겨울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1951년에 부상으로 제대되여 1953년부터 1961년 말까지 연변지질탐사대 분대장 겸 당지부서기로 사업하다가 1962년에 국영 석현제지공장 기관당총서기 겸 조직부 부부장으로 사업하였다.새중국 제1제지공장으로 불리우는 석현제지공장은 그때 중국 제지공업의 선두에 있었고 기술력량이 강하였으며 공인이 7000여명에 도달하였다.

1 966년 음력설을 앞두고 당시 중앙경공업부 제지국 국장인 량성공이 석현제지공장을 찾아 지방공장에서 인재를 수요하기에 국영기업인 석현제지공장에서 간부와 기술인원을 파견하여 지방제지공업을 지원할것을 요구하였다.서춘원로인의 말에 따르면 그때 석현제지공장에서 전국 각지로 파견된 간부가 20여명이고 기술공인이 200여명 되였다.그들은 새중국의 공업을 지원한다는 념원 하나로 불평 한마디없이 전국 각지의 제지공장으로 떠났다.광동성,복건성,호남성 등 전국 각지의 제지공장으로 석현제지공장의 간부와 기술인원들이 이불짐을 짊어지고 떠났는데 그들은 그곳 제지공업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대부분이 기술골간으로 되였다.

  서춘원로인은 매하구시(당시 해룡현)제지공장 당지부서기로 발령이 내려졌는데 음력설을 석현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3일이 지나 이불짐을 메고 매하구로 향하는 렬차에 올랐다. 가족들은 잠시 석현에 남겨둔채 홀로 매하구로 떠나왔다.서춘원로인은 지금도 그때 매하구 도착날자 1966년2월7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방국영기업의 골간기업으로 성장시켜

  매하구제지공장에 도착하니 아직 간부교체가 되지않아 원래의 당서기와 3개월간 함께 사업해야하는 불편이 있었다.그때는 공장에서 당서기가 1인자여서 모든 업무를 획책해야 하는데 서기가 두 사람이니 사업하기에 매우 불편하기도 하였다.

  매하구제지공은 공인이 300여명밖에 되지않아 석현제지공장의 한개 차간보다 작았으며 제품은 주로 포장지를 생산하는데 질이 차하고 생산량이 높지 못하였다.제품의 질을 높이고 기술력량을 가강하기 위하여 서춘원은 여러가지 방도를 대였다.

  제지공업이 발전한 연변에서 기술인원을 데려오기 위하여 서춘원은 1968년에 연변개산툰제지공장을 찾았다.기술인원들을 찾아 매하구제지공장에 올것을 요구하니 조건이 렬악한 매하구제지공장으로 오려는 사람이 없었다.서춘원은 지방공업을 지원하는것은 현시대 로동자의 사명이라면서 기술공인들을 입이 닳도록 설득한 결과 80여명의 기술로동자를 모집할수 있었다.이가운데는 조선족이 23명이 있었다.8급공 4명,7급공 3명,6급공 11명을 모집하였는데 매하구제지공장의 기술력량은 연변출신들이 차지하게 되였고 주요 기술부문은 연변출신의 조선족이 장악하에 되였다.

  기술장비를 개선하기 위하여 서춘원은 전국 각지의 제지공장과 중앙경공부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였다.석현제지공장,개산툰제지공장,호남악양제지공장,광주의 제지공장을 찾아 설비지원을 받았고 그들이 버린 낡은 기계를 헐값으로 사다가 기술개조를 하였다.

  몇해간의 간고한 노력을 거쳐 기술인원이 들어오고 장비를 개선하니 매하구제지공장은 1970년에 공인이 800여명에 도달하였고 리윤액은 원래의 50여만원에서 두배 증가되여108만원에 도달하여 매하구에서 리윤을 가장 많이 창출하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그때 매하구제지공장은 길림성지방국영제지공장가운데서 규모가 가장 큰 기업으로 되였으며 지방소형기업에서 국가의 중형기업으로 되였다.

  서춘원은 1966년에 먼저 매하구에 도착한후 반년후에 가족을 매하구로 데려왔으며 개산툰에서 모집한 기술공인들의 가족은 공인들과 함께 매하구로 이사하여 왔다.살림집이 없어 매하구 철북의 페교한 학교숙사자리에 가족들을 배치하였는데 연변의 제지공장에서는 주로 나무껍질을 때였지만 매하구에 오니 석탄과 벼짚을 때야하니 불을 땔줄 몰라 녀성들의 고생이 막심하였다.자녀들은 학교가 서거리에 있기에 매일 10여리 걸어서 학교에 가야했고 한족지구에 오다나니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 일상 생활에 불편이 많았다.석현과 개산툰에는 모두 로동자구락부가 있어 수시로 영화를 볼수 있었는데 매하구의 영화관은 서거리에 하나밖에 없어서 연변에서 이주해온 공인들과 그가족들이 영화를 한번 보려해도 매우 불편하여 문화생활의 결핍을 느기게 되였다.

  매하구제지공업과 매하구공업건설에 중대한 공헌을 기여한 서춘원은 1978년에 매하구시건설위원회 부주임으로 전근되여 사업하시다가 1983년5월에 리직휴양하여 지금 매하구시에 만년을 즐겁고 지내고 있다.연변에서 온 기술공인들도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되였거나 로인이 되였다.매하구제지공장은 지난세기 90년대초에 파산되여 지금은 공장자리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였다.하지만 그들이 그때 당시 낮설은 지방을 찾아 공업발전에 바친 기여는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으며 그들의 피땀으로 씌여진 창업사는 공화국의 공업발전사에 영원히 기록될것이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60
  •  칭다오신삼진공예품유한회사 전치국 사장   프로필   전치국 (38)   연변 안도현 출신   칭다오신삼진공예품유한회사 사장   중국 칭다오카스디아공무유한회사 사장   안도현 고향협회 회장   1996년 연변사범학교 졸업   1996년 7월-1997년 7월 안도현 송강6중 교원   1997년 7월부터 3년간 교주 모 한...
  • 2013-12-03
  • ㅡ심양정희명태한국식품도매부 안정희사장   24년전,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의 농사일을 거들던 시골소녀 안정희(1970년생)가 돈을 벌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19세 어린나이에 생소한 심양땅에 발을 들여놓고 눈물겨운 창업을 시작하여 인제는 자신의 식품가게를 갖고 야심차게 사업을 펼치고...
  • 2013-12-02
  •      “저는 훈춘을 황금통상구로 건설하는데 모든 정력과 열정을 몰부을것입니다.” 이는 온주에서 5만원의 창업자금을 들고 1992년, 훈춘에 와 창업에 뛰여든 훈춘대해실업유한회사 리사장 홍만탁의 좌우명이다. 창업초기 그는 조명기구를 판매하는 작은 상점을 경영하다가 성실, 신용을 토대로...
  • 2013-11-28
  • 연변화하상황균업유한회사 라동도대표의 창업성공기 아무리 봐도 그는 영낙없는 인테리모습이다. 훤칠한 키에 영준한 외모, 거기에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차분한 음성이며, 안경너머로 상대를 응시할줄 아는 지적인 눈길과 타인의 말을 경청할줄 아는 침묵마저도 분명히 무게있는 지성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학...
  • 2013-11-28
  •      2009년, 연변공업학교 자동차전업을 졸업한후 리학철씨(25세)는 고향에 돌아와 전문농장을 경영하면서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하고있다. “외국에 일하러 가든 외지로 일하러 가든 모두 돈을 벌기 위한것입니다. 사실 외지에 나가서도 돈을 벌수 있겠지만 돈을 버는 길은 꼭 한갈래 길만 있는것이...
  • 2013-11-26
  • 단동예지나무역회사 윤동일사장 넥타이는 맬줄 몰라도 한복고름 하나는 아주 멋지고 예쁘게 맨다며 우스개소리를 던지는 단동예지나무역회사 윤동일사장(69년 생), 하루종일 돌아가는 재봉틀소리에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한복사업에 600여평의 한복공장에 들어서니 윙윙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자극하고...
  • 2013-11-26
  • ㅡ료녕SK실업부동산개발유한회사 리사장 홍종국씨 “그룹에서 조선족인 저를 이렇게 인정해주고 밀어줄줄 몰랐습니다. 그 기대에 보답하고저 열심히 일하고있습니다.” 패기와 자신감에 벅차있는 홍종국씨(1963년생), 현재 그는 료녕 SK실업부동산유한회사 리사장, 단동SK물류유한회사 총경리를 맡고 단동지역의...
  • 2013-11-19
  • 문주호씨 장백조선족자치현 장백진 록강사회구역에 거주하고있는 문주호(45세)씨의 나무뿌리조각이 국내외에서 각광을 받고있다. 나무뿌리조각공예에 남다른 애착심을 갖고있었던 문주호씨는 20년전인 1992년부터 안해 안춘옥(45세)씨와 함께 부지런히 산과 골짜기를 넘나들며 모양이 각이한 여러가지 마른 나무뿌리를 주어...
  • 2013-11-19
  •  연길윈워터전기유한회사 총경리 박무일씨 창업스토리    연길윈워터전기유한회사 총경리 박무일씨는 20년 동안 순간온수기개발에 몰두하여 창업의 희열을 맛보고있는 창업인이다. 1982년 동북공학원(지금 동북대학) 주물전업을 졸업한 박무일씨는 주물에 남다른 흥취가 있었고 매사마다 끈기있게 달라붙었...
  • 2013-11-19
  •       전통산업의 재발굴과 문화식품 시대를 선도하다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 리동춘 사장 “21세기는 문화식품시대이다”라고 고취하는 사람이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의 리동춘 사장이다. 그는 우리민족의 전통식품인 된장과 전통술의 재발견을 통해 ‘오덕 장로주&rsqu...
  • 2013-11-15
‹처음  이전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