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에게 연화조선족향의 개척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삼철로인
장춘지구에는 조선족이 집거해 살고있는 유일한 조선족향인 연화(延和)조선족향이 있다. 력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연화향은 “연변밖의 작은 연변”이라고 불리울만큼 연변과 끈끈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얼마전 기자는 지난세기 70년대초부터 연화조선족향정부에서 사업해오면서 연화향의 력사에 대해 잘 알고있는 김삼철(74세)로인을 만나 세월의 모진 풍파속에 묻혀져있던 연화이야기들을 감명깊게 들었다.
연길, 화룡사람들이 개척한 연화벌
《연화라는 지명이름의 유래부터 얘기하자면 공화국창립이전인 1940년대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김삼철로인의 말이다.
김삼철로인에 따르면 연화는 지난세기 1948년 초봄, 연변의 연길현(룡정시)과 화룡현(화룡시)에서 자원적으로 조직된 조선족농민들의 이민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서 지명이름도 연길현과 화룡현의 첫자를 떼여 연화(延和)라고 지은것이였다.
해방직후인 1947년말, 유수현인민정부에서는 길림성정부에 당시 송화강상류 라림하강반의 무연한 벌판을 논으로 개간할데 대해 청구, 연변전원공서에 위탁하여 당시 논농사경험이 풍부한 연변지역에서 이민개척단을 모집하기로 하고 군중동원사업을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연길현의 장안, 마반산, 계동과 화룡현의 서성, 와룡, 토산,갑산 등 각지의 농민들이 이민개척단에 용약 자원해나섰다.
《기름진 땅에 집도 지어놓았고 뜨끈뜨끈한 온돌이 기다린다》는 당시의 개척지 선전은 땅이 적고 척박한 산간지대에서 살아가던 조선족농민들에게《벼농사 지어 이밥을 배불리 먹고 살수있게 되였다》는 화려한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렬악한 생활환경에도 억센 뿌리 내려
연변에서 당시 농민들이 개척지를 향해 떠나던 날은 1948년 2월 24일인데 이날 마침 정월 대보름날이였다. 개척지까지 이민들을 수송할 화물기차와 시간을 맞추다보니 방정맞게도 명절날인 정월대보름날에 길을 떠날수밖에 없게 되였다고 김로인은 해석했다.
당시 각지에서 모여온 743세대의 조선족농민들은 창문도 없는 붐비는 화물기차바곤에 앉아 연변을 떠났다. 야밤중에 기차가 흑룡강성 오상현 안가역전에 이르니 한족들이 모는 수백대의 말발구가 손님들을 맞았다. 거기에 짐을 싣고 100여리 길을 달려 새벽녘에 한 마을에 도착하였는데 정부에서 파견한 안내원들이 개척단을 마을의 한족집들에 배치하는것이였다. 손님은 많고 류숙할 집은 적으니 한집에 대여섯 가구씩 들어야 했다. 구들도 한족식이라 잠자리가 비좁아 봉당에 옥수수대와 조짚을 펴고 불편하게 잠자야 했다.
이미 집까지 지어놓았고 뜨끈뜨끈한 온돌이 기다린다더니 오기전의 선전과는 완전 딴판이였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당시 갓 세워진 지방정부에서는 재력과 인력도 부족하겠지만 개척은 서둘러야겠고 농사절기는 미룰수없지 …막부득이한 사정때문에 이처럼 현실과는 다른 선전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래도 많은 농민들은 갓 해방된 새로운 정세하에서 모든것을 빈주먹으로 시작해야 하는 지방정부의 어려움도 너그럽게 리해해주었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비록 처한 생활환경은 비좁고 렬악했지만 개척민들은 눈이 부시게 펼쳐진 눈덮힌 무연한 벌판을 바라보면서 문전옥답을 가꿀 희망으로 가득차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눈앞의 어려움을 꾹 참고 견뎌냈으며 논농사를 위한 준비에 바삐 서둘렀다.
그러나 시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닥쳐왔다. 겨우내 비좁고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붐비며 살다보니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것이다. 홍진때문에 당시 수십명에 달하는 어린애들이 불쌍하게 목숨을 잃었다.
《잘살아보자고 불원천리 찾아온 산설고 물선 타향땅에 자식을 파묻어야 하는 어른들의 고통스러운 마음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김삼철로인의 한숨섞인 말이다.
그때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100여세대의 농민들이 다시 린근의 오상과 서란 등지로 떠나갔고 연변으로 다시 돌아온 농민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조선족농민들은 눈물과 고통을 씹어삼키고 꿋꿋이 남아 억센 뿌리를 내렸다. 특히 개척단의 초기 공신들이였던 리철순, 리용삼, 장성익, 허윤활,리용근,김만도, 리옥석 등 사람들이 흔들리는 농민들의 마음을 설복하여 안착시키기에 힘썼다고 한다.
세월속에 묻혀있는 연화땅의 주인들
농민들의 개척열의는 대단했다. 오래 묵혀두었던 새밭이라 개간한 땅이 비옥했고 개간지의 한뽐도 더 되는 풀뿌리가 엉킨 든든한 떼장들을 쌓아 집을 지으니 빠른 속도로 살림집들이 일어서면서 륙속 마을이 형성되였다. 개척터가 강곬이 변하면서 만들어진 벌판이다보니 호수가 많아 물고기도 우글대니 사는 멋이 좋았다.
개척단이 연화에 이르러 피어린 개척과 건설로 단 2년만에 700여세대 인가에 연변에 있을 때의 지방이름으로 만들어진 농성, 용화, 명신, 성신, 이화, 중심, 흥성, 신민, 복흥, 장안, 삼지선, 장북,모래산, 중신, 광신 등 16개 자연툰이 생겨났고 1000헥타르에 달하는 비옥한 논이 개간되였다. 새초와 억새풀로 뒤덮혀있던 황량한 벌판에 비옥한 인간락원이 기적처럼 생겨난것이다.
개척민들이 살았던 풀뿌리 떼장집
《1959년, 조선전쟁복구건설을 지원할데 대한 나라의 호소가 있었는데 당시 또 100여세대의 조선족농민들이 조선에 나갔습니다.》김삼철로인의 말이다.
1956년, 개척민들이 일떠세운 이곳에 연화조선족향이 설립되였고 당지의 조선족농민들도 민족자치의 당당한 주인으로 되였다.
어데로 가나 후대교육사업을 중시하는 조선족농민들은 길이 통하지 않는 새초밭에서 인력으로 목재를 끌어와 학교를 지었고 국가의 교육지원도 받아 다년간 후대교육에 힘썼고 이곳에서 적잖은 인재들을 배출시켰다. 연화향에서 나온 인재들을 일일이 세자면 많고도 많다.
당지 농민들가운데서도 전국적으로 소문난 우수인물들이 대거 용솟음쳐나왔는데 연화향의 제 1임당위서기인 허윤활과 명신툰의 김옥순, 흥성툰의 박월옥 등 농민은 북경에 가서 중앙지도일군들의 접견을 받았고 장안촌의 당지부서기인 전국로력모범 김만도는 국경15주년관례대에 올라 모택동, 주은래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과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현재 이 사진은 연변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
신들메 동이는 연화조선족향
과거의 개척민들이 연화조선족향을 살기좋은 고장으로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면 오늘날의 연화조선족향은 이 고장을 더욱 살기좋은 고장으로 건설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여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정말 기쁘다고 김삼철로인은 말했다.
연화조선족의 후대이자 향당위 제7임 서기인 리장수씨가 바로 대표적인 인물이다.
력사를 알아야 발전할수있다는 것이 바로 김삼철로인의 일가견이다. 현재 국내 허다한 조선족농촌마을들이 대개 그러하듯 연화조선족향도 농민들의 도시진출과 해외로무바람에 날이 갈수록 조선족인구가 줄어들고 마을이 황페화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같은 현시점에서 리장수서기는 연화조선족향 지킴이로 나서 많은 실제적인 일들을 하고있는데 사처에서 투자를 유치해 연화조선족향을 훌륭하게 건설하고있다. 반세기남짓 해마다 애를 먹이던 라림강 돌봇동자리에 길이 130여메터되는 견고한 콩크리트봇동을 수축하여 연화벌의 관개수를 보장했고 밤이면 태양에너지가로등이 마을을 환하게 비추고있고 세멘트포장도로가 밭머리까지 이어져 자가용을 타고 농사지을수있어 연화향은 살기좋은 고장으로 되였다고 자랑했다.
항상 촌에 내려가 사업을 토론연구하는 연화조선족향 당위서기 리장수(오른쪽 첫사람)
리장수서기는 연화향에 길림성에서 으뜸가는 중국조선족민속촌을 건설할 타산도 하고 실행에 옮기고있는데 유수시설계원에서 이미 전반 설계도를 완수한 상황이라고 한다. 연화향의 개척과 이민,창업과 성과 등을 전방위적으로 반영한 연화력사전람관설립사업도 추진, 그 설계 역시 이미 지난 여름에 다 마무리됐다고 한다.
연화조선족향의 위탁을 받고 연화력사전람관의 자료수집때문에 연화향을 올해에도 여러차 방문한 김삼철로인은 지금은 과거 개척민으로 연화에 갔던 로세대들은 모두 저세상으로 가고 없지만 아직도 연화향의 곳곳에는 우리가 아직 잘 알지 못하고있는 소중한 연화의 력사들이 잠자고있어 적잖게 발굴되였다고 말했다.
끝나지 않은 연화이야기
《연화향은 연변밖의 작은 연변이라고 불리울만큼 연변사람들이 피땀으로 개척한 땅입니다. 연화의 력사를 세상에 알림은 연화사람들의 자랑일뿐만아니라 중국조선족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연화땅에 개척의 첫 보습을 박아 어언 65년세월, 연화를 개척한 1세대는 물론 후세대들까지 우리 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사연들을 만들어내면서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현재 유수시의 와화수입만 놓고보더라도 80%는 연화향의 조선족들이 창출한것입니다.》김삼철로인의 연화자랑은 끝이 없었다.
연화조선족향 개척민의 후대들
조국해방전쟁승리후 연변의 조선족들이 당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개척민으로 산설고 물선 낯선 타향에 가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피와 땀으로 걸구어낸 소중한 삶의 터전- 연화조선족향, 이처럼 방대한 개척이민단은 연변 유사이래 처음이였고 개척민들이 남긴 분투의 창업이야기는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돐을 맞으면서 김삼철로인은 연화조선족향의 과거 력사를 기록한 수기 “작은 연변의 신화”를 썼다. 이 수기는 중앙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 공모 1등상을 수상했다.
《상을 받자고 쓴 글이 아닙니다. 그저 망각된 연화의 력사를 세상에 알리고싶었고 지금도 연화향의 어느 풀숲밑에 소리없이 누워있는 개척자들을 위해 그들이 살아온 눈물겨운 력사를 펼쳐보임으써 그들의 살아생전의 한이라도 풀어주고싶었고 우리의 후세들에게 조선민족의 자랑찬 력사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고저 생각했을뿐입니다.》
김삼철로인은 연화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소중한 우리의 력사가 깃든 연화땅의 이야기는 더욱 아름답게 엮어질것이라고 기원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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