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화 못믿는 사회
말실수라도 하면 "조선족 XX야" 욕 퍼붓고 신분 사칭한다고 신고
얼굴·명함 인증샷 찍어 보내고 직접 집 방문해 '진짜' 확인받아
시민들 모르는 번호 아예 안받아 중요한 정보 놓치는 등 피해도
"정말 경찰 맞는다니까요."
서울의 한 경찰서 형사는 최근 고소 사건 관련자를 소환하려고 전화를 걸었다가 진땀을 흘렸다.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다가 겨우 연결이 돼서 "○○경찰서 ○○○ 형사입니다"라고 했더니 전화를 뚝 끊어버린 것이다. 다시 전화를 하자 상대방은 "니가 경찰이면 나는 대통령이다. 이 사기꾼 놈아"라며 버럭 화를 냈다. "경찰서 대표 전화번호로 직접 연락해서 경찰이 맞는지 확인해보라"고 설득한 뒤에야 제대로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이 형사는 "진짜 수사 때문에 전화를 걸어도 세 통 중 한 통은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받는다"며 "조금이라도 말실수를 하면 '조선족 XX야, 사기 치려면 한국말 연습 좀 더 해라'는 식으로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다른 경찰관은 "민원인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이라고 하면 '뻔한 수법에 안 속는다'며 아예 전화번호를 차단해버린다"며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다른 가족에게까지 연락해 하소연한 뒤에야 간신히 상대방과 통화할 수 있다"고 했다.
보이스피싱(전화사기) 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시민들의 '전화 불신'이 커지고 있다. 경찰이나 공무원, 은행원 등이 업무 때문에 전화를 걸어도 보이스피싱으로 오해받는 것이다.
충청권의 한 주민센터 공무원 이모(여·28)씨는 최근 업무 시간에 때아닌 '인증샷'을 찍었다. 자동차세(稅) 50만원을 1년 넘게 안 내고 버티는 체납자에게 "체납 세금을 납부하라"고 했더니 대뜸 "보이스피싱 아니냐. 내가 왜 사기꾼에게 세금 내냐"고 따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30분 넘게 입씨름을 하다 결국 자신이 일하는 주민센터 사진과 얼굴, 명함까지 찍어서 보냈다. 그래도 상대방은 "못 믿겠다. 시청에 직접 전화해보고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7년 차 공무원인 이씨는 "요즘 보이스피싱 때문에 공무 수행하기가 정말 힘들게 됐다"고 했다.
직접 돈을 다루는 금융기관 종사자들은 더욱 골머리를 앓는다. 신용카드 재발급이나 마이너스통장 기간 연장 같은 일상적인 업무를 위해 최소한의 개인 정보를 확인하려 해도 "뭘 믿고 알려주느냐"고 의심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은행원 김모(여·28)씨는 사용하지 않는 휴면계좌에서 잔액을 빼가라는 안내 전화를 돌리다가 하루에만 수십 번 사기꾼 취급을 당했다.
그가 "○○은행입니다. 휴면계좌에 잔액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라고 하는 순간 "뉴스에서 본 사기 수법 같다. 웃기지 말고 전화 끊어라"라는 답이 돌아온 것이다. 다른 은행원은 같은 내용의 전화를 돌리다가 경찰 연락을 받기도 했다. 한 고객이 "그런 계좌를 만든 기억이 없는데 은행원을 사칭해 전화가 왔다"고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은행원이 고객 집을 방문해서 진짜 은행 직원임을 확인받은 뒤에야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
이런 전화 불신 때문에 일반 시민들이 일상 생활에서 크고 작은 피해를 겪기도 한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안 받다보니 정작 중요한 정보를 놓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학생 임모(27)씨는 작년 말 낯선 전화번호 수신을 거부했다가 학점을 못 받을 뻔했다. 그가 제출한 과제물에 착오가 있어 담당 교수가 전화한 것인데, 연락이 안 됐기 때문이다. 임씨는 "나중에 교수님이 보내주신 문자메시지를 보고서야 깜짝 놀라 학교로 찾아가 사과드렸다"고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8년 8454건이던 공공기관 사칭형 보이스피싱 범죄는 지난해 3384건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당국의 지속적인 계도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 덕분이다. 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의 직접 피해뿐 아니라 '불신 사회'를 만드는 간접 피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미국·유럽에 비해 신뢰라는 사회적 자산이 취약한 편인데 보이스피싱 범죄가 이를 더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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