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포들 노력으로 우범지역 이미지 벗은 대림동 가보니
"마음 가는대로, 가열차게 드시라!(随便吃!痛快吃!)"
지난 5일 찾은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중국음식점. 중국인 종업원이 빨간색 마라(麻辣) 소스가 범벅이 된 룽샤(龍蝦·민물 바닷가재 요리) 위에 마늘 튀김 가루를 듬뿍 올려 한 접시 내왔다. 두 손에 비닐장갑을 낀 그는 능숙한 솜씨로 가재 머리를 떼어냈고, 등 부분을 검지로 눌러 살을 발라 먹는 시범을 보였다. "가재를 다 까먹고 남은 소스에 볶음밥을 비벼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는 친절한 조언까지 빼놓지 않았다. 룽샤는 중국인들 사이에선 유명한 쓰촨(四川) 지방 요리지만 국내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직장 동료와 함께 이곳을 찾은 이정선(27)씨는 "영화 '범죄도시'에서 윤계상이 연기한 장첸이 가재를 씹어먹던 그 소리가 잊히지 않아 여기까지 찾아오게 됐다"고 했다. 대림동을 처음 찾은 이씨는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라고 했다.
지난해 하반기 나란히 개봉해 도합 12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범죄도시'와 '청년경찰'의 주요 무대는 서울 내 대표적인 중국인 거주 밀집 지역인 대림동과 가리봉동이다. 영화 속 대림동은 조선족 출신 폭력조직원들이 서로 칼을 겨누고, 불법 인신매매와 난소 적출이 이루어지는 어두운 곳으로 묘사됐다. 당연히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40여 개의 중국 동포 단체들이 집결해 영화 상영 중단과 사과 요구를 한 것도 이때였다.
지난 5일부터 사흘간 대림동을 찾았다. "이렇게 깨끗한 '범죄 소굴'을 봤냐"며 시위하던 상인들은 영화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높아진 대림동에 대한 관심과 인지도를 한껏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영화 '범죄도시'의 촬영장소로 쓰였던 대림동 근처 한 호프집은 가게 앞에 배우 윤계상씨의 사진과 함께 '아이 들어오늬?'라 적힌 입간판을 세웠다. 영화에서 옌볜 출신 조직원들의 아지트로 음습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곳이다. 인터넷에선 화제가 됐고, 자연스레 한국인 손님들이 몰렸다. '역발상 마케팅'이 주효한 셈이다. 거리엔 짜장면, 짬뽕이 아닌 '진짜 중국 음식'을 즐기러 온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림동으로 향하는 한국 사람들
노란색으로 적힌 중국어 상호가 붉은 간판 위에 반짝인다. 거리 초입에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길거리 음식인 취두부와 냉면구이, 탕후루(糖葫蘆·과일 사탕꼬치) 등을 판매한다. '구육관(狗肉館)'에선 해체 직전의 개고기를 진열해놓은 이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호랑이 연고'라 불리는 피부 소염제부터 동남아 제일의 열대과일 두리안까지 없는 게 없는 '별천지'다.
대림역 12번 출구에서 시작해 약 1㎞에 이르는 도림로 38길·디지털로 37길 일대는 이 지역 중국인 거리의 핵심이다. 중국 음식점과 식료품점, 환전소, 여행사 등 중국 동포들이 운영하는 가게 1000여 곳이 이 일대에 성업 중이다. 대림역 인근 가게의 권리금이 강남·홍대 수준인 3억원에 육박할 정도로 큰 상권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본래 한국 내 중국 동포들에게 일자리 등 새로운 터전을 제공하거나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주는 장소였다. 매일 저녁이면 대림역 12번 출구 앞은 '만남의 광장'으로 변했고, 춘절(春節) 등 중국 명절이 겹치는 주말엔 최대 4만명 이상이 이곳을 찾아 시장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국어와 옌볜식 사투리 일색이었던 이 거리에선 이제 한국어도 들을 수 있다. 중국말 없인 메뉴를 주문하기도 힘들고 내국인을 위한 배려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곳이지만, 매스컴을 통해 대림동을 알고 '성지순례'하듯 찾아오는 젊은 한국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엔 대림동 맛집 관련 게시물이 1300여 건이 넘고, 유튜브 등 인터넷 방송에선 '대림동 맛집 먹방' 영상이 인기다.
7일 저녁 찾은 한 마라탕집에선 10개 테이블 중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중국에서 1년 유학 생활을 한 대학생 정현중(24)씨는 "이곳 중국 음식은 본토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춰져 있다"며 "시중 중식당과는 다른 진짜 중국 음식과 문화가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했다. 가게 주인 박조연씨는 "호기심 반, 경계심 반으로 찾아왔다 제대로 된 중국 문화를 경험했다며 만족스럽게 돌아가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거리 한가운데에 있는 대림중앙시장엔 폭 2m의 좁은 골목 양옆으로 청과물 가게와 식료품점 100여 개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이곳에선 중국 서민들의 대표적인 아침식사인 '유탸오(油條)'가 특히 유명하다. 지난해 12월 방중(訪中) 당시 문재인 대통령도 즐겨 먹었다고 알려지면서 한국 손님들도 많이 늘었다. 개당 1000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밀가루를 막대 모양으로 빚어 기름에 튀긴 꽈배기 모양의 빵으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말랑한 게 특징이다. 정씨는 "한입 베어 물면 커다란 밀가루 튀김에서 바람이 빠지면서 쫄깃쫄깃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재력 갖춘 중국 동포들 팔 걷어붙이고 나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중국 동포들은 대림동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낮은 임대료와 발달된 교통 여건, 구로공단과 가깝다는 점 등이 이곳에 자리를 잡는 데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방세가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30만원 정도로 서울 내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2012년 정부가 최대 3년까지 경제활동을 허용하는 재외동포 비자(F-4)를 발급하면서 인구가 불어났다. 2015년 통계청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대림동 전체 인구 5만2603명 중 26%인 1만3792명이 중국 동포였다. 대부분이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 3성 지방 출신이다.
이 지역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1년에 강력사건이 300건 이상 빈발하는 우범지역이었다.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음식점·도소매업을 하는 이들이 부를 축적하면서부터다. IOM이민정책연구원에 따르면 건설업 등 저임금 업종에 종사했던 부모 세대와 달리 2세대·3세대 중국 동포들은 대기업이나 대학 등에 양질의 일자리를 얻어 중산층을 형성했다.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주거 환경을 정비하고 이웃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지역 중국 동포 100여 명이 지난 2010년 구성한 '외국인 자율방범대'가 대표적이다. 평일과 주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안 홍보와 순찰 활동을 벌이고 있다. 순찰 복장을 갖추고 대림동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무단 투기, 폭력·소음 등을 계도한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을 두고 "대림동을 돈 버는 거리가 아닌, 내 아이가 자라는 곳으로 여긴다"고 했다. 중국 상인들이 앞장서서 치안 유지에 나선 결과 대림동 일대에서 발생한 5대 범죄 건수는 3년 전에 비해 60% 이상 줄었다. 대림동을 관할하는 영등포경찰서는 지난해 상반기 치안종합성과평가에서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
미결 과제도 남아 있어
라이프스타일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들은 아직 남아 있다. 7일 저녁 대림동 거리 곳곳엔 담배꽁초와 무단 투기된 쓰레기가 가득했다. 취중 상태에서 고성방가하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뒷골목에서 쓰레기를 두고 벌어지는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영등포구청 관계자는 "구청에서 중국어로 된 안내문을 곳곳에 내걸고 있지만, 중국 동포들이 분리수거나 종량제 봉투 사용에 대한 개념이 없어 지도가 쉽지 않다"고 했다.
원주민들의 불만도 여전하다. 구청 등 지자체에선 지역 중국문화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개발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반응이 싸늘하다. 대림동 토박이 황모(61)씨는 "주민들은 중국인 거리의 확장이 아이들 교육과 집값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2015년 5월엔 서울시가 대림동 일대를 '차이나타운'으로 지정해 조성하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철회한 적이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내국인과 이주민 간의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켜 신뢰를 높이는 게 우선적인 과제"라고 했다. 2015년 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자 중 46.6%가 중국인 이주민들이 한국의 범죄율을 높인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경찰청에 따르면 2016년 기준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조선족 포함)의 인구 10만명당 범죄자 검거 건수는 2220명으로 한국인(3495명)의 63.5% 수준에 불과했다. 구 교수는 "지역 사회통합에 주안점을 둔 제도적 과제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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