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배웅
허향순
12년전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낼 때 아버지는 너무나 억이 막혀 아무런 말씀도 못하고 그저 내내 손만 저으셨다. 나는 그 외롭고 허무한 손짓에서 슬픔과 아픔을 읽었다. 그 해 아버지는 81세였다. 아버지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사셨다.
아버지는 고독을 견디지 못해 이따금 활동실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셨다. 그래도 엄마가 못 견디게 그리운 날에는 막내아들의 자가용차에 앉아 두분이 함께 다정하게 거닐었던 모아산 주변도 드라이브하고 연길 시내 저자거리도 휙 돌았다.
한때 아버지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빈가슴을 쿵쿵 쳐보이며 “죽어야 할 사람은 난데 너희들 엄마를 앞세워서 나 지금 죽지 못해 산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10년간 위암에 걸린 자신의 병시중을 들다가 돌아가셨다고 자책하였다. 나는 아버지마저 쓰러질가 봐 은근히 걱정됐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약한 분이 아니셨다. 아버지는 얼마간 방황하는 듯하다가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별일 없는듯 생활하셨다.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라도 한듯 아버지는 생전에 엄마가 사용했던 가구며 전기밥솥이며 수저마저도 그대로 두고 사용했다. 엄마가 계셨을 때처럼 행주도 하얗게 빨아서 싱크대 우에 걸어놓았고 엄마가 즐겨 키웠던 두견화도 그대로 키웠다. 두견화가 엄마가 키울 때보다 훨씬 예쁘고 무성하게 피는 건 참으로 신비롭기만 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집안을 12년전 엄마와 같이 살았을 때와 거의 변화없이 해놓고 사셨다. 덕분에 우리는 엄마가 우리와 함께 살아온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나는 60세가 다되여가는 우리들이 지금도 아버지 덕분에 아들과 딸의 노릇을 하며 살 수 있어서 여간 고맙지 않다. 우리들의 추억이 담겨있는 옛집으로 찾아가 아이처럼 응석도 부릴 수 있게 해주는 아버지의 품이 너무 고맙다.
삼형제들은 아버지 집에만 모이면 아버지 사랑을 받으면서 살았던 동년시절의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아니, 그런 일도 있었구나! 그런데 난 왜 그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지?” 하며 난감하게 웃으신다. 90 고개를 넘긴 후부터 아버지의 기억력은 더 못해졌다. 이에 우리는 기를 쓰고 아버지와 함께 했던 과거들을 자주 입에 떠올리며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언제인가 내가 처음으로 혼자 조양천에 계시는 할아버지 댁으로 놀러 갈 때 아버지가 기차역까지 배웅해주신 일을 꺼냈더니 아버지는 한참 미간을 찡그리시더니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는듯 머리를 저으시며 “네가 여름방학마다 조양천 할아버지 댁으로 놀러 간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기차역까지 배웅해준 건 잘 모르겠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배웅해주었던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건 그 뒤 여름방학 때마다 조양천 할아버지 댁으로 놀러 가게 되면 찌프차에 나를 싣고 기차역 개찰구까지 배웅해주셨던 모든 일들이 전혀 아버지 기억에 없다는 말씀이나 다름없다.
동생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믿을 수 없다는듯 “그럼 제가 열일곱살 때 특별선발로 심양군분구 총사령부 직속기관에 뽑혀서 심양으로 갈 때 저의 짐을 부대에서 요구하는 규격에 맞게 묶어주고 연길기차역까지 배웅해준 생각은 나요?” 하고 물었다. 당신의 소원 대로 군인이 되여준 동생이 너무나 대견하게 생각되여서일가, 아버지는 그 일은 생각난다며 머리를 끄덕이셨다. 군인생활을 오래 해오신 아버지는 자식중 누군가 군인이 되길 은근히 기대했다. 아버지는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것 같았다.
3년전부터 나와 녀동생은 일주일에 두번씩 아버지 집으로 찾아간다. 아버지도 뵐겸, 맛나는 음식도 챙겨드릴겸 가서는 한바탕 수다를 떨고 온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지금 아버지의 기억 속에 어떤 일들이 남아있고 어떤 일들이 잊혀져있는지에 대해서 빤히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던 날과 녀동생이 결혼하던 날에 사택 정문 앞까지 배웅해주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날 침울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꼭 잘살아달라.”고 당부하던 말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녀동생은 지금까지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하신 많고많은 배웅중에서 가장 짧고 슬펐던 그 날의 배웅을 지금도 따뜻하게 가슴에 간직하고 있고 젊은 날 아버지의 모든 배웅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요즘 따라 아버지의 배웅에 크게 고민하게 된다. 매번 우리가 아버지 집에 들어설 때마다 어릴 적에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응석조로 “아버지, 저희들이 왔어요.”라고 인사하면 아버지는 진작 기다렸다는듯 “오냐, 어서 오너라!” 하며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익살스러운 녀동생은 아버지와 포옹하면서 애교를 부리느라 바쁘고 나는 챙겨온 반찬들을 밥상에 차려놓느라 바쁘다. 셋이 오붓하게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아버지와 작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우리는 은근히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너무나 행복해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일어나는 것이 미안하여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건강 때문에 우리를 눈바래움밖에 할 수 없으면서도 아버지는 우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우리를 배웅해주느라 야단법석이다. 그리하여 아버지와의 작별이 생리별 만큼이나 처량할 때가 많다.
우리가 떠나야 할 시간이 되면 일을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보라며 흔쾌히 말해놓고는 정작 우리가 가려고 일어서면 우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인사를 드리고 집문을 나서는 우리를 보고 “운전 조심하거라!”고 아버지다운 걱정을 해주신다. 그러나 그 뒤에 끝없이 이어지는 눈바래움은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아버지가 출입문을 닫기를 기다렸다가 우리는 엘레베터를 타고 1층에 내려가는데 아버지는 어느새 남쪽 베란다 우에 허리를 굽히고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손을 저으신다. 우리도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손을 내젓는다. 그런데 아버지의 배웅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버지 집 아빠트는 옆동 아빠트와 일직선에 놓이지 않고 약간 뒤로 드텨있어서 우리들이 옆동 아빠트 앞을 지나 정문이 있는 북쪽으로 꺾어들면 우리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두 아빠트 틈 사이에 나타나기에 아버지는 그 순간을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우리가 보이는 순간 또 손을 젓는다. 서로의 모습이 무엇에 잘린 것처럼 불완전하게 보이지만 그 때까지 우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준 아버지의 성의가 고마워 다시 아버지를 향해 손을 저어보인다. 아버지의 배웅은 여기서도 끝이 아니다. 우리를 한번 더 눈바래움하기 위해 관절염의 통증까지 참으며 우리의 걸음 따라 남쪽 베란다에서 북쪽 베란다로 이동하셔서 또 우리를 향해 손을 젓는다. 평소 바깥출입을 하실 때면 남동생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92세 고령의 아버지에게 있어서 남쪽 베란다에서 북쪽 베란다까지 그 12메터 거리가 얼마나 늘차고 험할지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난다. 가끔 이처럼 모험까지 하면서 우리를 배웅하는 아버지가 야속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매번 아버지의 배웅은 우리가 아빠트에서 너무 멀어 희미하게 보이는 아버지를 향해 손을 휘젓는 것으로 끝난다. 어떤 날엔 그런 배웅을 받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우리와의 만남을 유일한 락으로 삼고 사시는 아버지가 한없이 가엾어보이기 때문이다.
12년전에 엄마를 하늘나라로 배웅하신 아버지가 우리와 작별할 때마다 이번 배웅이 혹시라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가. 그래서 매번 그렇게 결사적이고 치렬하게 우리를 배웅하시는 건 아닐가.
《연변녀성》2023년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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