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여러가지 사업을 하다가 좀 독특한 폼목을 골라잡아야겠다고 윽벼르던 남송호씨, 52세, 현재 직업은 농부, 3년전의 어느날 “문화대혁명”시기 어머님, 아버님의 하방지였던 승지로 들어가 특종닭인 궁정황계(宫廷黄鸡)와 오골계(乌鸡)를 키운다.
지난 8일, 아직은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그의 농장이 있는 룡정시 지신진 승지촌으로 찾아나섰다. 룡정시내를 벗어나 삼합방향으로 달리다 삼합, 백금으로 갈라지는 표지판이 보이자 남씨에게 핸드폰을 했다.
“표지판이 있는 곳을 지나지 말고 바로 왼쪽으로 들어오다 우회전을 해 오면 가장 끝에 있는 집입니다. 그리로 오면 돼요.”
파란색 비닐기와를 얹은 집에 도착해 차를 세우려는데 남씨가 나타났다. 꾹 눌러쓴 모자에 허름한 옷차림, 어디에도 “기업인”의 티가 나지 않는다. 영락없는 농부였다.
남씨는 붙임성이 좋고 시원시원한 사내였다. 담배를 서로 나눠 피우며 청나라 자희태후가 즐겨먹었다는 궁정황계(보통닭들과는 달리 발가락 다섯개)와 약용으로도 소문난 오골계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듣고나자 남씨는 어제(7일) 방금 300마리가 부화됐다며 부화실로 다짜고짜 이끈다. 궁정황계와 오골계는 계사가 따로 있다. 가장 궁금한것부터 물었다.
“어떻게 도시생활을 접고 귀농을 하게 됐습니까?”
“시내생활은 저의 신념과는 달라서 고민이 컸어요.” 그는 쓸데없이 길게 말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것 같았다.
3년전, 남씨는 단돈 2만원을 쥐고 승지마을로 내려왔다. 그의 귀농자금이였다. 시작은 부화시킬 닭알 500알로 했다. 하북 진황도로부터 궁정황계와 오골계 닭알 500알을 들여와 한번에 264알이 들어가는 소형 부화기에 두번에 나누어 넣었다. 부화률은 77%나 됐다. 책을 “스승”으로 모시고 일에 대한 책임심이 워낙 높은 남씨인지라 부화뒤 사름률도 매우 높았다.
“도시 귀농인에게 양계는 어떤가요?”
“양계는 적은 자본으로 시작이 가능하고 자금회전도 빠릅니다. 좋은 점이 있어요. 그러나 처음에는 판로에 애를 먹어요. 그리고 매달려야 합니다.” 남씨의 대답이다. 현재 남씨는 매일 120알 좌우의 닭알을 거둬들이고있다. 예약주문이 꽉 차 한알에 2원씩 손님들이 불티나게 가져간다.
“닭은 어떻게 기르세요?”
“핵심은 풀이예요. 논두렁과 밭의 다양한 풀들을 줍니다. 봄철에 거친 사료 많이 줘야 합니다. 병아리때 잘 키워야 해요. 그리고 책임심이 있어야 합니다.” 남씨는 밭 5무를 부치며 자가사료를 충족시키고있었다. 그의 계사는 환기가 잘되고 닭들이 충분히 뛰여놀수 있는 공간도 여유롭다.
남씨의 안해(박채봉씨)는 남편의 귀농결정에 처음엔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다. 연길에서 출근하는데다 운전면허도 없다보니 안해는 주말이면 뻐스를 리용해 먹을거리 한짐 챙겨들고 시골의 남편을 찾아온다. 남편이 시골에서 치부의 청사진을 하나하나 그려가는것을 보고 이제는 내심 남편자랑에 치마폭을 들썩이는 그녀이다.
“올해는 닭마리수를 푹 늘여 래년부터는 하루 500알을 목표로 할것입니다.” 남씨의 꿈은 크지는 않았지만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워낙 사람 좋은 남씨인지라 시내의 친구들도 그의 농장을 자주 찾는다. 시골생활의 보람 같은건 특별히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말하는 남씨이다. “그저 몸 움직여서 뭔가 만들어내는것이 좋을뿐입니다. 일 자체가 즐겁지 않으면 양계는 못할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앞으로 어느 정도까지 닭마리수를 늘일것이냐고 묻자 “뭔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는 성격”이라고 남씨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계사 뒤편 산자락으로는 그가 기르는 흑염소들도 눈에 띈다. 계사를 지켜나선 개들도 모습이 너무 름름하다.
남씨의 작은 농장을 떠나며 남씨처럼 흐르는 물처럼 사는게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영수 리미민 기자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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