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미문화상 응모글 5] 추억의 손목시계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2월18일 09시26분    조회:197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추억의 손목시계
리기춘


어느날 나는 책상서랍을 정리하다가 서랍구석에서 22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스란히 잠들어있던 《상해표》손목시계를 꺼냈다.입김을 홀홀 발라가면서 하얀 손수건으로 먼지를 살살 닦으니 깨끗한 모양새가 그대로 깔끔하게 들어났다.어찌보면 보잘것없이 평범한 손목시계이지만 나에게는 애뜻한 감회가 깊숙이 스며있는 더없이 소중한 보배시계이고 내 인생에서 영원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명품시계이다.

지난세기70년대초,농촌청년들이 손목시계를 차고 번쩍번쩍 자랑한다는것은 웬만해서는 엄두도 못내는 가장 사치스러운 향락이였다.그때는 순농사수입으로 한공에 오륙십전이 되나마나하는 형편에서 로동력이 알쭌한 가정이라도 년말결산에 이것저것 덜어내고나면 겨우 백원좌우 차려졌다. 1972년 년말에 우리집은 몇해만에 처음으로 백여원의 분배돈이 차려졌다.그 돈이면 좀 값싼 손목시계라도 하나쯤은 갖출수 있으리라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황홀한 꽃꿈에 부풀어 련며칠 잠도 자지 못했다. 구차한 세월에도 물질에 대한 욕구는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기색을 슬금슬금 훔쳐보더니 난처한 기색을 짓는것이였다.

“이 돈으로 남들에게 진 빛부터 갚고 손목시계는 후에 차차…”
한껏 부풀어 뜨거운 흥분속에 묻혀있던 나는 순식간에 늦가을 된서리 맞은 벼 이삭처럼 고개를 뚝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구들장이 꺼지게 후휴— 긴한숨을 내쉬고말았다.

아마도 나의 그날 락태한 상이 어머니의 마음에 내내 걸리신 모양이였다.

어느날 어머니는 어디에 가서 돈 20원을 빌려다 새끼돼지 한마리를 사서 돼지우리에 살랑 집어넣으시는것이였다.어머니는 큰 보배라도 얻어온듯 만면에 해살같은 웃음발을 환히 펼치시고 나더러 새끼돼지를 어서 와서 보라고 독촉이 성화같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하시면서 이 새끼돼지를 잘 키워 팔아 래년봄에는 손목시계를 나한테 사주겠다고 약속하는것였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자식사랑같은 지극 지성으로 새끼돼지를 알뜰히 키우기 시작했다.매일 하루 세끼 쌀뜨물에 벼겨와 능쟁이와같은 돼지풀을 삶아서 돼지머거리를  장만했다.어머니는 불볕이 뜨겁게 쏟아지는 한여름 생산대 한전밭에 나가 기음 매고 집으로 돌아올때면 저녁늦도록 돼지풀을 캐서 한아름씩 이고 집으로 오군 했다. 어머니의 정성이 지극하였는데 1년만에 돼지가 2백50여근이나 되였다. 당시에는  사사로이 개인에게 팔수 없는 시대였다. 국가에 팔아 1백20원을 손에 쥔 어머니는 그 돈에서 20원을 갈라내여 용돈으로 남기고 백원을 북경에서 사업하는 누님한테 부치셨다.모자라는 돈은 보태서라도 기어이《상해표》손목시계를 사보내라고 연필에 침을 곱게 발라가면서 편지까지 써서 보냈다.《상해표》손목시계는 북경에서도 쉽게 살수 없는때라 누님은 부득불 모모한 분을 통해서야 살수 있었다.

북경에서 부쳐보낸 손목시계를 받아쥔 나는 천하에 없는 보배나 얻은듯이 입을 다물줄 몰랐다.입에 귀에가 붙었다. 어느새 소문을 들은 동네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부러운 눈길로 손목시계를 조심스레 만져보면서 손에서 놓기 아쉬워했다.시계가 이손 저손에서 옮겨지면서 오리울가봐 난 얼른 손목에 찼다. 어깨를 으쓱해지면서 대단한 부자가 된듯한 기분이였다.

대대 단서기라는 신분에《상해표》손목시계까지 척 차고 나서니 난 도시의 월급쟁이 신사가 된 기분이였다. 대대의 예쁜 처녀들의 은근히 사모하는 눈길이 내 등뒤에서 묻어나는 느낌을 어렴잖게 느낄수 있었다.

그때 농촌에서 밭일을 할 때면 쉼 시간과 점심시간을 가늠할수 있는것이 없어서 제일 곤혹스러운 일이였다.하늘의 해를 쳐다보고 어림짐작으로 쉼시간을 정했는데 날씨가 흐린 날에는 여간 말째였다. 나는 밭일을 할 때면 금이라도 간직하듯 손목시계를 벗어 손수건에 꽁꽁 싸서 허리춤에 단단히 숨겨놓았다. 그리고 허리쉼을 할 때되면 살며시 꺼내보고 쉼시간을 배치하군 했다. 나에게 시계가 있은후 참 편리했는데 때로는 곤혹스러울 때도 가끔 있었다.30여호 인가의 생산대에서 내가 유일하게 손목시계를 번쩍거렸으니 남들도 은근히 손목시계를 향수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의 부러워하는 눈길이 내 손목을 훔쳐지나고있었다.

어느날 담배따기 일을 할때였다. 성미가 시원시원하게 부접좋은 젊은 아줌마가 첫날 색시처럼 살가롭게 다가와서 응석 부리듯 치근덕거렸다.

“단서기총각,그 손목시계를 내가 한번 차보면 안될가, 딱 한번만…”

나는 옆사람들이 좀스럽고 째째하다고 빈정거릴가봐 달갑지 않은 속마음을 가까스로 감추고 대범한체하면서 손목시계를 조심스레 벗어서 그 아줌마에게 넘겨주었다. 그 아줌마는 얼굴에 함박꽃을 활짝 피우면서 시계를 손목에 천천히 차는것이였다. 그리고는 하얀 손수건으로 시계를 감싸고 다음 적삼소매단추까지 단단히 채우는것이였다. 쉼시간이 되여서야 그 아줌마는 아쉬운듯이 손목시계를 팔목에서 빼내 나에게 공손히 넘겨주고는 깍뜻이 인사까지 했다. 이 모습을 옆에서 환히 지켜보던 처녀들은 뾰로통해났다. 그중 우리마을에서 제일 곱살하게 생긴 처녀가 대뜸 하얀 팔목을 쑥 내밀면서 자기도 한번 향수해보자고 졸랐다. 어정쩡해난 나는  처녀들의 인심을 잃고 애모의 정을 잃더라도 내가 가장 아끼는 귀중한 보배를 맹탕 내돌리고 싶지 않았다. 너도나도 한번한번 하는날에는 내 손목시계가 저렴한 물건처럼 처참해지지 않을가싶어 안된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자 그 처녀는 대뜸 새침해지면서 얼굴색이 새파래졌다. 그후부터 난 일 하러 갈때 시계을 차고가지 않는 날이 푸술했다. 이처럼 생명처럼 아끼는 손목시계인지라 평시에 조금이라도 오리울세라 항상 신경을 도사렸고 잃어버릴세라 명심하고 또 명심하면서 올똘히 건사했다. 세수할때도 첫 순서로 손목시계를 벗어 호주머니에 깊숙이 넣었고 밤에 잠잘때도 책상서랍에 꼼꼼히 숨겨두군 했다

시계에 대한 애착이 너무 과했는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가끔 일어났다. 어느날저녁 밖에 나가 술을 마시고 얼큰하게 집에 돌아왔다. 이튿날아침에 항상 시계를 두던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가 깜쪽같이 사라졌다。눈앞이 아찔해났다. 분명 엊저녁 서랍에 넣은는데…혹시 집식구들이 나를 혼내주려고 꾸민 지나친 장난이 아닐가 생각되여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대뜸 얼굴빛이 흐려졌고 녀동생도 상심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까지 가랑가랑했다. 삽시에 온 집이 쑥대밭이 되였다.그래도 성질이 차분한 아버지가 어디다 잘못 두었는지 다시 찾아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책상서랍이란 서랍을 다 뒤졌다. 그런데 왼쪽서랍을 열고보니 거기에 내 손목시계가 반짝이고있지 않겠는가! 평시에 언제나 오른쪽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그날 취해서 그만 왼쪽서랍에 넣었던것이다. 이처럼 시계때문에 울지도 웃지도 못할 미니희극이  발생했다. 《상해표》손목시계는 내 인생의 하얀 숨결과 더불어 날마다 찰각찰각 쉼임없이 맥박쳤다。날마다 태엽을 주면서 나는 인생을 불태웠다. 그 손목세계를 차고 떳떳이 대학교문에 들어섰고 그 시계를 차고 성스러운 교단에 서서 20여년을 하루와 같이 보냈다.

그 시절에는 손목시계가 신분을 나타내는 귀중품이였다. 손목시계를 한번 차보는것이 어쩌면 그 당시 농촌젊은이들의 가장 절박한 소원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절박한 소원을 이루었으니 그 시대에 사치를 단분히 향수한 셈이다.

지금은 흔해빠진게 손목시계이고 또 시계를 차는 사람도 많지 않다. 또 손목시계시장도 발전하여 여러가지 전자손목시계와 외국제 명품시계들이 엄청 많다. 전자손목시계의 유혹에 내 팔목에 있던 《상해표》손목시계도 언젠가 내 팔목을 아쉽게 떠나게 되였다.이젠 그《상해표》손목시계는 지나간 그 시대의 력사유물로 남아있다. 20여년이나 나의 인생을 동반한 《상해표》손목시계는 조요히  책상서랍한구석에 묵묵히 자리잡고《퇴직휴양》하게 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강산이 변해도 《상해표》손목시계는  내 마음속을 한시도 떠난적 없다. 집이 이사할때마다 나는 꼭꼭《상해표》손목시계만은 정성스레 건사하여 서랍에 보관하군 했다.

내 젊음을 화려하게 장식한《상해표》손목시계, 아마도 내 손목시계는 내 인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영원히 내 곁에 있으리라!



《청년생활》잡지 2015.11월 호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남편이 사망한 뒤 같은 무덤에 들어가고싶지 않다며 이른바 “사후(死後) 리혼”을 신청하는 녀성들이 늘고있다고 일본 슈칸포스트가 21일 보도했다. “사후 리혼”은 법률용어는 아니다. 배우자의 죽음 이후 “인척관계 종료 신고서”를 제출, 배우자의 혈족과 관계를 끝내는것을 “사...
  • 2016-09-26
  • 영매처녀의 화상처치를 해주고있는 연길익수당종합문진부의 의료진   “25살 처녀 화상후 치료비걱정에 눈물”이라는 기사가 최근 인터넷길림신문에 발표되면서 룡정시 천보산진에 살고있는 한 처녀가 화상을 입은후 치료비걱정에 울고있는 안타까운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회의 따뜻한 지원의 손길이 이...
  • 2016-09-22
  • 28살 젊은 나이에 한 살배기 아들을 중국 하얼빈에 두고 부산의 방직공장으로 돈 벌러 한국에 왔던 조선족. 식당 주방일과 홀 서빙 등으로 전국을 전전하며 억척같이 돈을 모아 귀화도 하고 30대 후반에는 번듯한 호프집도 운영하며 승승장구했다는 사람. 하지만 이를 시샘이라도 한 걸까? 승승장구하던 시절 갑자기 찾아온...
  • 2016-09-20
  • 최근 들어 배우자를 여의고 홀로 고독하게 살던 로인들이 마음 맞는 상대를 찾아 생활면에서 서로 의지하고 말동무도 하면서 로년을 즐겁게 보내는 로인들이 적지 않다. 일명 “황혼의 로맨스”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상대의 재산을 탐내 주동적으로 접근하여 황혼로맨스 “사기극”을 펼치는 사건...
  • 2016-09-18
  • 권희숙 안산국제비즈니스고 교장이 안산 최초의 외국인 전교학생회장 기디연 군을 격려하고 있다. /신선미기자 ssunmi@kyeongin.com 기디연 안산국제비즈니스고회장 탄생 학급서 '솔선수범' 6명 후보 제치고 당선 "서로돕는 한국문화 세계에 알릴것" 포부 권희숙 교장 "함께하는 프로그램" 강조 "저는 비록 한국사...
  • 2016-09-12
  • 지난 8월 17일, 닛시푸드 연변지사 사무실에서 김파(35세)씨를 만났다. 김파씨에 따르면 상해닛시푸드유한회사는 15년간 부자아빠김치를 비롯해 청록원 훈제오리, 화랑쌀, 어사또 등 세개의 자체 브랜드를&nbs...
  • 2016-09-08
  • 연길시 려객운수소(북역) 맞은켠 예지성무용요가학원에 가면 70대 할머니가 있는데 로인답지 않게 체력이 빼여날뿐만아니라 어려운 동작도 척척 잘 소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23일, 무작정 그곳으로 찾아갔...
  • 2016-08-28
  • 력사적인 도시로 일찍이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의 국도였고 수나라때 대운하가 개통되여 강남쌀의 수송지로 활력을 과시으며 항주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번영한 소주는 오늘날 많은 외국투자자들과 기업들이 서로 다투어 찾는 명승지이다. 소주에서도 우리 조선족은 활약하고 있다...
  • 2016-08-24
  • 어린 시절 접한 사진 한장의 감동이 한 남성의 일생에 불꽃을 일궈 만리장성에 헌신하게끔 이끌었다. 국내언론들이 소개한 영국인 윌리엄 린드세이(60세·William Lindesay)의 이야기이다. 1967년 당시 11살의 그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세계지도책에서 만리장성의 사진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만...
  • 2016-08-17
  • 니쯔 하루꼬(자료사진) 일본 도꾜의 하네다(羽田)국제공항은 세계적으로 5개밖에 안되는 5성급 공항(일본 하네다공항, 한국 인천공항, 향항국제공항,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뮌헨국제공항)에 든 공항으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깨끗한 공항”이미지를 영위하고있다. 그 미명과 함께 청소를 극치에 도달시킨...
  • 2016-08-16
  • 최설학생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는 박선옥할머니(오른쪽) 8월 4일 아침,연길아리랑방송 《나눔과 행복》프로 현장에서 연길시 로인뢰봉반 성원인 72세 박선옥할머니가 지선당에서 어렵게 공부하다 대학에 붙은 최설(원명 최설매)학생에게 대학등록금에 보태라며 1200원을 쥐여주었다. 최설학생은 4살에 엄마사랑을 잃고 조양...
  • 2016-08-13
  •   중국계 결혼이민여성 오건금(왼쪽)씨는 딸과 둘이 있을 때는 중국어만 쓰기로 딸과 약속했다고 한다. “엄마가 외국어 선생님이 됐다고 딸이 너무 좋아해요!”   12년 전 시집온 중국인 오건금씨 구미 상모초교 등 3곳 강사 맡아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중국계 결혼이민여성 오건금(43)씨는 만나자마...
  • 2016-08-11
  •   (안동=연합뉴스) 이승형 기자 = 경북에 사는 중국 출신 결혼이민여성이 모국에서 봉사활동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결혼이민여성 18명과 자원봉사자 10명은 지난 9일부터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민간외교 사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들은 오는 13일까지 주민에게 생필품을 지원하고 농사활동을...
  • 2016-08-11
  • 팔순 할머니 한분이 식사후 집부근 산책도중에 배낭 하나를 주었는데 안에는 금은악세사리, 호구부, 은행카드가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하여 제자리에서 3시간 남짓이 기다렸지만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어쩔수 없이 배낭을 단지에 부탁하였다. 8월 3일 오후, 분실자 박녀사가 단지에서 자신의 배낭...
  • 2016-08-06
  • 강소성 복광미농민 온 가족을 데리고 46년 전 제2고향 도문 달라자에 왔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닌, 성실로 내용을 이뤄가는 것이다”는 명언이 있다. 필자가 일전에 만난 복광미씨는 바로 이 명언의 주인으로 성실로 인생을 가꾸는 사람이였다. 이런 일이다. 지난7월 17일 오전 10시경, 필자는 도문시 석현...
  • 2016-07-28
  • 왼쪽부터 평택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운영하는 취·창업지원교육과정에 참여중인 리우유핑, 후메이좬, 리쇼우리씨. 평택/민웅기기자 muk@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 "우리가 잘 배워서 잘 돼야 다른 국적의 친구들이 희망을 갖고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렵고 힘들어도 꼭 취·창업에 성공하겠습니다." 경...
  • 2016-07-27
  • 누군가의 지나온 삶에 대해 물어 보고 기록하는 행위는 흥미로운 작업인 동시에 상당히 조심스럽기도 하다. 지나온 삶이란 드러내고 싶기보다 감추고 싶은 영역이 더 많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과는 달리 태희(가명)는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시원시원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태희...
  • 2016-07-23
  • 조기교육이 중요하다며 태교로 영어를 배우는 예비엄마들이 수두룩하다. 글로벌시대에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수 있는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열풍에 요즘 중년의 나이를 잊은 채...
  • 2016-07-21
  • 강오금   강오금(75세): 계속 민족교육에 몸 담그련다   심양시교육국 부국장급 순시원으로 있다가 퇴직했다. 퇴직직전에 심양시에는 6개 조선족중학교와 30여개 조선족소학교가 있었다. 처음 심양시교육국에서 근무할때는 나 혼자 조선족이였다. 나중에 십여명 조선족들이 교육국에 오게 되였고 심양시의 민족교...
  • 2016-07-19
  • 29일 오후 중앙민족대학 한어문문학학부 62급 동창들이 장춘 설월산호텔에서 “황혼의 삶 탐구”를 주제로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북경, 상해, 심양, 대련, 할빈, 연변 그리고 한국에서 온 이들...
  • 2016-07-19
‹처음  이전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