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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터전을 개척하는 사람들, 녕파(닝보)편 (1)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5월4일 23시14분    조회: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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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향을 버렸지만 또다시 여기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선족이 이 고장에서도 재미있게 살수있는 터전을 마련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닝보는 의류업이 발달한 곳이고 주산군도에는 해산물이 많이 나는 고장입니다.”

중국강남에 위치한 녕파(宁波 닝보)는 절강성의 단독계획시이고 절강성의 성직할시이다. 특히 녕파 주산항(舟山港)은  세계 최대 물동량을 자랑하고있다. 

녕파시는 절강성의 경제 중심지일뿐만아니라 국가 력사문화명소로서 련속 네차나 전국 문명도시로 명명되였다.

녕파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왔지만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억이 흐릿하다. 단지 중국의 최대경제구 장강삼각주에 위치한 현대화한 도시라는 인식과 전통적인 중국 강남의 문화명소라는 인식이 서로 뒤엉켜있을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조선족이 많이 모여들고 얼마전에는 심지어 조선족협회까지 섰다는 소식을 지인에게서 듣고 녕파방문을 결정했다.

“새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사람들”계렬 취재방송을 하고있는 우리들이 반드시 찾아봐야할 곳이기도 했던것이다. 북경에서 녕파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것은 3월 27일 오전이였다.

2시간의 비행을 거쳐 녕파에 도착한후 지인이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삼강구(三江口)에 위치한 녕파의 “로외탄(老外滩)”이였다. 대도시 상해에 외탄이 있듯이 이곳에도 로외탄이라는 명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상해외탄보다 더 오래된 것이란다.

녕파는 세 갈래 강이 모이는 합수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때문에 세 강이 합치는 합수목인 삼강구(三江口)가 녕파의 가장 번화한 중심지로 된다. 

기재에 의하면 녕파는 당송때부터 “해상비단의 길”의 동방 시발역으로서 그 번화함을 누려왔다. 그러다가 아편전쟁시기 제국주의 함포에 의해 1844년에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여 제국주의 통상구로 되었다. 그러니 이곳이 상해보다도 개방이 20년 더 빨랐다는 것은 과장된것이 아니다. 

로외탄은 1992년부터 다시 개발되여 이미 장강삼각주의 문화 명소중 하나로 부상했다.

녕파의 삼강구  

녕파 삼강구 대교

물론 이곳 외탄은 그 규모나 번화함은 상해외탄과 비교할수없지만 그래도 백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많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녕파인들의 상업재능을 엿볼수있는 다양한 유적이 남아있어 여러 가지로 볼거리가 많은 명소였다. 

녕파 삼강구의 야경 

1. 조선족 로인협회의 형성과 발전 

이튿날 녕파조선족 로인협회의 회장 박영기(朴榮基) 어른을 만나 녕파에 조선족이 모이게 된 상황을 료해하였다. 원래 흑룡강성 아성에서 살던 박영기 회장은 십여년전 자녀들을 따라 녕파에 와서 사신 분이다.

녕파 조선족로인협회 박영기 회장

[박영기] “자식따라 녕파에 온지도 어언 20년에 가까워옵니다. 녕파는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의류업이 많이 발전한 곳이고 또 지리적으로 주산군도가 있어 수산물이 많이 나는 고장으로 소문이 높은 고장입니다. 한국과 일본회사들이 대거 녕파에 진입하면서 조선족 젊은이들도 이곳에 자리를 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한국이나 일본 의류업체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독자적으로 창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녕파의 조선족 청장년 반 이상이 의류업이나 무역에 종사한다고할 수 있습니다.”

[박영기] “녕파의 조선족 원로라고하자면 올해 82세 고령인 최금단(崔今丹), 장정옥(張貞玉) 두 할머니가 계십니다. 이 두 분은 일찍 16살에 화룡에서 지원군 위생병으로 나갔다가 지원군의 한족 전우와 결혼해 이곳에 와서 사시게 되였다고합니다. 얼마전 우리 조선족 로인들이 모여서 이 두 분의 80세 생일잔치도 차려드렸습니다. 자녀들을 따라 녕파에 온 우리 로인들은 그래도 시간이 많습니다. 말동무가 없어 적적하기 때문에 조선족끼리 자주 만나군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04년에 조선족 로인협회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여러가지 다양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로인들 생신잔치를 차려 드린다거나 함께 관광을 다니고 또 조선족 춤과 노래를 하는 활동을 조직하군합니다. 특히 우리 가운데는 조선족 상모춤까지 추는 분이 있어 지역사회를 대표해 나가 춤자랑을 할때도 있었습니다.”

[박영기] “우리 조선족은 중국 56개 민족가운데서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고 진취심도 강하며 특히 부모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을 공부시키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이곳의 기후가 맞지 않아 고생이였고 조선족이 없으니 적적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갈 생각도 했었지만 자녀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잘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고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을 버렸지만 또다시 여기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선족이 이 고장에서도 재미있게 살수있는 터전을 마련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영기] “수십년사이 우리 중국조선족은 한국에 많이 진출했습니다. 우리와 한 핏줄이니 좋은 삶을 살수 있을것 같아서 무작정 한국진출에 열을 올렸습니다. 저도 한때 한국에 있어봤습니다. 그런데 이 한국진출붐이 구경 우리 조선족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한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친척도 찾고 고국이라는 느낌도 받으면서 선진적인 민족전통을 보면서 성취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물론 돈도 벌었지요. 그런데 점차 가면서 그게 아니였습니다. 중국조선족은 한국에서 어디가나 필경 이곳은 우리 나라가 아니구나, 리익앞에서는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도 큰 의미가 없구나 하는 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후반에 들어와서는 중국에서의 우리 터전이 다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건설했던 학교, 우리가 건설했던 마을, 우리가 가꾸던 토지 이 모든 것이 남에게 양도되고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곳에 와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우리의 후손들이 전통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선말도 모르고 조선글도 모르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픕니다.”

박영기 회장님은 자신이 몸소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깊은 사색을 자아낼 문제를 제시해주셨다. 한국진출, 그동안 수십만 조선족이 중국의 터전을 버리고 한국에 나갔다지만 구경 저들의 미래를 한국에 기탁할수있을지 의문이다.

낯선 땅에 새로운 터전을 개척한다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박영기 회장은 정부 관련 부문을 찾아다니며 적극 방법을 강구하였다고하신다.

[박영기] “여기와서두 제가 민족사무위원회도 찾아가고 정협도 찾아가고 했습니다. 어떻게하면 녕파사회에 우리 조선족들이 같이 잘 살수있게 만들겠는가를 고민하면서 많은 노력을 해봤습니다. 특히 교육문제에서 정부차원의 힘을 빌리려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학교에 편입해 조선족반을 꾸리고 선생 한명을 구해서 조선글을 가르치면 어떤가고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교원을 구하는 것도 문제되고 이런 조선족반에 아이를 보내려는 학부모도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부쪽에서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너네 조선족은 한국인과 같지 않느냐? 한국이 너네 나라가 아니냐?’하면서 잘 신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 답답해서, 과거 일부 조선족이 스스로 한국이 자기 나라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였으니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니다, 우리는 엄연히 중국국적이고 중국의 조선족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런 사람은 소수일뿐이라고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도 없는 로인 한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사업이 잘 진행되지 못한데 대해 박영기 회장은 못내 가슴아파하면서 이렇게 분석하셨다.

[박영기] “녕파는 특이한 곳입니다. 어찌하다 보니 이곳에 모인 조선족은 모두 동서남북에 흩어져 살고있습니다. 그러니 한번 만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연구하기도 불편합니다. 그리고 녕파는 동북의 여느 시와 현과도 다릅니다. 동북에는 그래도 어디나 민족문화관이 있어 조선족의 활동장소로 되었는데 여기는 없습니다. 안만해도 로인의 힘으로는 안되겠습니다. 젊은 사장한테 부탁했지요, 젊은 선줄군이 있어야 일들이 잘 해결될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양력설에 조선족협회가 창립되였습니다. 조선족이 근 3백명이나 모였습니다. 지금 얼추 녕파에 천여명 조선족이 있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이젠 조선족협회도 있으니 젊은 사장님들의 인솔하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다 잘 해결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기 좋은 우리의 제2의 고향을 더 잘 건설하리라 생각됩니다.”

박영기 로인협회 회장은 새로 창립한 조선족협회에 만족해하시면서 로인협회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활동상황을 설명해주셨다.

녕파의 조선족 원로 최금단(오른쪽), 장정옥 로인 

두 지원군 어르신의 80돐 생신잔치 사진

관광하러 다니시는 녕파 조선족로인협회분들

녕파에 모여 온 조선족은 주로 의류업과 수산업에 종사하였다고한다. 녕파는 중국에서도 의류업이 손꼽히는 곳이고 또한 많은 의류브랜드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조선족 일군들이 한국인들을 따라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창업을 시작하였던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유명한 수산물 기지인 주산군도(舟山群島)가 녕파 동부에 위치했기 때문에 수산물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녕파조선족사회의 최초의 부가 창조되였던 것이다.

조선족 청장년들은 사업이 다망하여 별로 시간이 없었지만 자녀들을 따라 녕파에 온 어르신들은 서로 다니면서 조선족끼리의 만남을 이어왔다고한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조직된 것이 로인협회였다. 로인분들은 늘 한자리에 모이고 봄나들이를 하고 관광도하면서 만년을 즐겼고 따라서 뜻있는 청장년들도 어르신들에게 효도를 드리는 마음으로 로인협회활동을 지원해 주군 했다.

로인협회 어르신들의 가장 큰 걱정은 자녀들에 대한 민족전통교육이였다. 손주놈들이 아무리 귀여워도 낯선 땅에 와서 자기의 언어를 모두 잃어버리고 자기의 전통문화를 다 잊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은근히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족협회를 만들고 기타 도시에서 한 것처럼 우리말과 글을 배우는 주말학교라도 만들자고 적극 노력해 오셨다. 그러다가 사업에서 성공하면서 점차 여유를 가지기 시작하는 청장년분들이 적극 동조하고 드디어 조선족협회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녕파라는 이 낯선 도시에 우리민족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실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수없다. 하지만 이곳의 문화적 깊이를 모른다면 현지인들과의 교류와 접촉이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도 현지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조선족끼리 혹은 한국인들과만 어울린다면 우리의 우세가 크게 줄어들수밖에 없다.

녕파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하련다는 박영기 회장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였다. 비록 경제가 많이 발달한 곳이라고하지만 필경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고장인 녕파가 아닌가?!

글,사진/ 김성룡 중앙인민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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