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어머니 사랑이 저를 살렸습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6월27일 07시51분    조회:182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3)
◇신학봉(룡정)


1989년 겨울 가족이 함께


내 나이 금년에 80이라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에 우리 집은 평안구 평안촌 3여(지금의 동성용진 평안촌 3툰)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집에서 5리 떨어져 있는 평안소학교(동성소학교)에 다녔다. 하루는 동학들과 뛰놀다 다리를 상하여 걸을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열흘이나 매일 아침 나를 학교에 업어가고 저녁에는 업어오군 하였다. 이렇게 소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6년 개근상, 6년 우등상으로 종이와 연필을 탔다. 상을 타들고 집으로 달려오니 어머니는 너무 기뻐 저녁에 매 사람에게 닭알 2개씩 삶아 상으로 주시였다.

어머니는 일곱남매를 키우면서도 농사에는 못하는 일이 없고 어찌나 부지런한지 마당에는 닭과 오리가 우글우글거렸고 우리에는 돼지 두마리, 거기에다 염소, 개까지 기르다 보니 눈코뜰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그래도 어머니는 애들이 무병하게 자라는 그 재미에 너무나 즐겁다고 하시였다.

겨울이 물러가고 갈아엎은 논판에 물이 잔잔히 들어오면 어머니는 논두렁 감기에 나섰다. 그런데 대부분 논이 진흙땅이다 보니 삽에 흙이 묻어나 힘만 곱절 들고 축도 나지 않았다. 하여 삽을 팽개치고 두 손으로 흙을 떠다 두렁을 감으니 보기도 좋고 효률이 높아 하루 100메터 이상씩 논두렁을 감았다. 하여 한다 하는 남자들도 혀를 차군 하였다.

모내기철이 되면 어머니는 헌신을 신고 물판(수상육모)에 쪽걸상을 깔고 앉아 벼모를 뜨면 하루에 30~40메터씩 뜬다. 저녁이면 손과 발이 빨갛게 된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 쉬면서 앓음소리를 내군 하였다. 또 가을이 되여 낫을 두가락 갈아가지고 밭에 나서면 벼(4×6식)를 근 1무씩 베여 눕혔기에 젊은 남자들도 박수를 보내군 하였다. 겨울이면 농한기라 의례 쉬여야 했지만 어머니는 가마니 짜기 부업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일주일이 되면 가마니 80여장을 공소합작사에 싣고 가 팔아서는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군 하였다. 이렇게 힘든 줄 모르고 일하며 즐거워하시던 어머니에게도 무서운 재난이 닥쳐왔다.

세해(51년, 52년, 53년) 사이에 선후로 자식 세 남매를 하늘나라로 보냈으니 어머니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아팠고 얼굴은 10년 앓은 환자처럼 창백해졌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4년 5월 5일 중학교에서 원족 가는 날 내가 학교 운동장에 쓰러져 한광우(한어선생님)선생님이 나를 집까지 업어다 주다나니 선생님은 원족도 못 가시였다. 어머니는 너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날부터 앓기 시작한 것이 꼬박 6년이란 세월을 병마와 싸워야 했다. 밸 고장으로부터 륵막, 담낭, 동풍, 맹장에 58년도에는 요추결핵에 걸려 운신도 할 수 없어 대소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되였다. 어머니는 오전 일이 끝나면 점심시간에 나를 수레에 싣고 5리도 넘는 공사 위생소로 갔다 오느라 점심도 못 자시고 오후 일 하러 나가군 하였다.

어머니는 고양이 대골이 요추결핵에 좋다는 말을 듣고 왕복 60리도 넘는 석정골에 걸어서 갔다 오셨다. 어머니는 용하다는 한의원을 선후로 4명이나 모셔오다나니 나는 그들 한의원들의 자신만만한 통소리에 뜸만 400장, 침은 얼마나 맞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여러 의사들과 병원을 다녀도 효과가 없자 어머니는 나를 연변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받게 하고저 찾아갔다. 연변병원의 의사선생은 청진기로 가슴과 잔등을 검사하고 눈꺼풀도 번져보고 고무망치로 무릎도 두두려 보고 나서 “입원하지 말고 그 돈으로 환자 먹자는 것을 잘 먹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재차 입원시켜달라고 애원하시니 “집에 돌아가 마이싱(수입제 매우 긴장하였다)을 계속 맞으며 사과를 많이 먹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청해에 있는 외삼촌(오장룡)에게 전보를 쳐 마이싱 50병이나 구입하였다. 지금은 문만 열면 상점이 수두룩하고 상점마다 갖가지 과실이 보기 좋게 진렬돼 있지만 당시에는 사과 한근을 사려 해도 연길이나 룡정으로 걸어가야 했다. 어머니는 사과를 사려고 한달에 두세번씩 연길이나 룡정으로 갔다 왔다. 이렇게 사다 먹은 사과가 넉달에 230근이나 되였다. 시월의 어느 하루 내가 먹을 사과가 없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오후 1시에 연길로 사과 사러 떠났다. 사과를 사가지고 돌아서니 4시가 되여 달음질 치다 싶이 걸었으나 해란강변에 도착하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한손에는 사과주머니를 쥐고 다른 손에는 신을 쥐고 한걸음 두걸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만 돌을 빗디디며 물에 넘어져 사과주머니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어머니는 물속에서 손더듬으로 사과주머니는 찾았으나 신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 없었다.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 생각하며 어머니는 맨발바람으로 걸음을 재우쳐 7시 경에야 집에 들어섰다. 집식구들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머니를 보고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어머니는 우선 나에게 사과를 먹으라고 꺼내주시는 것이였다. 나는 한입 떼고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주사 맞는 시간을 아끼고저 병원에 다니며 며칠 간 강습을 받더니 주사 놓는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몇달 간의 치료와 간호를 거쳐 다리에 주먹 만큼 곪았던 자리가 터졌는데 최송학(공사병원 원장)선생님이 직접 와서 처치하였다. 얼마 후 외할머니가 사망하여 연길에 갔다가 하루 만에 돌아온 어머니가 내 환처를 보더니 흠칠 놀라는 것이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핀센트로 구데기를 집어내면서 눈물을 떨구시였다.

요추결핵에 걸려 일년 반 만에 어머니 손을 잡고 몇발자국 걸을 수 있게 되자 어머니는 보는 사람과마다 “우리 셋째가 살았다”고 자랑하였다. 그 후 얼마 간의 치료를 더 거치니 60년도에는 경한 로동에 참가할 수 있었고 61년도에는 정식 사원이 되였다.

하루는 길에서 중학교 때 반주임(박부길)선생을 만났는데 “네가 죽었다더니 웬 일이냐?”며 뒤걸음 치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나는 달려가 선생님의 손을 잡고 “어머니 사랑이 나를 살렸습니다!”고 했다. 이에 선생님은 “너의 어머니는 참말 위대한 분이구나!” 하며 감탄하는 것이였다.

62년도에 생산대 부대장으로 선거되여 앞뒤로 뛰여다녔고 그 해에 연변대학 조선어문 함수를 시작했으며 63년도에 한마을에 있는 처녀(안영숙)와 결혼하여 아기자기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나의 결혼식 날 난생처음으로 춤을 추시고는 눈물을 닦으시였다.

나의 세 자식중 아들며느리는 은행에서 사업하고 두 딸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는 수요에 의하여 1965년부터 량종번식농장에서 일하게 되였고 1972년에는 해남 육종사업에 참가하여 겨우내 따뜻한 해남에서 보내기도 했다.

일생 동안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는 1975년 당년 68세로 위암에 걸려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다시 올수 없는 하늘나라로 가시였다. 나는 지금도 상점에서 사과를 살 때면 어머니가 사과 사던 그 날 그 일이 생각나 가슴이 무거워지군 한다.

나는 1990년에 농학원 실험농장에서 퇴직하고 만년을 더없이 유쾌히 보내고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 이 좋은 세상에 단 하루라도 곁에 있어주면 그 얼마나 좋으랴! 마음속에 할 말이 태산 같이 많은데…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연변가정연구소에서는 7월 30일 문화봉사자팀 평생교육프로그램 회지 《한 알의 씨앗》 종합본 출간의식을 개최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자”는 신조의 새싹을 피웠다. 2008년 11월 첫 강좌를 시작으로 이듬해에 첫 창간호가 출간되기까지 팀원들은 열심히 필기도 하면서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자신들의...
  • 2017-07-31
  • 위홍산: “긴급한 상황에서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홍수로 제방이 파손되여 마을이 큰 피해를 입게 되였을 때 과감히 자기의 농업용 뜨락또르 차바곤으로 제방을 보호한 촌민이 있다.   왕청현 천교령진 신화촌 촌민 위홍산(59세)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21일, 백년일우의 홍수가 들이닥쳐 제방이...
  • 2017-07-28
  • 재칭다오 동문들이 하얼빈 조1중 교장단일행을 뜨겁게 맞이하고 있다.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만 기자=헤이룽장성조선족상회 산둥분회 임홍길 회장을 위수로 하는 하얼빈조선족제1중학교 졸업생들이 오는 9월 30일 70돐을 맞이하는 하얼빈 모교에 현금 5만 위...
  • 2017-07-28
  • 43만원어치의 물품 조달   우리 주에 큰 범위 폭우가 내린 후 주적십자회는 제일 시간에 긴급예비안을 가동, 상급 적십자회에 재해정황, 긴급전이인원수와 필요되는 구조물자를 신청했다.   20일, 주적십자회는 이불 1000채와 천막 10개를 안도, 돈화, 왕청 등 홍수피해가 엄중한 지역에 보내주고 도문, 룡정 등...
  • 2017-07-28
  • “폭우로 홍수 피해를 입은 리재민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생활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연길시 북산가두 판사처 리금수부주임에게 기부금을 전해 주는 김봉숙(좌 1)   연길시 북산가두에서 살고 있는 맹인 김봉숙은 련며칠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자금...
  • 2017-07-27
  • 1987년 졸업을 앞두고 길림시 풍만수력발전소에서. 세상에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스승이 없고 또 자기의 스승을 존중하지 않는 제자도 없으리라. 교원생활 29년을 마치고 이미 10년전에 퇴직한 나에게 30년전의 제자 황해경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3년전 가을의 어느날이였다. “선생님, 아무쪼록 로년에 신체...
  • 2017-07-26
  • 홍수는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만사가 해결된게 아니다. 집이 통채로 홍수에 떠밀려갔고 논밭이 물에 잠겨 살길이 막막하다. 홍수방지, 재해대처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구경 뭘 할수 있을가? 요즘 협회나 췬에서 자원봉사, 의연금 모금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한곳에 어려움이 있으면 모두가 일...
  • 2017-07-25
  •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28) ◇조동관(장춘) 로인회 활동에서 연설하고 있는 필자 1970년대 중엽의 어느 한 초여름의 청명한 날씨였다. 서란시를 끼고 있는 영안대대 순인소대에서는 모내기 고조에 진입했다. 하긴 하지까지 가지 않고 다문 2-3일이라도 앞당길 예산이다. 논판에 심어놓은 모들은 새파랗게 ...
  • 2017-07-25
  • 취재후기 | 연해지역 조선족 탐방 남경편(1) 남경에서 15년 나를 살게한 힘 가족   연해지역 조선족탐방 오늘 만난 첫 주인공은 23세에 남경생활을 시작한 최군(39세)씨다. 최군과의 인터뷰는 “혹시 도문의 오지공장을 아십니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되였다. 굴뚝, 김장독을 만드는 오지공장, 그곳이 대학...
  • 2017-07-25
  • 19일 저녁 7시부터 안도현의 대부분 향, 진에 큰비, 폭우가 내려 20일 오후 2시까지 안도현의 평균 강수량은 55.3밀리메터에 달했고 신합향, 석문진 등 5개 향진의 25개 마을이 정도부동하게 피해를 입었다. 특히 명월진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홍수로 도시 전체가 침수상태에 빠졌다.  수대의 차량이 홍수에 떠밀려갔고...
  • 2017-07-23
  • 보다 많은 시민들이 곤트란쉐리에 대한 리해를 돕기 위해 곤트란쉐리에서는 종종 체험활동을 진행한다. 특히 7,8월은 “방학체험월”로서 많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7월19일에도 한차례의 “친자활동(亲子活动)”을 진행, 후사모(후대사랑협회)와 함께 빵만들기 체험을 조직했다. 자상...
  • 2017-07-20
  •   (흑룡강신문=하얼빈)상지시에 거주하는 구대봉(65세)씨는 순박한 농민인데 그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면 실로 자랑차다.   구대봉씨는 이전에 연수현, 상지현 등지의 여러 시골마을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선후로 생산대의 보관원사업을 6년간, 재량사업을 7년간, 소대와 대대의 로년협회 회장사업을 도합 7년간 했다....
  • 2017-07-20
  • 윤수범동지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본인과 그의 가족들도 알고 있은지 오래 되고 우리도 일찍 알고 있었으니 모두 사상준비는 되여 있었으나 정작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접하고보니 정말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부분적 회원들과 함께 있는 윤수범(앞줄 오른쪽 세번째) 윤수범은 나...
  • 2017-07-19
  •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26) ◇양상태(길림) 1967년에 찍은 결혼기념사진 결혼사진을 보니 신혼생활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른다. 1967년 가을걷이가 끝난 후 어느 날 나와 자형은 소개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우리 동네와 20여리 상거한 합달만 마을에 선보러 갔다. 처녀 집에 도착하자 처녀의 식구들과 한...
  • 2017-07-18
  • 누군가를 한두번 돕기는 쉬워도 달마다 찾아가 꾸준히 관심하고 걱정하고 도와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든든한 바람막이가 ...
  • 2017-07-13
  •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아버지이다. 그런데 십여년전부터 숱한 자식들이 생겼다. 십여넌전에 나는 우연하게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 불우한 아이들이 많다는 걸 발견하고 사랑애심협회를 꾸렸다. 여기저기 뛰여다니면서 모금해서는 불우한 애들에게 학용품을 사주고 대학 가는 애들에게 학비도 마련해 주고 사람...
  • 2017-07-10
  • 화룡 문화가두 문흥사회구역 독거로인 위해 대리가정 결성   화룡시 문화가두 문흥사회구역에서는 대리자녀봉사팀을 뭇고 사회구역 간부들이 독거로인들과 대리가정을 결성하여 독거로인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전해주고 있다.   문흥사회구역에는 독거로인이 도합 114명 있는데 로인들은 슬하에 자녀가 없거나 자...
  • 2017-07-05
  • 연길시 대흥마을 김광철대장에 대한 촌민들의 찬사 집집이 된장 가공산업을 벌려 ‘장마을’로 알려지는 연길시 의란진 구룡촌 대흥마을, 장맛뿐이 아니라 화목하고 인정 많은 대흥은 또한 살맛 나는 마을이란다. 그래서인지 대흥에서는 도시로 이사나간 집이 극히 적고 서로 좋은 일에...
  • 2017-07-03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3) ◇신학봉(룡정) 1989년 겨울 가족이 함께 내 나이 금년에 80이라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에 우리 집은 평안구 평안촌 3여(지금의 동성용진 평안촌 3툰)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집에서 5리 떨어져 있는 평안소학교(동성소학교)에 다녔다. 하루는 동학들과 뛰놀다 다리를 상하...
  • 2017-06-27
  • “아마도 박선생이 지구촌의 ‘해당화대통령’으로 불릴 것 갔습니다. 지금부터 품위 있게 ‘대통령걸음’을 련습하세요… 허 허 허” 지난 5월 7일 아침 식사 때 조선족의 “리시진” (김수철. 93세, 연변농학원 교수, 식물박사)이  40년하제자(박영호, 54)에게 술을...
  • 2017-06-26
‹처음  이전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