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친형제면 이보다 더할가요”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8월22일 08시34분    조회:103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3

◇윤희남(룡정)

 

 

필자 윤희남

“똑, 똑, 똑.” 노크소리에 문을 여는 10대 소년.

 

“누구를 찾으세요?”

“음, 엄마 친구인데 너는 아마 모를 거야.”

“울 엄마는 지금 병원에 입원하셨는데요.”

“그래, 알고 있어. 방금 아빠한테서 들었거든.”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일은 아니구, 아빠랑 함께 집까지 왔다가 아빠는 엄마 데리러 병원에 가셨구 나더러 집에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해서 왔는데, 나 집에 들어가서 기다려도 될가?”

의아한 눈빛이면서도 소년은 “들어가도 되냐” 하는 나의 물음을 거절하기가 안스러웠던지 머리만 까딱이면서 비켜주었다.

일하던 작업복 그대로인데다 올망졸망 담은 세수대야까지 옆구리에 끼고 서있는 내 행색이 얼마나 초라했으면 소년은 이윽토록 눈길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이런 추한 꼴을 처음 보는 듯 싶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온종일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무너질 것 같은 느낌에 들어가자 마자 벽에 기대 쭈크리고 앉았다.

이는 내가 6년 전 한국에서 양력설를 하루 앞두고 겪은 일이다.

F4 비자가 시행되면서 출국 열풍이 더욱 거세게 일던 그 때, 나는 돈의 유혹을 이길 수 없어 남편과 함께 근 10년간 하던 자영업을 접고 한국으로 가게 되였다. 때는 겨울이 각일각 다가서는 11월말일이였고 도착지는 대구 경산이였다.

마침 시누이 부부가 그 곳에 있었기에 우리는 당분간 그들과 한집에서 지내게 되였고 그간 시누이네와 이웃으로 가깝게 지내는 호용이라는 한국인 부부도 알게 되였다. 그 젊은 내외간은 시누이네와 잘 지내는 사이여서인지 우리를 극진히 대해주었고 필수적인 수속까지 함께 다니면서 끝내주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 밖으로 취직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원래 요추간판 탈출로 허리가 변변치 않은 남편은 회사일을 한달간 하고는 더는 할 수 없게 되였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시누이네 집에 얹혀있는 것이 송구스러웠던 나는 아예 부부가 함께 일할 수 있고 류숙도 마련해주는 일자리를 찾기로 작심했다. 매일 신문에서 광고를 뒤지던 우리는 마침내 부부팀을 요구하며 류숙도 마련해준다는 고추건조장을 선택하게 되였다.

나와 남편은 그 즉시로 전화 련계를 가진 후 이튿날로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택시에 몸을 싣고 고추건조장으로 향했다. 택시는 약 한시간 반을 달려 편벽한 산골입구에 위치한 큰 건물 앞에 멈추어서더니 이곳이 고추건조장이라고 했다. 이어 작달막한 키에 몸집이 빵빵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혹시 전화로 약속한 분들이신지.” 하면서 맞아주었는데 사장이셨다. 사장은 곁에 있던 젊은 직원을 보면서 우리를 도와 짐부터 기숙사로 옮기게 하였다.

우리는 그 직원을 따라갔다. 건물 벽에 붙여지은 창고를 방불케 하는 낮다란 집들 앞에 이르러 그 직원은 우리를 보면서 이것이 기숙사이니 마음에 드는 칸을 잡으라는 것이였다. 창문도 없는 이런 집이 숙소라니, 불안하였다. 문을 열어보니 9평방도 안되는 작은 방엔 탁구공만한 전등알 하나가 천정에 대롱 매달려있었고 12촌짜리 구식 텔레비죤 한대가 방 한구석에 처박혀있는 외엔 아무 시설도 없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출입구 문에서 한메터 정도 사이두고 깊은 논도랑과 논밭이 있었고 주위엔 로천 화장실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물이며 화장실이 어디에 있냐 물었다. 그러자 그 직원은 난처한 기색으로 화장실은 건물 동쪽 맨 끝에 있고 물를 쓰려면 자기를 따라 오란다. 우리는 짐을 되는 대로 방에 처넣고 그 직원을 따라섰는데 그 직원은 오던 길를 되돌아 건물 안으로 되들어가 왼쪽으로 굽어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이 곳이 회사 식당이란다. 그러면서 래일부터 식사는 자기 손으로 이 곳에서 끓여먹어야 되고 물도 저기에 있는 수도물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이였다.

하느님 맙시사, 이곳이 작업장 한구석이지 어찌 식당이라고 한단 말인가. 살펴보니 랭장고 한대에 전기밥솥 하나, 길다란 상과 걸상 몇개 그리고 수도물이 전부인, 칸도 막지 않은 음침한 곳이였다. 동지섣달 추운 겨울 바깥이나 다름없는 어둑스레한 작업장 한모퉁이에서 홀로 밥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섬뜩해났다. 렬악한 환경이였다.

그러나 점차 화식조건을 개선해주겠다는 사장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어 우선 해보기로 작심하고 점심을 먹고는 오후부터 일를 시작하였다. 오후 일를 마치고 숙소에 오니 이건 또 뭐야, 오전에 짐을 둘 때까지만도 조용하던 숙소는 거센 전동기 소음으로 하여 출입문 유리마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초풍할 지경이였다. 알고 보니 고추건조실이 바로 숙소와 벽 하나 사이두고 있었고 육중한 전동기는 벽 쪽에 안치되여있었다. 워낙 수면장애를 겪는 우리로선 천금을 준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였다.

가자, 이곳은 아니다. 나와 남편은 일하던 손도 씻지 못한 채 짐짝들을 둘러메고 도로에 나섰다. 짧은 겨울해는 벌써 서산으로 꼴깍 넘어갔고 사위엔 어둠이 깔렸다. 시간을 보니 7시가 되여왔다.

막상 나오고 보니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막연하였다. 시내와 떨어진 외진 곳이라 도로에는 차량도 택시도 없었다. 시누이 신랑도 출장 나가고 집에 없었다. 그 날 따라 날씨도 엄청 추웠다. 고향이라면 친구들의 도움이라도 받으련만 생명부지인 이국땅에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청들 수 없었다. 인제는 영낙없이 ‘뚱배’(언배)가 되였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얼굴에는 뜨거운 것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아침부터 설친 배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서러운 생각에 머리 들어 차거운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마저도 우리를 조롱하는 듯 깜박거렸다. 1분 1분 시간은 어느덧 9시가 되였다.

어디라도 등지고 앉아야 밤을 날 것 같아 서성거리고 있을 때 남편이 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하는 것이였다. 행여나 하였지만 금시 도리질이 나가 다시 짐을 옮기려고 할 때 남편이 희색이 만면하여 “옮기지 마, 호영이가 오겠대.”라는 것이였다.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였다. 이국땅에서 이제 겨우 풋면목 밖에 익히지 못한 그가 온다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기뻤다.

그런데 두시간이 지났지만 가마 하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음이 점차 실망으로 번져가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불빛이 반짝이였다. 그러나 그 불빛은 우리를 스쳐 휙 지나가버렸다. 인제는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나와 남편이 지친 마음으로 다시 짐을 옮기려고 할 때 갑자기 남편의 폰이 울렸다. 안해가 병원에 입원하여 병원에 갔다 오느라 늦었으니 20분만 더 기다리라는 소식이 날아왔다. 기뻤다. 미칠듯이 기뻤다. 얼어붙기 시작했던 가슴에 난류가 굽이쳤다. 이윽고 진짜 그가 차를 운전해 왔다. 우리를 보던 그는 도리여 늦어서 미안하다며 우리를 도와 짐들을 차에 실었다. 그 순간 나와 남편은 무슨 말로도 고마운 마음을 표달할 수 없었고 그냥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경산으로 돌아온 우리가 시누이네 집으로 가려고 하자 그는 “이 밤중에 그리로 가지 말고 아예 우리 집으로 가자”면서 차를 집 쪽으로 운전하였다. 집에 이르러 그는 나를 내려놓고는 병원에 가서 안해를 데려왔고 식당에 들려 밥까지 시켜가지고 왔다. 따뜻한 온수에 샤워를 하고 밥상에 마주앉은 나는 “친형제면 이보다 더할가” 하는 생각에 가슴 속에서 뜨거운것이 울컥 솟아 올랐다. 새해 첫날 아침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보냈다.

혹한의 밤길를 달려오고 앓는 안해까지 동원하였지만 그 어떤 생색도 내지 않고 도리여 우리가 부담스러워할가봐 별일 아닌 것처럼 소탈하게 웃으며 배려하는 그들의 치사랑에서 나와 남편은 배려와 사랑에는 국경이 없음을 절실히 느꼈다. 지금도 설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그들 부부가 떠오른다. 잔병치례로 가끔씩 병원 신세를 지며 살던 그녀는 괜찮은지? 그때 10대 소년은 인젠 20대 끌끌한 젊은이로 성장했겠는데… 항상 형제처럼 “히야”라고 불러주던 호영이는 지금도 아마 주위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서 살겠지? 나는 그들의 생활에 행운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그들처럼 남은 여생을 사랑과 배려를 전하면서 살고파진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일본 도꾜에서 녀성전문병원 을 오픈한 리향란씨 리향란 주치의 지난 4월 3일, 비지니스거리로 번화한 일본 도꾜도의 킨시쵸(東京都錦糸町)역전 앞 상업빌딩안에 녀성전문병원 이 오픈했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조선족 리향란씨가 주치의를 맡고 있으며 일본에서 유명한 병원인 쥰텐도대학(順天堂大学)병원과 제휴진료를 진...
  • 2019-04-09
  •        핑크색 꽃망울이 아름다움을 터뜨리는 벚꽃축제의 계절, 일본의 조선족들한테도 오하나미는 하나의 놓칠 수 없는 이벤트로 되여있다.   4월7일, 청명절과 오하나미의 계절을 맞으면서 간사이조선족여성회및 경영자협회에서는 오사카 근교의信貴山のどか村공원에서 회원및 가족 50여명이 함께...
  • 2019-04-08
  • (흑룡강신문=하얼빈) 지난 30일, 주말 날씨가 꽃샘추위로 제법 쌀쌀한 가운데 동경의 벚꽃 명소는 개화기를 맞이한 벚꽃들이 만개하여 상춘객과 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었다.   이맘때가 되면 일본의 기상청에서는 각 지역별로 개화(开花)와 만개(满开) 시기를 예상하며 련일 매체에서도 특집을 만들어 대...
  • 2019-04-04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보람이 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나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면서 평생 아낌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온 길림성 연길시 공원가두 원월사회구역의 90세 고령의 김순자 로인은 몸이 불편하여 바깥출입이 힘든 지금도 누군가를...
  • 2019-03-28
  • 1급지체장애인 서순애 행복 찾아 수십성상—로동자와 제비 그리고 ‘붉은태양광장’ 서순애, 파가이주구에서 로동자들을 위해 격정을 불태우던 그때를 그리며. 로동자들을 형제처럼 생각하고 화룡시에서는 6,7년전에 순애네가 살던 춘화촌을 포함한 동부 교외 부지를 개발해‘붉은태양광장&...
  • 2019-03-27
  • 1급지체장애인 서순애 행복 찾아 수십성상—“무엇이든 내 두손으로” 손수 만든‘도르래판'으로  움직이는 서순애(56세),안방에서 차를 내오는 중이다. 마을의 ‘꾀꼴새’ 길림성 화룡시 룡성향 춘화촌(지금의 흥륭촌)에서 태여난 서순애(56세)는 척수성마비 1급지체장...
  • 2019-03-26
  •  -1급지체장애인 서순애 행복 찾아 수십성상--효심, 애심의 천사   효비를 세우다   서순애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상으로 조합해낸 부모의 합영 사진. 순애는 아버지가 돌아가는 그날까지 순애를 등에 업고 삶의 리치를 하나씩 깨우쳐 주신 정경을 못잊어하며 “바다보다 깊은 아버지 그 사...
  • 2019-03-26
  • 배급 타는 로동자 되고 싶어 무작정 지신록장으로 떠난 그 날 얼마전에 오랜 친구인 영호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영호와는 서로 멀리 떨어져있는 사이도 아닌데 생전에 자주 만나보지 못하고 또 가깝게 우정을 나누지 못한 일이 저으기 마음에 걸린다. 문득 지난날 영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이 머리 속에 새삼스...
  • 2019-03-25
  • [수기4] 보따리장사하면서 만난 그 때 그 사람들 1988년도 겨울, 여기저기서 돈을 모아 옷 장사를 해 어려운 집살림에 보탬하려고 무작정 연길로 떠났다. 연길 옷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샤쯔와 속내의를 도매가격으로 구매한 후 지방에 가 팔았는데 생각밖으로 불티 나게 팔렸다. 계산해보니 본전과 교통비용 등을 제하고도...
  • 2019-03-22
  • 매일과 같이 한국 경기도 수원시 영화동 장안공원의 한 휴식공간, 마치 전문 제공이나 받은듯 영화동에 거주하는 부분 조선족로인들이 오후 2시―5시 사이에 이곳에 모여서는 이야기꽃을 피워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10명 좌우로 모이는데 많이 찾아들 때면 20여명 모인다. 거개가 74세에서 88세로할머니들이며 연변을 비롯...
  • 2019-03-20
  • 대형계렬기획보도- 백성이야기(93) — 어머니의 생전 소원을 풀어드리려는 윤영학로인의 집착 윤영학의 어머니 요즘《길림신문》일본특파원 리홍매의 일본 관련 기사를 애독해오던 장춘의 윤영학(85세)은 문득《길림신문》을 통해 그의 어머니(전생금, 1893년 생)가 생전에 그토록 그리던 ‘일본딸’을 찾아...
  • 2019-03-04
  • 내가 힘들고 고통속에서 헤매고있을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와 비슷한 처지나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는게 솔직한 '인지상정'일것이다. 이른바 '동병상련', 저러고도 사는데 혹은 나와 비슷하다는 련민으로 뜻밖에도 내삶을 버텨낼 에너지를 얻는다. '사회적 존재'로 태여나고...
  • 2019-02-25
  • -리화-   성인자녀와 백발부모의 사이에 끼여있는 50, 60대. 백세시대 절반을 접고 보면 어느새 내 인생의 세대좌표 역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중간 그 자리에 와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온전히 나 자신 뿐만이 아닌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어느 자식의 부모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이여야 하는지. ...
  • 2019-02-19
  • 2월 4일 그믐날 저녁, 연길시 진학가두 남양위 21조에서 살고 있는 리홍하네 집은 그날따라 북적거렸다. 6명 독거로인이 한자리에 모여 그믐날을 함께 쇠기로 한 것이다. 객실에 들어서니 남양사회구역 왕점화 서기가 로인들에게 설 선물로 빅 스카프(大围巾)를 드렸다. 선물을 받은 로인들은 어린애마냥 기뻐하며 나풀춤을...
  • 2019-02-14
  • - 글 / 현성해 -     예술학교시절 강신자교수님과 함께   1. 꿈많은 어린시절   아버지께서는 넓은 바다의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나에게 성해(星海)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 간절한 기대만큼이나 나는 어릴적부터 다재다능한 소녀로 성장해왔다. 타고난 고운 목소리로 동네에서는...
  • 2019-02-13
  • 구역 로인협회 회원들이 장수로인들에게 축수하고 있다. 2월 1일 오전, 연길시 신흥가 민창사회구역에서는 사회구역주민들의 양로자질을 높이고 로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하여 관할구역 7명 장수로인들에게 설맞이 장수연을 마련해주었다. 사회구역 일군들이 장수로인들에게 붉은 꽃을 달아드리고 ...
  • 2019-02-03
  • 꽃꽂이와 설계에 대해 설명하는 박금자녀성. 요즘 꽃가게를 통한 꽃문화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너무나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매양 그런 꽃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나의 머리속엔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의 주제가가 떠오른다. “꽃 사세요, 꽃사세요. 어여쁜 빨간 꽃, 향기롭고 빛갈 고운…앓는 엄마...
  • 2019-02-03
  • 84세 할머니 노래 800여수 부를 수 있고 속담 550개 기억 290매의 그림을 그려서 13권의 화책 만들어 100세시대 70세~80세는 중년이요. 80세부터 100세가 로년이다. 우리 주위를 살펴봐도 수명은 전보다 더 길어지고 녀성이 남성보다 더 오래 사는 반면 그것도 시름시름 앓으면서 오래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식 하나 달...
  • 2019-02-01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5) ▩김숙자(길림) 동아리와 함께 등산하면서(중간줄 왼쪽 두번째가 필자)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인연을 연분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쭉 살아오면서 많은 연분을 맺어왔는데 그 가운데서 글로 맺은 것이 바로 내가 애독하는 조선문으로 된 《길림신문》과의 연분이...
  • 2019-01-25
‹처음  이전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