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꽂이와 설계에 대해 설명하는 박금자녀성.
요즘 꽃가게를 통한 꽃문화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너무나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매양 그런 꽃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나의 머리속엔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의 주제가가 떠오른다.
“꽃 사세요, 꽃사세요. 어여쁜 빨간 꽃, 향기롭고 빛갈 고운…앓는 엄마 약 구하려 정성담아 꺾은 꽃…”
그래서 그런지 꽃가게주인은 자꾸 영화의 주인공 꽃분이와 순희처럼 아픔이 있는,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느껴지군 한다.
꽃과 인연을 맺은지 벌써 23년이 되였다는 박금자씨를 만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흑룡강성 녕안에서 출장 온 친구가 마침 그 부근 호텔에 주숙을 정했는데 밖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손이라도 녹일겸 들어간 것이 바로 그녀가 경영하는 <꽃사랑 꽃방>이였다. 꽃보다는 시린 손을 달랠 수 있는 장갑을 진렬해 놓은 것이 눈에 띄였기때문이다. 꽃을 팔면서 곁들여 장갑이나 마스크, 모자, 우산과 같은 소상품을 파는 가게였다.
가게주인이 조선족이고 또 너무나 친절하고 자상하게 설명해주기에 꽃가게를 한지 몇년이 되는가고 넌지시 물었다. 1996년부터 꽃을 팔기 시작하였다니 연길치곤 거의 원조급이 아닌가?
룡정시 지신에서 태여난 박금자씨는 1985년에 지인의 소개로 연길시 북대촌으로 시집와 연길사람이 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시교의 농촌마을이나 다름없던 북대촌에서 잘 살아보기 위하여 열심히 일했다.
“처음엔 식품상점을 했어요.”
6년간 상점을 열심히 경영하여 벽돌집도 마련하고 색텔레비죤도 장만하였다.
상점을 그만 둔 다음에는 서시장에서 옷가게도 하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조선장사도 하였다.
“그땐 욕심도 많았고 부끄러운 줄도 몰랐어요. 돈이 된다는 장사는 다 하고 싶었거든요.”박금자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처녀애들처럼 깔깔 웃는다. 너무나 밝게 웃는 그녀를 보면서 이분한테는 항상 좋은 일만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박금자씨가 꽃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바로 1996년 서시장부근에 개업한 민영꽃꽂이가게에 취직하면서 부터였다. 그곳에서 꽃꽂이도 배우고 꽃곶이사범 자격증도 따낸 그녀는 독자적인 창업의 꿈을 무르익히다가 2004년에 그 곳에서 갈라져 나와 자기의 꽃가게를 차리게 되였다. 옛 서시장부근의 광주성, 김광선미용원 1층 등에 자리를 옮기다가 지난 2017년에 이곳 국자가 1068번지로 옮기게 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끝을 흐리더니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기 위하여 번화가가 아닌 집부근에 가게를 옮겼다고 어조를 낮추어 말한다.
광고사진 같지만 소박한 가게다.
아닌게 아니라 항상 밝은 얼굴로 고객들을 맞이하고 꽃의 가치와 선물방식 등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는 박금자(58세)였지만 그에게도 아픔은 있었던 것이다.
2013년 9월에 돈을 좀 더 벌어보겠다고 남편과 함께 한국에 갔는데 석달 려행비자로 간 남편이 4촌동생과 함께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친 것이다. 불법취업을 단속하는 사람들이 점심시간에 회사식당에 들이 닥치자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던 남편이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면서 중추신경을 다쳐 하신이 마비된 것이다. 당시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해났다고 한다.
“어데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었어요. 불법취업에 조선족이라는 리유로 숱한 발품을 팔았지만 나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어요.”
박금자는 외국인로동자인권쎈터, 외국인고용쎈터, 인권변호사협회를 발이 닳도록 찾아가 혀가 닳도록 하소연했지만 결국 법정의 결과는 패소로 밖에 나오지 않았다. 불법취업임을 뻔히 알면서도 고용하고 또 단속반이 나오면 어떻게 피하면 된다고 알려준 회사측의 책임자가 사직하는 것으로 고용주인 모 건설회사는 법의 제재를 피해가고 손해는 그녀가 고스란히 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운신을 바로 못하는 남편을 업고 한국에서 용하다는 의사를 다 찾아 다녔지만 결국 남편은 반신불수로 되여 휠체어 신세를 모면할 수 없었다. 어느날 남편은 박금자의 부축을 받으며 휠체어에 앉아 연길공항을 빠져나왔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는데 아무리 불치의 몸이라지만 내가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하느라면 꼭 걸어다닐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던 박금자씨는 손등으로 눈굽을 찍다가 민망한듯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꽃으로 화제를 돌렸다.
“한국에 체류할 때 저는 꽃가게를 많이 다녔어요.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다녔고 어쩐지 꽃만 보면 모든 번뇌가 가뭇없이 사라졌기에 다녔지요…”
그녀의 말처럼 꽃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 아닐 수 없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도, 결혼하는 신랑신부에게도, 학교로 가는 어린 학생에게도, 환갑을 쇠는 로인들에게도 꽃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신기한 힘을 과시하지 않는가?
“저는 꽃을 사는 사람하구 누구에게 왜서 꽃을 선물하는가고 많이 묻군했지요.” 꽃을 사는 사람과 선물하는 상대, 용도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체크하면 어떤 꽃을 어떤 모양의 꽃묶음(바구니)을 만들 것인지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똑 같은 꽃일지라도 배렬순서에 따라 확연히 다른 꽃바구니가 되거든요. 항상 내가 선물한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고 선물하는 사람도 기분이 좋은 꽃을 만들 수 있답니다.”
가게 내부가 진짜 꽃밭이다.
23년의 꽃꽂이공력은 그녀의 잽싼 솜씨에서도 나타난다. 결혼 3주년을 맞아 안해에게 줄 꽃을 만들어달라는 고객에게 세가지 색갈의 장미 15송이, 싱싱한 란초 5송이에 파란 밑가지와 붉은 씨앗으로 꽃바구니를 만드는데 10분도 안걸린다. “세가지 색은 3년을 뜻하고 수자 5는 길한 수자거든요. 붉은 씨앗은 건강한 자손을 뜻하지요…”설명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꽃곶이에도 학문은 많았다.
연변농업발전은행에서 공회주석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전미화녀성은 박금자씨와 사귄지 20년에 난다. 그는“우리 단위 수백명 직원들의 생일 날자와 전화번호에 따라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아침 6시반에 꼭꼭 꽃을 배달해주었어요.”라고 말하면서 박금자씨에 대해 엄지를 내민다.
“전날에 전화로 나이와 집주소를 확인하고 6시반에 생일축하꽃이 배달된다고 말하면 직원들은 남녀불문하고 기뻐서 야단이였지요.”
지금 연변병원과 장의관의 꽃배달도 박금자씨가 전담하고 있다.
전미화녀성은 반신불수의 남편이 누워있는 집과 고객들이 기다리는 꽃가게 사이를 뛰여다니며 항상 얼굴에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박금자처럼 마음씨 곱고 강한 녀성은 이 세상에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와중에 꽃가게를 경영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한테 꽃꽂이도 배워준다면서 혀를 끌끌 찬다.
꽃꽂이 학습반 학원들과 함께.
마침 흑룡강에서 온 친구가 옆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다가 돈지갑을 꺼낸다.“래일 오전 열시에 한성호텔 7층 회의실에서 중학생글짓기콩클 시상식을 하는데 저의 학생 둘이 수상합니다. 꽃 두묶음 부탁합니다.”
꽃을 사는 남자가 멋있다더니, 시골냄새 나는 친구가 이처럼 멋있어 보이기는 처음이다. 꽃을 몇번 사봤냐는 나의 물음에 친구는 시무룩이 웃는다. 그리고는 내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넉살좋게 말한다.
“이게 처음이야!”
강하고도 아름다운 꽃, 아마 나도 꽃을 좋아하는가부다.
/글 사진 길림신문 김태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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