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일본인상기23]일본인들의 장례식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3월13일 09시13분    조회:91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22년전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첫날부터 대변인으로 나서준 히사타케(久武)씨, 내가 처음으로 접촉한 일본인이였던 그가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2007년 여름이였다.

마지막 병문안을 갔다 온 후 한달만에 전화를 받고 숙야(通夜)장소에 갔다.

생전에 리론적인 변론을 즐겼던 히사타케씨는 약물치료를 거부하고 물리치료를 견지하면서 자기식대로 인생을 마무리지었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반년 후부터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에 대한 인수인계, 정리를 시작하였으며 처자들에 대한 유산처리 등 자기가 떠난 후에 마무리 지어질 일들을 하나하나 미리 처리하는 일상을 보냈다.

숙야장에서 만난 그의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장례식장을 미리 정해놓고 참석할 분들 20명만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유일하게 가족 아닌 지인으로 참가하게 된 우리 가족이였다. 아니 히사타케씨한테 우리는 가족이였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고인을 보내는 의식인 츠야(通夜)와 장례식은 이틀에 걸쳐 진행된다.

장례식 전날 저녁에는 가족친지들과 가까운 지인들이 선향을 피우고 승려의 독경을 들으며 ‘고인을 지킨다’ 혹은 ‘고인과 함께 보낸다’는 숙야의식을 가지는데 이것이 츠야(通夜)이다. 대부분 경우에 고인과 함께 마지막 음식을 나눈다는 의미로 잠간씩이라도 음식을 먹게 된다.

시간을 낼 수 없으면 숙야에만 참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족장인만큼 우리는 이튿날 장례식에도 참가했다.

조용하고 정중한 장례식장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즐겼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국화꽃으로 장식된 제단에는 웃는 히사타케씨의 영정사진이 모셔져 있었다. 역시 본인이 생전에 정했다는 사진이였다.

3면 조각으로 된 목제 관 속에 누워 있는 히사타케씨의 얼굴은 익살스러웠던 생전의 기억을 불러올만큼 그대로였다. 하얀 국화꽃을 고인의 머리 맡에 올리면서 마지막 모습을 기억에 담으려고 한참을 응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아간 사람의 유체를 똑똑히 본 적은 그 때가 처음이였다.

일본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습관이다. 돌아간 사람에 대한 애달픔과 생전에 가졌던 정분을 귀하게 여기여 고인의 유체에 한사람 한사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생전에 있었던 고인과의 추억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으면서 화장이 끝날 때까지 한시간 정도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냈다.

다음엔 (拾骨)습골절차, 즉 오코츠아게(お骨上げ)였다.

가까운 가족만이 참가할 수 있는 절차에도 우리를 참가시키라는 히사타께씨의 당부가 있었다 한다. 생전에 문화의 차이에 대해 늘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본인의 장례문화를 알려주려는 고인의 깊은 뜻이였다.

친족부터 순서대로 두사람이 동시에 저가락으로 골회를 집어서 납골항아리에 넣는 의식이였다. 다리부분으로부터 머리에로의 순서로 진행되는중 남편과 나는 제일 마지막 차례로 오코츠아게를 마쳤다.

그렇게 가족처럼 가까웠던 히사타케씨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처음 나리타공항에서 일본에서의 적응방법에 대해 하나하나 알려주었던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셈이다.

상상외로 너무 정중하고 품위가 있는 일본의 장례식문화였다.

당연하게 조문객들은 거의 모두가 검은색 복장에 검은 색 양말, 검은색 넥타이, 녀성분들은 구두와 가방도 빛이 나지 않는 검은색 소재의 걸로 착용하였다.

갑자기 생기는 상사가 걱정이 되여서 장례식 때 입을 상복만은 제때제때 드라이클리닝을 해 두어야 한다고 습관처럼 말하는 주부들의 말도 늘 들어왔듯이 고인을 보내는 매너중의 하나인 상복을 갖추지 않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용한 일본인들인만큼 장례식장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대외인을 부르지 않은 가족장인데도 고별식은 시종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진행되였다. 약간의 흐느낌소리가 들리고 눈굽을 찍는 모습들이 보이는 가운데 소리내여 통곡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친족을 영영 보내는, 리성을 잃을만도 한 고별식에서 소리내여 우는 사람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일본인들의 장례식문화에는 ‘울지 않는 일본인’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무사(武士)시대로부터 우는 모습,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사무라이가족의 미덕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하는데 그것이 일반인들 속에서도 깊이 침투되여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 감정에 충실하여 가족을 잃은 슬픔을 통곡하는 형식으로 달래이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만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리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 한다.

장례식장은 슬픔을 공유하는 장소이기전에 공적인 장소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 눈물을 감추고 슬픔을 견디는 마음가짐으로 장례식에 참석해준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쳐드리는 것을 자제하며 고인에게 안심하고 떠날 수 있도록 기품 있고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족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본인들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법률상 사망후 24시간이내에는 화장을 못하기 때문에 사망진단서를 받은 당날에는 유체를 집에다 모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하여 친족들만 모이는 그 때에 고인과의 리별을 충분하게 한다고들 한다.

히사타케씨를 보낸 이듬해인 2008년에 일본영화 《굿' 바이: Good & Bye》(おくりびと)가 개봉되였다. 제 81회 미국아카데미상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일본의 장례식문화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료해할 수 있게 되였다.

고인에 대한 공경함과 참가자들에 대한 배려에 머리가 숙여짐과 동시에 울지 않는 일본인, 아니 울지 못하는 일본인들을 두고 ‘참고 견디다가 슬픔의 방식을 잊어버리고 마는것이 아닐가’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