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소년범들의 자애로운 ‘할머니’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5월22일 15시12분    조회:79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육소(이하‘교육소'로 략칭) 8명 소년범의 자애로운‘할머니'인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裴永爱)의 페부지언이다.

지난 15년 사이에 배영애는 7명의 소년범과 1:1로 짝을 맺고 그들에게 진정어린 사랑을 베풀어왔다. 올해에도 그는 또 한명을 맡았다. 가족의 방치 지어는 버림을 받은 철창 속 소년범들에 대한 배영애의 사랑은 자기의 친‘손군'을 대하듯 그토록 지극했다.

시작이 절반, 꺼질줄 모르는 열정

처음 남관분회에서 솔선적으로‘소년범 돕기'활동을 검토할 때 배영애는 사상파동이 컸다. 장춘시제1식료품공장에서 재직 시 우수당원, 기준병, 3.8붉은기수 칭호를 수여받았던 그였지만 “좋은 애들도 못다 돕겠는데 하필 철창 속의 범죄자들을 도와야겠는가”하는 의논에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가 정작 교육소에 가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였다. 2004년 교육소에 갇힌 500여명 소년범중 조선족이 105명이였고 부모가 없는 아이가 39명이나 되였다.

배영애는 첫 짝으로 소년범 왕일(가명)을 맡았다. 왕일은 한족 아이였는데 잘 생기고 키도 컸다. 알아보니 어려서 부모가 리혼하는 바람에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할머니가 세상을 뜨자 도적질을 하다가 어느 날 경찰에 잡혀 교육소에 들어갔다.

“왕일이 부모의 버림을 받지 않았더라면, 할머니가 세상뜨지 않았더라면 기로에 들어서지 않았을 것입니다!”왕일의 처경을 너무나도 안타깝게 여긴 배영애는 늘 이렇게 말하며 속마음을 태웠다.

알고 보니 교육소 소년범들은 거의 다 부모로 인해 가정이 파멸된 후 사랑이 결여한 채 절주 없이 생활하다가 어느 순간에 착오를 범한 애들이였다.

“날 때부터 나쁜 아이였겠습니까?”이렇게 반문하는 배영애, 그들이 철창 속에 갇힌 사유의 자총지종을 알게 된 후부터 그는 소년범들의 자애로운‘할머니'로 되여 그들에게 가족 같은 사랑을 베풀기로 작심했다.

소년범의‘할머니'로 된 첫해부터 배영애는 해마다 여러번 교육소에 가‘손군'들을 만났다. 번마다 려행을 떠나는 것처럼 큰 보따리를 메고 갔다. 보따리 안에는 생활용품, 학습용품이 들어있었는가 하면 뢰봉서적도 들어있었고 고기졸임, 김치, 고추장, 만두 등 맛나는 음식들도 들어있었다. 그래서 애들은 무척 배영애를 좋아했다.

왕일은 키도 몸매도 배영애의 아들과 비슷했다. 집에서 멋진 신발이나 멋진 양털내의를 입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 배영애는 왕일이 마음에 걸렸다. 왕일에게 똑 같은 걸 사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아들의 옷을 갖고가 왕일에게 입히군 했다.

왕일은 배영애만 보면 그냥 얌전하게 히죽이 웃어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유감스러운 일이 생겼다. 왕일이가 출옥한다는 날에 며칠전부터 정성껏 준비해둔 선물을 갖고 남관분회의 주임 장순자와 함께 교육소에 가보니 아쉽게도 왕일은 이미 떠나고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부랴부랴 장춘기차역으로 달려갔다. 여기저기 아무리 찾아봐도 왕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또 뻐스터미널에도 가보았다. 거기에도 없었다. 그들의 온몸은 땀벌창이 되였다. 너무나도 애석해 배영애는 마구 통곡치고 싶었다. 그날 배영애도 울고 장순자도 울었다.

“그 애는 특별히 가련한 애였습니다. 장춘에 친척도 없었고 수중에 돈도 없었지요…” 배영애는 지금도 그 애를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단다.

송이(가명)는 조선족아이였다. 키도 작고 얼굴도 검고 별로 웃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러번 만나 얘기를 해보니 아주 인정스러웠다. 송이는 부모가 리혼한 후 홀로 생활하다가 범죄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배영애가 교육소에 가면 송이는 번마다 얼굴에 웃음꽃을 활찍 피웠다. 배영애가“할머니 안 보고 싶었어?”하고 물으면 송이는“보고 싶었습니다”라고 소리를 높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송이가 출옥하는 날, 교육소의 대문이 열리자 송이는“할머니”하고 웨치며 자기를 마중간‘할머니'를 향해 달려나왔다. 송이는 배영애가 사준 새 옷과 새 신을 신고 나왔다. 옷이 몸에 맞고 신발이 발에 딱 맞으니 보기가 좋았다. 그런데 허리띠가 없어 바지가 좀 처져내려갔다. 배영애는 즉시 자기의 신발끈을 풀어 송이의 허리띠로 매여주었다.

그날 배영애는 갖고간 두부를 송이한테 먹였다.“이걸 먹으면 다시 철창 안에 안 들어간다.”롱이 섞인 배영애의 말에 송이는 그만 감격된 나머지 눈시울을 적셨다.

송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각자 한국과 로씨야에서 돌아와 아들을 마중했다. 그들 부부는 눈물을 머금고 배영애에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면서“꼭 아들을 잘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떠날 때 송이의 부모는 배영애에게 지페 몇장을 드렸다. 그러나 배영애는 그 돈을 다시 송이의 손에 쥐여주면서 “이걸로 손전화를 사서 할머니한테 전화를 자주 하라”고 부탁했다. 그 후 송일은 정말 그렇게 했다. 대련에서 일하는 송일은 지금도 전화를 자주 걸어온다. 배영애도 전화에서 늘“너 잘만 하면 전도가 유망하다”고 말해주면서 송이에게 힘을 실어주군 한다.

왕삼도 불쌍한 한족아이였다. 아버지가 살인범으로 사형당하고 어머니가 재가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안 지나 어머니도 세상을 떴다. 교육소에 들어온 후 왕삼이를 보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삼은 늘 우울하고 말도 하기 싫어했다.

배영애를 비롯한‘후원할머니'들이 나타난 후부터 그 애는 차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후 표현이 좋았고 앞당겨 출옥하게 되였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 지가 문제였다. 남관분회에서는 교육소의 령도와 토론하여 그 애를 연변에 있는 집까지 데려다 향정부와 이붓아버지에게 맡기기로 했다.

왕삼이 고향에 도착했을 때 그의 이붓아버지와 촌당지부 서기가 따뜻이 맞아주었다. 촌에서는 왕삼을 당지 양로원에 배치하여 출근하도록 했다.

“앞으로 5년, 10년 더 맡을 것입니다”

배영애는 어느 날, 소년범 강사(가명)의 생일을 쇠주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생일날에 특별히 격동되군 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타서 아이들을 새 사람으로 되게끔 인도합니다.”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강사는 초불을 부는 순간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는“고맙습니다. 꼭 잘해 사회의 쓸모있는 사람으로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로임 2000여원으로 정말 조련잖았겠습니다”

기자의 얘기를 들으며 배영애는 웃으며 말한다.“기실 저는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 뿐입니다. 그 애들이 새파란 어린 나이에 착오를 범해 철창살이를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아까와서요.”

배영애는 올해 82세이다. 그는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언제나 락으로 여긴다.

“저는 돈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여생을 차세대관심사업에 몰부으렵니다. 5년이고 10년이고…”

배영애의 인생관, 가치관이 묻어나는 진솔한 고백이다.

2015년 《전국차세대관심사업선진사업자》 영예증서를 수여받은 배영애

배영애가 수여받은 《전국차세대관심사업선진사업자》 영예증서와 메달

/ 길림신문 박명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