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백성이야기74]무용가 양성에 인생을 걸고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3월21일 10시52분    조회:197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동방가무단의 안정, 미국에서 새로운 무용인생에 도전

 

쇼우스토펄(Showstopper)은 미국 아마추어무용가(본업으로 하지 않고 무용을 애호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경연대회로서 해마다 전미 40개 지역의 무용애호가들이 불꽃튀는 경연을 펼치며 프로급수준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 쟁쟁한 경연가운데서 미국 서부지역에서 최우수상과 톱10등안에 드는 학생들을 많이 배양해낸 선생님이 바로 독무와 리드무용(领舞)가로 동방가무단을 풍미하던 조선족 무용가 안정(1965년생)이다

그는 9살되던해에 일찍 심양군구 천진가무단 모집에 응시할 정도로 어릴적부터 무용에 남다른 호기심과 재능을 갖고 있었다.

나이가 어려서 받아줄순 없지만 무용가의 천부적 소질을 지니고 있으니 잘 배양해보라는 가무단 단장의 조언에 따라 그의 부모님은 당시 길림성 가무단의 무용계 권위이며 지금은 중국 무용가협회 고문인 최선옥무용가를 모시고 딸에게 무용을 가르치게 하였다.

조선민족의 무용예술을 찾아서

장춘태생인 안정은 11살되던 해에 군인인 부모님의 권고대로 자기 민족 무용예술을 배우고 민족의 언어와 문화습관을 배우기 위하여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발레도 좋아했지만 최금성민간무용가를 계몽선생으로 모시고 조선민족무용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어갔고 2학년 후학기에 최선생님이 안무한 무극<진달래> 에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라 연변무용가 협회로부터 우수표현상을 수여받았다.

4학년때에는 연변가무단의 주상돈무용가와 함께 최옥주발레선생님이 안무한 군무에서 남녀 주인공으로 호흡을 맟추며 동북3성에서 일등상을 수여받았다.

그의 재능은 연변예술학교의 높은 인정과 총애를 받으며 졸업후 발레선생님으로 남게 되였다.

무용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가 17살되던 해에 중앙민족학원 무용대학에서는 전국에서 제1기 무용학생들을 모집하였는데 안정은 남녀 24명중에서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민족무용의 요람에서 그는 온갖 심혈을 기울이며 정규적인 음악리론과 중국 56개 소수민족 무용의 정수를 흡수하며 졸업할때에도 1등의 월계관을 따냈다.

안정이 출연한 조선족 무용 <장백폭포>

1986년, 무용대학 졸업생들의 아름답고 정채로운 전국 회보공연은 각 예술단체 유명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을 들썽하게 하였으며 안정의 우아하고 황홀한 무용은 하이라이트를 받으며 졸업무대를 눈부시게 장식하였다.

그는 놀랍게도 동방가무단, 중국인민해방군 총정가무단 등 수도권에 있는 유명한 5대 가무단으로부터 모두 취직해달라는 요청과 대학교에서도 남아달라는 요청을 한꺼번에 받게 되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기쁨의 환성을 질렀고 무용가의 길을 걸으면서 가장 행복하고 자호감을 느끼는 순간이였다”며 그때를 회상하였다.

휘황찬란했던 무용가의 전성기

안정은 대학시절부터 간절히 바라던 꿈이 현실로 다가온 가슴벅찬 기쁨과 환희를 안고 21살 꽃나이에 중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국가급 예술단인 동방가무단에 입단하였다.

3년간 무대경험을 쌓고난 1989년, 그는 동방가무단이 창립된이래 네번째로 성황리에 주최하는 <해외풍정>대형 무용만회에서 화려하게 솔로무용가로 데뷔하였다.

잇따라 안정은 동방가무단의 크고 중요한 무대에서 리드무용가로 전성기를 누리며 해마다 285차에 달하는 공연을 하면서 국내외의 우수한 민족무용을 관중들에게 보여주었을뿐만아니라 문화사절단 신분으로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 많은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중국의 전통적인 민족무용과 현대 무용을 널리 전파하였다.

저명한 가수 성방원(成方圆)등 동방가무단 연원들과 함께(오른쪽 세번째 안정)

1995년에 안정은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주최한 문화부 춘절만회, 그리고 일본수상이 중국을 방문하였을때에 세련되고 격조높은 솔로무용을 선보였다.

동방가무단에서 주요무용가로 활약할수 있었던 비결을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진정한 무용가는 무용기술도 뛰여나야 하지만 음감 등 여러 요소들을 포함한 무용감각을 통해서 그것을 아름다운 예술의 정수로 빚어내야 합니다. 다행히 저의 이런 무용감각들이 은사님들에 의해 발굴되고 배양되였고 또한 무용예술에 대한 저의 완벽한 추구와 끈질긴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무대를 떠나다

11년간 동방가무단에서 휘황한 무용 전성기를 누린 안정은 31살이 되면서 솔로와 리드 무용가의 고봉기에 이르렀다는것을 직감하고 우아하게 무대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1997년에 건강에 약간이 이상이 있어 병가를 신청하였고 단장은 휴식을 잘 취하고 설령 무대에 오르지 않더라도 몇년간 안무학교에 보내줄테니 안무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우연하게 친구가 요청장을 보내주어 안정은 미국방문중에 설마하며 영주권을 신청하였는데 뜻밖에도 35일만에 <특수인재>라는 명목으로 영주권을 받게 되였다.

그는 앞날에 대한 진지한 고민끝에 마침내 1998년에 한치앞이 불투명한 미지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중국식당 웨이트리스로부터 시작한 이민생활

안정은 로스안젤스 여러 중국식당을 찿아다니며 웨이트리스 일자리를 구했지만 그마저도 경험이 없다는 리유로 거절을 당하다가 겨우 친구의 소개로 새롭게 오픈하는 홍콩식 레스토랑에 취직하게 되였다.

하루종일 힘들게 웨이트리스에 잡다한 곁일들까지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녹초가 되여 머리맡에서 울리는 전화기를 잡을 기운조차 없었다.

한달가량 지나서 중국타운의 한 패션복장가게 사장이 “캘리포니아에 세계일류의 품위있는 웨이트리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찿아 왔다”며 가게에서 일해달라고 청들였다.

그때서야 안정은 식당주인이 두주일만에 시급을 세배로 껑충 올려준 까닭을 알게 되였다.

낮에는 패션가게에서 모델겸 영업원으로, 저녁에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던중에 로스안젤스 방송국 아나운서 고원(高源. 지금은 상해 텔레비죤방송국 아나운서)의 연줄로 규모있는 중국인 학우회행사에서 동방가무단의 실력을 과시할 기회를 얻게 되였다.

이튿날, 안정은 로스안젤스 매스컴을 타면서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되였고 그 뒤로부터 크고 중요한 행사들에서 <감사금>을 내고 그를 정중히 초빙하였다.

귀인의 도움으로 무용학교를 오픈

안정은 미용실에서 우연히 훙마마라는 중국분을 만나 얘기를 나누던중에 그에게 대학생딸이 있는데 무용을 배워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무용을 배우겠다던 딸이 안정선생님의 무용재주와 기질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세번을 배우겠다고 하였다.

추석명절에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함께 (2015년)

훙마마는 안정에게 무용학교를 꾸려보라며 별장같이 호화로운 자택 지하실 전체를 내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결국 여러 과정을 걸쳐 훙마마의 지인이며 자선단체 사업가인 쑈우완이라는분이 선뜻이 3만불을 후원해주겠다고 나서서 두분이 함께 건물 임대로부터 장식, 학생모집 광고까지 모든것을 빈틈없이 준비해주었다.

이렇게 생각밖에도 안정은 두분 귀인의 도움으로 미국에 온 이듬해인 1999년 9월에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부자동네 뉴포트 비츠에 <안정무용학교>를 세웠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데 무용인생을 걸다

안정은 주로 중국이민자 자녀들을 상대로 4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년령과 재능에 따라 여러 그룹으로 나누고 주로 발레, 조선족 무용을 포함한 민족무용, 재즈댄스와 탭댄스(踢踏舞)를 가르친다.

무용을 과외활동으로만 즐기는 그의 학생들은 대부분 신체적인 구조나 예술적인 감각면에서 보면 무용가로 되기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안정은 동방가무단의 유명한 무용가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그동안 쌓아온 무용예술의 진수와 노하우로 아마추어 무용가들에게 프로의 가능성을 키워주는데 도전하고 있다.

2001년 3월에 첫 문예공연을 성황리에 펼쳤는데 지역사회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으며 학부모들로부터 지금까지 보아온 무용학교 공연중에서 실력이 제일 우수한 공연이였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학생수는 300명까지 달하였고 무용선생님도 5명을 초빙하였지만 2006년부터 그는 학생들의 수자보다는 무용의 질에 중점을 두고 한그룹을 6-8명으로 소수정예부대를 만들고 로스안젤레스에서 고급수준의 무용학교를 꾸려가고 있다.

전미 무용경연 쇼우스토펄에서 서부지역 최우수상 수여

전미 쑈우스토펄 서부 무용경연에서 특별히 니나 장이라는 그의 학생은 련속 3년간이나 발레 최우수상을 따냈는데 프로발레 수준급이다.

지금까지 해마다 18차에 달하는 회보공연을 해오고있는데 그는 매개 학생들의 앨범과 여러가지 무용종목 앨범들을 이쁘게 디지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공연 당일에 관중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는 무용교재를 편집할뿐만아니라 무용복디자인, 무대설계, 음향설비, 조명, 소도구 등 모든것을 설계하고 지휘하며 무용총감독 역활을 완벽하게 담당하며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있다.

로스안젤스에서 국제위성TV 인터뷰를 받고 있는 안정(공연이 끝난뒤)

무용은 안정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가고 묻는 필자에게 그는 주저없이 대답하였다.

“무용은 저의 생명입니다. 저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가는데 도전하며 분신같은 저의 아마추어무용가학생들을 프로의 수준으로 배양하는데 저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길림신문 미국특파원 리화옥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