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107]애타게 찾아낸 증거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0월26일 00시00분    조회:150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5)

▩최진옥(화룡)

필자 최진옥 사무실에서

2010년 7월 28일,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은 폭우의 영향으로 하천의 물이 급속하게 불어나면서 홍수방지표준이 낮은 제방들이 볼품없이 파괴되였다. 상급의 자금조달이 륙속 도착하면서 재해손실이 제일 심한 1만 2000여메터에 달하는 제방을 복구하게 되였다.

현장책임을 맡았던 나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제방복구 현장에서 기술지도를 하고 질량검사를 하고 공사진도를 다그치면서 공사건설 현장마다에 발자국을 수없이 남겼다.

해란강 송하평구역의 제방을 복구할 때였다. 해란강과 기수동골안의 합수목 오른켠에 위치해있는 주민구역은 홍수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주민집들이 홍수에 밀리면서 피해가 엄중하였다. 현유의 하천 너비는 16메터 남짓 밖에 되지 않는데 표준 내 홍수를 감당하려면 하천너비가 적어도 30메터를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설계보고 비준서를 손에 들고 나는 그만 억이 막혔다. 공사건설 자금에는 토지에 대한 보상금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몇십년을 알뜰하게 다루던 뜨락을 제방복구 건설 때문에 적어도 14메터를 내놓으라고 하면 호응할 주민이 있을가? 그것도 트집을 잡는 데는 이름 있는 주민구역에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무상으로 내놓으라고 하면 벌둥지를 헤치는 거나 다름이 없을 텐데. 공사의 순조로운 진척을 위하여 지지해주십사 주민들을 설득할 용기마저 없었다.

어찌되였건 공사는 추진해야 했다. 공사건설을 다그치면서 주민들에 대한 설득사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내 예상과 같이 십여호에 달하는 20여명 주민들이 일제히 나를 에워싸고 서로 손가락질까지 해가면서 토지사용증이 있으니 토지보상을 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입안이 마르고 입술에 물집이 생기고 목소리마저 변하고… 주민들의 손가락질에 푸접 좋게 대응하면서 며칠 내내 설득사업을 했어도 진척이라고는 꼬물 만치도 없고 공사는 끝내 중단되고 말았다. 주민들의 항의에 공사를 다그칠 방법이 없었다. 현장책임을 맡은 나만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바쁘고 애매한 속을 끓이며 해결방법을 찾아헤맸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일을 밀고 나아가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주민구역에 찾아가서 토지사용증을 보여줄 수 있는가고 청을 들었다. 생각 밖으로 흔쾌히 허락을 하면서 토지사용증을 내보이는 것이였다. 그런데 토지사용증 발급 날자를 보니 홍수가 지나간 후였다. 한동네의 다른 몇집의 토지사용증을 보아도 모두 홍수가 지나간 후에 발급한 것이였다. 주민들 설득사업에 획기적인 전변을 가져다줄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나는 해결방법을 토지사용증 발급 날자에 두었다.

2012년 7월 공사장에서 일군들과 함께

유관 부문에 상황을 반영했더니 주민들이 다루는 현유의 뜨락이 하천이였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한다. 여러 경로를 통하여 조사를 해보니 현유의 주민구역에 딸려있는 뜨락은 원래 물이 흐르던 해란강 하천바닥이였는데 모 국영단위에서 가속주택을 지으면서 외부로부터 흙을 실어다 하천을 메우고 뜨락을 넓혔다는 것이였다. 현지를 살펴보아도 물곬이 이상하게 굽이지고 하천 폭이 불시에 좁아진 것이 자연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유력한 증거를 제공하는 증인도 나섰다. 하지만 가석하게도 나는 이런 증거를 유관 부문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몇십년간 얼굴을 보면서 한동네에서 살아온 그들 사이에 제방복구 건설로 반목이 생기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증인과 증거를 사용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에서도 나는 맥을 버리지 않았다. 원래 하천이였다면 어디엔가는 꼭 증명을 내세울 만한 근거가 있으리라 믿었다. 희망을 안고 자료실에 파묻혀있다 싶이 하면서 자료를 찾아보고 지도를 찾아 확대경으로 꼼꼼히 살펴보아도 유관 부문을 설득시킬 만한 유력한 증거를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공사를 끝마치고 교부해야 할 시간은 하루하루 눈앞에 다가오는데 중단된 공사를 다시 가동시킬 수 있는 그 어떤 뾰족한 수가 없다.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가는데 애간장을 태운다는 말이 이런 경우이구나 실감을 하였다.

사무실에서, 자료실에서, 공사현장에서, 심지어 때식을 끓이면서, 밥을 먹으면서까지도 실마리를 찾느라 속을 썩이던 어느 날 문득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쳤다.

“여보세요. 주민뜨락 부근까지 파놓은 기초가 모래와 자갈로 되였습니까? 모래층이 대개 얼마나 되세요?”

“기초는 모두 모래와 자갈로 되여있고 모래층은 대개 한메터 반 정도는 실히 될 것 같습니다.”

저도 몰래 한숨이 튀여나왔다. 순간, 며칠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위를 내려놓은듯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유관 부문을 설득시킬 만한 유력한 증거를 끝내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기초 부분에 모래와 자갈이 깔려있다는 것은 그 곳이 바로 예전에 하천이였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나의 설득력 있는 해석에 유관 부문에서는 이미 발급한 토지사용증을 타당하게 처리하겠다고 태도표시를 했다. 나를 에워싸고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며 보상을 요구하던 주민들도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2017년 8월, 두만강 남평제방 일터에서.

어느덧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업의 수요로 나는 종종 송하평제방을 돌아볼 때가 있다. 그 제방에는 복구건설을 하면서 유관 부문과 현지 주민들, 그리고 일을 맡아하는 민공들과 토닥거렸던 많은 이야기들이 깃들어있다. 그 곳에만 가면 주민들이 나를 에워싸고 토지보상을 내놓으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정경이 떠오르고 유관 부문을 설득하려고 증거를 찾아헤매던 내 모습이 우렷이 떠오르면서 감개가 무량하다. 세상에 땀 흘리지 않고 거두는 곡식이 어디에 있고 마음을 졸이지 않고 쉽게 풀리는 일이 어디에 얼마나 있을가? 내가 겪은 일들은 건설공사 현장을 책임지고 일하는 사업일군들의 한토막 작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업에 몸을 담가온 지도 삼십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다. 학교문을 나서고 사업에 금방 발을 들여놓은 량태머리처녀였던 꽃다운 시절, 제방공사 지휘부의 채소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울퉁불퉁한 수레길에서 자전거와 함께 넘어져서는 자전거핸들이 비뚤어지고 무릎과 팔굽에서 흐르는 빨간 피를 보면서 그 자리에서 울음보를 터뜨렸던 내가 인제는 귀밑머리가 희슥해진 반백을 훨씬 넘은 나이에 접어들었다.

무례한 주민들을 상대하고 내 코가 더 크다고 우기는 유관 부문의 일군들을 상대하고 설계표준을 외면한 채 마음대로 공사를 추진하는 현장 민공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모색해냈고 책에서 배운 리론지식과 현장에서 배우는 실제경험을 결합하여 나의 업무지식을 제고하면서 한보한보 성숙해왔으며 그 업무지식을 다시 사업에 응용하면서 내가 하는 사업에 애착을 갖고 정열을 쏟아바치면서 오늘의 나로 자리매김했다.

남성들에게도 힘에 벅찬 일터에서 녀성생리상의 약점을 극복하면서 남성들과 어깨를 겨룬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였다. 하지만 사업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으로 오늘까지 용케도 잘 견뎌왔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나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기고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즐거운 심정으로 하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업년한을 내 방식 대로 열중하면서 후배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전수해주고 내가 수집한 모든 사업 자료들을 하나하나 넘겨주면서 부끄럽지 않은 사업 일기장을 덮을 것이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