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3기’를 새중국 력사에서 가장 전기적 이야기가 있는 한 세대라고 말한다.
올해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걸어온 ‘로3기’학생들이 학교를 떠나 농촌으로 내려간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2018년 11월 14일 오후, 통화시조선족학교 ‘로3기’ 학우들의 주최와 통화시조선족학교의 주관하에 ‘로3기’학우들은 모교에 모여 뜻깊은 회포를 풀었다.
‘로3기’는 문화대혁명시기 1966년급 , 1967년급, 1968년급 3기의 초중, 고중 재교생들을 말하는데 공화국 창립전후에 출생한 일대를 가르킨다.
민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로3기’는 공화국의 ‘장자(长子)’이다, 새중국과 함께 태여나고 붉은기 아래에서 자랐으며, ‘로3기’는 컨테이너이다, 공화국의 모든 천재(天灾)와 인재(人灾)를 탑재했으며...공화국 비극의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1968년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966년급, 1967년급, 1968년급 초중, 고중 도합 6기 재교생들이 한꺼번에 학교를 떠나 농촌에 내려가 재교육을 받는 결정이 내려졌다.
통화시조선족학교도 례외가 아니였다. 당중앙의 지시를 받들고 농촌학생들은 고향으로, 도시학생들도 농촌에 내려가 농사일을 하면서 재교육을 받도록 했다.
통화시조선족학교 ‘로3기’ 하향50돐 기념행사의 날, 조금은 쌀쌀한 날씨이지만 교정에 들어서는 ‘로3기’ 학우마다의 얼굴에는 온화한 분위기가 가득차 있었다. 부등켜 안는 이, 오래오래 손 잡고 문안하는 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이…과거 슬프고 쓰고 그리고 재미있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집체사진을 찍고 통화시조선족학교 김영만서기의 사회하에 ’로3기’ 학교 졸업 50돐 기념행사가 있었다. 특급교원이며 전국 민족단결진보 모범이며 통화시조선족학교 교장 문국철이 ‘로3기’학생들에게 노래 《첫수확》을 선물하고 나서 학교 소개를 했다.
‘로3기’학우들의 옛사진으로 리목룡선생이 제작한 영상이 스크린을 통해 학우들의 눈앞에 펼쳐진다. 패기있고 아름다운 젊은시절의 모습들이 스쳐지나자 로학우들은 하하, 호호, 박수치며 웃음꽃을 피운다. 비록 70세에 가까운 나이지만 힘차게 ‘교가’를 부르는 이들의 모습에서 열정이 드높고 생기발랄했던 당년의 풍채를 보는듯 했다.
‘로3기’ 리목룡선생에 따르면 1968년 한해에 66, 67, 68급 400여명 학생들이 한꺼번에 학교를 떠나게 되였다. 이중 20여명이 참군하고 나머지 농촌학생들은 고향으로, 도시학생들은 집체호로 무어 농촌에 내려가게 되였다.
그후 몇해 사이에 일부는 참군하고 일부는 학교를 다녔던 지식청년들이라 교원으로 있게 되였다. 400여명 학우중에 통화청산그룹 회장 리청산, 농업부 벼전문가 지도소조 성원 엄광빈,전국로력모범 최정근 ,다기능식품가공기계를 만들어 미국 국제신기술신제품박람회에서 금상을 탄 하성룡 등 출중한 인물도 배출되였다 한다.
리목룡선생은 ‘로3기’학우들이 해내외로 널려있는데 오늘 기념행사에는 70여명 학우들이 모였다고 소개한다.
1967년급 ‘로3기’학생으로 류하현 안구진(安口镇) 오인선촌(五人鲜村)에 하향지식청년으로 내려갔던 통화청산그룹 회장인 리청산은 이렇게 그때를 추억한다.
“나와 함께 농촌으로 가게 된 도시학생들은 1968년 11월 15일 8시 30분경에 떠나기로 하고 그때 통화시 신화광장(지금은 转盘이라 함)이라고 불렀던 곳에 모였다. 농촌에 내려가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지시를 받자 머리가 멍해 졌다. 공부할 나이에 사회에로 내보내는 어머니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고 몰래 눈물만 훔치더라. 기차를 타고 점심쯤에 류하현 현성에 도착했고 뜨락또르에 앉아 2시간 가량 걸려 안구진 오인선촌에 이르렀다. 그날은 엄청 추웠고 흙길이였는데 눈도 많이 쌓여있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마을 분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대대부로 씌였던 집을 내여 집체호숙사로 했다. 농촌에 내려가 처음 먹은 끼니가 이밥에 국, 김치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 소학교 교실에서 하향지식청년 환영회가 있었고 우리는 그 시대에 류행했던 ‘충자무(忠字舞)’ 를 추었다. 그렇게 남학생 10명, 녀학생 9명이서 한개 집체호를 무어 농촌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우리 집체호외에도 류하현에 다른 한 집체호가 더 있었고 휘남현에 3개 집체호, 이렇게 통화시조선족학교를 다니던 100여명 도시학생들이 5개 집체호로 구성돼 농촌에 내려갔다. 이듬해 나는 참군하게 되고 농촌에 있은 1년 사이에 땔나무도 해보고 김도 매보고 가을걷이도 해보고 농사일이란 거의다 해 본 것 같다.”고 말한다.
모두 20살 좌우의 열혈청년들이라 싸움도 하고 남몰래 련애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리청산은 웃으며 말한다.
50년전의 11월 15일 농촌에 내려가던 그날을 회억하며 안구진 오인선촌에 하향했던 도시학생들중의 일부는 2018년 11월 15일 날에 안구진 오인선촌을 찾았다.
마을 주변을 빙 둘러보기도 하고 집체호 옛터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지금은 촌사무실과 로인활동실이 된 조선족학교도 돌아봤다. 하향지식청년들이 마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조용하던 마을이 북적인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지난 세월 농사 일을 가르쳐 주던 촌민들과 나란히 앉아 술잔을 쭉쭉 굽 내며 옛이야기를 나눈다. 누구는 어데 있고 누구는 지금 뭐하고....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야기란다.
‘로3기’학우들은 비바람을 헤치며 운명과 싸우는 가운데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의 중견으로 되였고 대부분은 평범한 일터에서 특유의 책임감을 안고 사회생활에 뛰여들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세인들이 주목하는 개혁개방의 크나큰 변혁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력사에 남을 공헌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로3기’학우들은 이제 ‘로3기’ 하향 60돐이 되는 날에 다시 두번째 고향을 찾겠다며 촌민들과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린다.
/ 길림신문 홍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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