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 때 나는 아버지에 대해 심히 탄복했다. 하기에 나는 오늘도 아버지의 그 꾸지람을 한없이 그리게 된다.
필자 리진욱
바로 그 해에 설 준비로 나무 팔러 가시겠다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내가 가겠다고 탄원해나서자 아버지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짓고 새벽 두시 경에 꽉 박아실은 8월 풋나무 수레멍에를 나한테 넘겨주시면서 “강판길 조심해라”, “헛 욕심 부리지 말고 시세대로 팔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평시에 술덤벙 물덤벙하던 나는 마을에서 50리 상거해있는 룡정으로 처음 나무 팔러 가게 되였다. 막내아들의 첫 행차라 아버지는 그 때 분명 마음속으로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40여단의 풋나무를 박아실은 나무수레 높이가 남들이 50여단 실은 수레보다 더 높았고 그 날따라 나무도 쉽게 팔렸다. 빈 수레를 몰고 나무장터로 돌아오는 길에서 뜻밖에 서점 앞을 지나게 되였다. 마치 자석에 끌리듯 서점 안에 들어서니 수많은 책들이 나의 시야에 유표하게 안겨왔다. 책만 보면 오금을 못쓰는 나인지라 그만 책의 유혹에 못이겨 책매대에 다가가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번져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산간벽지에서 책을 구하기란 거의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아서 인젠 소학교의 책을 빌려보는 것도 거덜이 났으니 마치 가물에 단비를 만난 것과 같아 나는 기뻤다. 《어머니》, 《고요한 돈》, 《쓰딸린그라드격전》, 《조야와 수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 《옛성터에 휘몰아치는 불길》, 《고옥보》 등 20여권의 크고 작은 귀중한 번역책들이 나의 눈을 부시였다.
같이 풋나무 팔러 갔던 마을 장년들의 강권으로 처음으로 ‘얼량술’에 육개장까지 만포식하고 나니 마음이 둥둥 뜬 데다가 한 마을의 몇몇 친구들과 저마끔 작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적어도 5백여권씩 읽기로 약속이 돼있던 차라 나는 나무 판 나머지 돈을 다 털어 그 20여권의 책을 몽땅 샀다. 인젠 여유작작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흥이 절로 났다. 돌아올 때 나는 너무도 기뻐 겨울밤의 맵짠 추위도 의식하지 못한 채 코노래까지 불렀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수님을 대하는 순간, 홀연 아버지 생일에 쓸 물건을 살 돈이라는 것이 생각나면서 졸지에 패군지장이 되여 죄 진 사람처럼 책꾸레미를 들고 아버지 앞에서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두 몰래 책구경이나 하자고 서점에 들렸는데 한책 두책 고르다 보니 그만…
내가 우거지상이 되여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뒤말을 잇지 못하는데 아버지는 더는 내 말을 들을 념도 하지 않고 중둥무이하고는 “에익 자식두 철딱서니 없기루사, 그게 어떻게 쓸 돈인데…”하면서 혀를 차며 꾸지람을 하는 것이였다. 워낙 아버지 생일은 정월 초하루날이여서 언제나 섣달 그믐날 아침에 마을의 년장자들을 모시고 생일을 쇠였던 것이다. 그래도 돼지 고기는 외상 추렴을 하지만 술, 해산물, 과일, 통졸임 등은 돈을 주고 사야 했으므로 제일 안달아난 이는 어머니와 형수님이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이튿날 아침 나는 밥술을 놓기 바쁘게 20여리 상거한 구정부에 가서 큰형을 찾았다. 설상가상으로 큰형은 30여리 떨어져 있는 상계촌으로 하향가고 없었다. 나는 지체없이 상계촌에 찾아가서 다짜고짜로 큰형더러 아버지 생일에 쓸 물건을 살 돈을 달라고 하여 6원을 받아가지고 그 길로 한달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섣달 그믐날 아침이였다. 중간방에는 마을의 어르신님들이, 정주간에는 장년들로 정좌하자 주안상이 올랐다. 나는 좌상 어르신님들부터 따끈하게 덮인 술을 따라 올리면서 아버님 생일을 축하하여 모처럼 이렇게 왕림하셨는데 별로 차린 건 없지만 포근히 드시라고 공식적인 인사말을 하였다.
그런데 어르신님들은 수저를 먼저 들 대신 이구동성으로 “대단하다”, ”잘 차렸다”며 연신 치하를 하는 것이였다. 시원스레 첫 술잔굽을 내시던 마을의 제일 좌상 어른께서 나를 정시하면서 “자네가 부친 생일에 쓰려고 처음으로 무탈하게 나무 팔러 다녀왔다지, 다 컸네 그려! 이렇게 푸짐히 차렸으니 기쁘게 마시겠네, 참 고마우이!” 라고 분에 넘치는 치하를 하였다. 그러나 도리여 나는 낯이 뜨거워지면서 몸둘바를 몰랐다.
바로 이 때 아버지께서 이야기의 고삐를 잡으셨다. 내가 ‘또 꾸지람을 듣게 되였구나’, ‘이렇게 개꼴망신을 당하는구나’ 라고 속으로 되뇌이는데 아버지는 웃방 테블 우에 보기 좋게 무져 놓은 책들을 가리키면서 “에, 생일 뿐이겠수? 저걸 좀 보시우 ‘선생님’도 모셔왔수다 ‘선생님’을, 자고로 책이 사람을 만드는 ‘선생’이라 하였은 즉 그래 ‘선생’이구 말구...” 나는 구들에 닿일 정도로 구부렸던 머리를 번쩍 쳐들고 뜻밖에 나를 치하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가슴이 뭉클해나고 눈앞이 흐려지면서 도저히 더는 아버님의 참모습을 정시할 수가 없었다.
그 때 그 아버지의 꾸지람은 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여 종시 잊어지질 않았고 금후 나의 사업과 생활에서 무형의 편달로 되였다.
반세기도 훨씬 넘은 오늘까지 해해년년 새해 설날이 오면 서당 문앞에서 남의 어깨 너머로 천자문이며 구구대문이며를 다 배워내고 유식인으로 된 아버지와 아버지의 ‘꾸지람’을 아련히 회억게 된다. 하냥 엄하면서도 인자하시고 자식들의 기를 꺾을세라 보듬어주시고 키워주시던 도량이 넓고 존경스러운 아버지를 오매불망 더욱 그리게 된다.
하기에 오늘, 할아버지로 된 자신이 아버지구실을 한 여생을 깊이 성찰해보면서 이 필수덕목의 ‘바통’을 대물림 보배로 간주하고 길이 전해가게 하리라고 다지였다.길림신문 / 리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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