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여난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니깐 어느덧 40년이란 무정한 세월이 흘렀다.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이런 십년이 4개이니 강산도 마을도 사람도 변해도 아주 몰라보게 변했으리라.
필자 한창국
그때의 늙은이는 땅속에 묻혀 진토가 되였을 것이고 그때의 청년은 석양길에 들어선 허리가 활등같이 휘여든 꼬부랑 할배할매가 되였을 것이고 그때의 중학생은 로년의 막차에 올라타고 한 가정을 이끌며 오후의 태양아래서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양기로 모내기를 깔끔하게 하고 모퉁이만 손으로 꽂아서 70년대 굉장히 분주했던 생산대의 인공벼모내기와 비하면 효률적이고 속도가 빠르다. 70년대 남정네들은 벼모 꽂는 일은 의례 녀인들의 일로 간주하고 근본 손을 적시며 모를 꽂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논이나 갈아엎고 써레질이나 하고 번지를 놓고 논물을 조절하고 벼모를 공급하는 일들을 하였다.이렇게 ‘앞단도리’를 다 해놓고 논뚝에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한담을 하고 혹은 밭머리에 여럿이 쭈크리고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제 안해 혹은 누이들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이악스레 모 꽂는 것을 강건너 불보듯 멍하니 바라보며 녀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토끼꼬리만큼이라도 했는지는 나로선 잘 모르겠다.
대남자주의 사상이 심했던 이런 분들이 80년대초 호도거리를 할 때는 50대에 들어선 감농군이지만 모 꽂기에서는 초보자도 아주 낮은 등급의 초보자였다. 모철에 넓은 논판에서 안해 혼자서 모 꽂는 것이 보기에 미안했던지 논판에 들어서서 손등이 젖었다 말랐다 하며 모를 꽂는데 그 모습이 옆에서 보기에도 여간 안쓰럽지 않다.
앞단도리를 다 해놓으면 줄모를 꽂는 사람들(대부분 햇내기 모군들인데 청년남녀 혼합팀이다)이 줄자를 가지고 너비가 한메터좌우 되게 줄모를 꽂고 길이를 재여 그 수자를 얇고 가느다란 패말에다 적고 그것을 논뚝에 박아놓는다. 가구를 짤 때 먹줄을 치듯이 줄을 곧게 치는데 논뚝과는 관계없이 될수록 길게 친다.줄의 량쪽에 팔뚝만한 말뚝을 고정해놓고 두 사람이 량쪽에서 쥐고 당기며 줄을 옮겨 놓는데 그중 한사람이 호각을 불며 지휘한다. 중간에는 몇사람이 왔다갔다하며 줄따라 모를 꽂는다.어떤때는 량쪽의 두사람이 장난을 치느라고 줄모를 다 꽂기전에 호각을 불며 줄을 당긴다.이러면 마지막 모군이 영낙없이 낯에 굵은 먹줄을 받아야 한다. 고함를 지르며 야단을 쳐도 여럿의 웃음소리에 먹히우고 또 이미 쏟아진 물이라 속으로 봉창을 엿보는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호각소리가 나면 노루 제 방귀에 놀란 듯 반사적으로 모 꽂던 손을 멈추고 제꺽 허리를 펴고 한발 뒤로 물러선다. 이렇게 웃고 떠들며 논밭에다 칸을 만들어 놓으면 모군들이 모를 쥐고 논판에 들어선다.
모군들은 모 꽂는 솜씨가 좋은 청일색의 처녀들과 아줌마들이다. 그때는 몇메터에 한공이라고 규정해놓고 공수를 기입하는 때인지라 녀인들은 새벽에 나가 날이 어둑시그레 해서야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온다.
저녁밥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부시고 구들에 누워 푹 쉬였으면 좋으련만 우로는 시부모님이 계시고 그리고 남편, 아래로는 아이들에게 저녁밥을 지어줘야 했다. 그 고역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
별 쉼도 없이 허리가 아프면 정통편을 먹으며 그 패말을 기를 쓰고 모았다. 패말을 잘 건사해서 하루 두번, 점심때와 저녁때 기공원한테 가서 공수를 기입했다. 당시 웬간한 솜씨를 가지고는 하루에 여덟공을 벌기 힘들었다.사원들은 모두 모택동사상으로 무장되여서인지 일을 할라치면 죽을둥살둥 모르고 일을 했다. 상급의 지시만 내리면 칼산에도 오르고 불바다에도 뛰여들 그런 태세로 일을 했다. 어찌보면 시대의 희생품으로서 불쌍하기도 했고 또 좀 우둔한데도 있는 것 같다. 천하무적 정치의 힘을 과시하는 좋은 귀감인 것 같다.
고양이 손도 빌려쓴다는 모철에 학교에서도 덩달아 벼모 방학이란 것을 했다. 녀학생들은 줄치는 모꾼대오에 가담하고 남학생들은 주로 중로인들이 모판에서 벼모를 떠놓으면 그것을 어른들과 함께 운반해다가 논판에 펴놓은 일을 하였다. 모꾼들은 모를 꽂다가 모가 모자라면 “모야, 모야”하며 고함을 친다. 그러면 학생들이 달려가 논뚝에서 모를 뿌려주군 한다. 논판에서 첨벙첨벙 다니며 모를 섬기면 발자국자리가 많이 난다고 싫어한다. 개구쟁이들은 가끔 장난기가 도져 우정 좀 먼 논뚝에 서서 모를 뿌려준다. 모는 씽~날아서 모군의 뒤에 떨어지며 흙탕물을 찰랑 튕겨 모군의 옷에 깜장칠을 해놓는다.그러면 걸죽한 욕이 날아오고 심하면 모가 되려 날아오는데 이때는 삼십륙계 줄행랑이 제일이다.어떤 능청스러운 애들은 자기 부모거나 가깝게 지내는 모군들 뒤에다 모를 많이 펴놓으며 욕심을 부린다. 그런데 어떤 때는 욕심을 너무 과하게 부려 모가 남아돌아 모군은 나머지 모를 처리하느라고 모내기속도가 늦어져 등이 달 때도 있다. 하지만 벙어리 랭가슴 앓듯 내놓고 말은 못하고 속으로 미련한 놈이라며 듣지 못하는 욕을 한다.
지금도 그때 모내기를 생각하면 저도 몰래 손이 허리로 올라간다.어려운 시기의 힘겨운 로동이였지만 잊지 못할 추억의 한페지로 간직되여 있다. 한창국/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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