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일본글짓기응모] 하늘아래 빈 자리에 서서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7월30일 10시25분    조회:140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하늘아래 빈자리에 평범할래야 더 평범할 수 없는 내가 서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을가? 그리고 또 어디로 갈것인가? 이 물음에 답안을 작성해 본다면 조금은 식상하지만 절때로 흠을 잡을 수 없는 답이 나온다. 나는 주련화이고 엄마의 배속으로 부터 왔으며그 리고 나중에는 나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비켜갈 수 없는 꼭 가야만하는그곳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물론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이 물음은 결코 이런 식상한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 똑같은 물음을 다섯살의 꼬마였던  나에게 던져 본다.

  다섯살난 꼬마에게 있어서 이 물음은 아마 너무 무거울테지? 다섯살의 꼬마는 이 물음을 리해하기 조차도 어려워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대답을 해야하나 머리를 갸우뚱하겠지? 그러면 꼬마를 도와서 점점 색이 바래져가는 기억들 속에서 유치원 때의 희미한 기억 한 쪼각을 끄집어내 보기로 한다.

  “너희들은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유치원 담임이였던 긴 파마머리의 예쁘장한 선생님이 물어 보신다.

  꼬마들이 하얀 련꽃 뿌리를 닮은 팔을 쳐들고 먼저 대답하겠노라고오 구작작 떠든다.

  “선생님, 나는 커서 의사질하고 싶습니다.”

  애됫 얼굴의 누군가가 코까지 훌쩍이면서 대답한다.

  “선생님, 나는 커서 선생질하겠습니다.”

  한 꼬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기양양해 한다. 제법 당차기까지  하다.

  “선생님, 나는커서 비행기 몰겠슴다.”

  어느 누군가의 앳된 얼굴에는 제법 비장함까지 엿보인다.

  “오,호호, 너희들 꿈다 멋있구나, 공부를 잘 하면 그 꿈들을 꼭 이룰 수 있어, 알겠니?”

  꼬마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지른다. 그들 중에는 입술을 감빨기만 하면서 차마 손도 들지 못한 꼬마가 섞여 있다. 꿈이 과학자였던 그 꼬마는 과학자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그저 과학자라는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근사하고 벅차다.그 꼬마는 손을 들 용기도 없었고 꿈을 말 할 용기조차도 없다.항상 조용한 곳에서 혹은제일 뒤에 서 있던 존재감이 없던 그 꼬마는 바로 나였다.

  어릴적의 나는 왜 그토록 존재감이 없었고 용기가 없었던 걸가? 지금의  나도 그건 잘 모른다.

  나는 70년대 후반에 어디에 가나 볼 수 있는흔한 조선족동네에서 태여났다.

  인가가 겨우 100여호 밖에 없는 자그마한 동네였다. 엄마아빠는 믿을거라고는 두 주먹밖에 없는 평범한 농민이셨고 나는 그분들의 큰딸로 태여났다. 나중에 아래로 일곱살 터울로 녀자동생이 한 명 더 생긴다.

  엄마아빠는 부지런한 사람이셨지만 왠지 우리 집은 늘 가난했고 벌레들의 천당이였던 초가집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마음에도 초가집이 가난의 상징이여서 참 부끄러웠다. 그래서 가난이 준 선물인지는 몰라도 나는 내성적이면서도 자존감이 낮은 아이로 성장했다. 지극히 말이 없고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조용했으며 자기 앞에 말 조차 변변하게 못하는 그런 아이가 나였다.

  10대의 나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져본다. 10대의 나도 그 물음에 대답을 하기는 어렵다. 10대의 나는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속은 자존감이 낮아서 바닥을 치고 있지만 겉으로는 아닌척하고 대신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평범한 학생이였다. 그리고 존재감이 없는 건 여전했다.

  엄마아빠는 가난이라는 굴레가 자식들한데까지 물려질가봐 산골로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셨었다.  나와 동생은 학교를 다녀야 했던 원인으로 한 명은 외할머니댁에 다른 한명은 둘째 이모네댁에 맡겨지고 이산가족이나 다름없이 3년을 지내야 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년이 다가도록 새옷 한번 사 입는것이 힘들었으며 좀 괜찮은 옷이라고는 막내이모가 물려 주었던 옷들이였다.한창 멋을 부리고 싶을 나이에 나는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해보고 초중을 졸업하게 된다. 초중을 졸업한 나는 집에서 한시간 거리인 자그마한 현성에서 고중으로 진학하게 된다. 처음으로 부모의 품을 떠나서 어느 정도의 독립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다.

  고중에 진학을 한 후 중국어도 잘하고 항상 당당해보이던 현성의 애들 앞에서 위축감이 들었지만 나는 또그 렇지 않은 척 위장을 한다. 초중 때는 그래도 상위권을 맴돌던 나의 성적이 하락세를 타더니 고중 때에는 하위권에서 맴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은 다른 사람들이 초중 때 겪던 사춘기를 나는 고중때 겪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매사에 소심한 성격이였던 내가 가끔은 저녁 자습도 빼먹으면서 소심한 반항을 했던 건 아닐가 싶다.

  20대의 나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져 보기로 한다. 20대의 나 역시 그 물음의 뜻을 잘 알지는 못한다. 20대의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져 있었다. 친척언니와 오빠가 있는 청도냐 아니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심양이냐? 그중에서 나는 결국에는 심양이라는 낯선도시를 선택한다. 리유는 딱 한가지였다. 아무도 모르는 심양에서 무언가를 자신의 힘으로 해보고 싶었다. 그 무언가가 그렇게 불투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심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엄마는 동생 학비를 마련한다고 한국행 중이였으며 나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심양이라는 도시에서 내생에 첫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상대는 나보다 연하였던 남자애였다. 사랑이라는 걸 처음 해보는 나는 무조건 주는 것이 사랑인줄로 알고 그 애가 웃으면 함께 웃고 그 애가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냈다. 불을 덮치는 부나비처럼 모든 것을 올인했던 나는 종국에는 일방적인 사랑에 지쳐 버린다.

  그렇게 나는 또 첫 리별이라는 걸 하고 펑펑 울었었다.

  몇 년전, 심양 출장이 잡혀서 그 애랑 함께 거닐었던 거리를 다시 거닐면서 나는 심양에 대한 모든 추억과 자신을 잃어가면서 사랑을 했던 그제날의 나를 화창했던 심양의 봄날에 함께 묻어버렸다.

  30대의 나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져본다.

  30대의 나는 나를 한없이 상심케했던 심양을 떠나서 천진이라는 도시에 정착을 하게 된다.그리고 처음 출근하게 된 회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결혼이라는 걸 했다.

  분명히 2년간 사귀였고 나이도 꽊 차서 결혼했던 우리 부부였지만 결혼 초기에 참 많이 다투었었다. 다투었던 주요 요인들은 결국에는 돈이라는 단어였다.

  농촌 태생이였던 두 사람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천진이라는 큰도시에 정착을 한다는 건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였다. 결혼을 했으니 아이를 가져야 하겠고 아이 마저도세집살이 시킬 수 없다는 압박감에 우리는 서로 초조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더 다투게 되였지 않았나 싶다. 매일 출근을 하고 아껴 쓰느라고 했지만 돈은 모여지지 않았고집을 산다는 건 아스란히 먼 꿈 얘기나 다름 없었다. 겨울내내  스모그가  껴있는 천진의 날씨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나날들이 련속되면서 우리 부부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무척 가난했던 결혼 초반시절에 천진의 자그마한 농촌에서 셋집을 임대맡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온동네가 몇 개 없는공용화장실을 써야 했고 파리에 구데기에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혹시라도 밤 중에 화장실에 가야 했던 날에는 너무 무서워서 손전등을 들고 남편이 동행해 주어야 가능했다.

  그런 환경에서 몇 년을 살다가 결국에는 대출을 받아 우리의 이름으로 된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이사를 들어가던 날 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서 그만 펑펑 울기까지 했다. 그것은 고진감래라는 말을 온 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였다.

  지금의 나, 즉 40대의 나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져본다.

  지금의 나는 그 물음에 조금 더 명랑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건우, 가은이 두 아이의 엄마이며 앞으로도 쭉 이 타이틀을 달고 갈 것이다. 녀자는 아마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한평생 지고가야 할 사명감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두 아이의 엄마라는 신분에 충실하는 것을 최고의 임무로 간주 하고 있다. 나의 두 아이가 사회에 첫 걸음 내 디디는 순간에 휘청거리지 않도록 충분하게 밑거름을 대 줄려고 오늘도 나는 분주히 돌아치고 있다.

  50대의 나에게도 이 물음을 던져본다. 조금 이른감이 없지 않지만 나는 50대에는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이였으면 좋겠다. 밀린 독서를 할 시간도 있고 좋아하는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지금보다 많았으면 좋겠고 마음도 여유롭고 넉넉하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였으면 좋겠다.그 리고 조금 더 여유롭게 엄마라는 배역에 임하는 모습이엿으면 좋겠다.

  60대, 70대의 나에게는 이물음을 보류하련다. 미래는 늘 알수 없고 불투명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살고저 한다. 하늘아래 빈자리에 서서 나만의 자리에 서서 또 나만의 소임을 다하는 나로 살아가는 나 이고저 한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일찍 여러가지 사업을 하다가 좀 독특한 폼목을 골라잡아야겠다고 윽벼르던 남송호씨, 52세, 현재 직업은 농부, 3년전의 어느날 “문화대혁명”시기 어머님, 아버님의 하방지였던 승지로 들어가 특종닭인 궁정황계(宫廷黄鸡)와 오골계(乌鸡)를 키운다. 지난 8일, 아직은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그의 농장이 있...
  • 2014-05-12
  •         (흑룡강신문) 조선족 학생 80여명이 한국에서 부모 등 가족과 '눈물의 상봉'을 했다.   환경일보 등 한국언론에 따르면 경기도 학생교육원(원장 박일순)은 동북 3성 조선족 학생들의 한국내 거주 가족과 '만남의 시간'을 마련했다. 행사는 부모님께 꽃 달아...
  • 2014-05-05
  • 일간의 “5.1”절 련휴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다. 2008년“5.1”절 7일 휴식제도가 취소된후부터“휴일이 넘 짧다”,“어쩔새가 없다”,“7일 휴일제도를 회복해야 한다”등 말들을 심심찮게 들을수 있다. 휴일이 짧다보니 그냥 도심을 벗어나 교외에서 하루일정으...
  • 2014-05-05
  • 이 지구상 가장 아름다운 그 이름, 어머니이여! 김우영의 세상사는 이야기 어버이 날에 즈음하여 보내는 편지 이 지구상 가장 아름다운 그 이름, 어머니이여! 어머니! 모처럼 불러보는 이름 입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이름 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불러도 부담이 없고 살...
  • 2014-05-04
  • 어느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의 활동시간을 참관한적이 있다.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뛰여놀던 유치원꼬마들은 낯도 코도 모르는 숱한 어른들이 들어오니 무척 긴장한 표정들이였다. 한 학기에 한번씩 조직하는 참관활동인지라 교양원들도 긴장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긴장한 분위기가 감도는 교실안에는 꼬마들의 새근새근 하...
  • 2014-05-02
  •   조선족씨름하면 업계 사람들은 당연히 연변성주청소년체육클럽의 리설봉관장을 떠올린다. 지난 십수년간 그의 제자들이 전국대회서 수많은 메달을 앗아오며 연변, 나아가 길림성을 위해 영예를 크게 떨쳤기때문이다. 2013년, 리관장은 여러 난관들을 극복해내며 제1회 “주덕해컵”중국 조선족씨름대회를...
  • 2014-04-30
  •   김일관:룡정시 개산툰진 아송제2소학교 교무처 주임이자 한어교원   주요영예(부분):   2005년 룡정시우수교원   2007년 연변주우수교원   2008년 룡정시교육정보와선전 선진개인   2009년 중소학교사재교육사업 선진개인2009년 길림성우수교원   (흑룡강신문=하얼빈)  올해초 김일관교원은 공청단길...
  • 2014-04-28
  • [아줌마이야기] 오늘, 누군가에겐 다시 올 수 없는 내일이기도   막내의 기침이 열흘째다. 심하게 감기를 앓고 난 후 계속 기침을 한 듯 하다. 갑자기 인터넷을 뒤지며 큰 병이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려 한다. 기침은 계속 해 댔는데 이렇게 길어졌구나 인식한 건 어제, 오늘 새다. 아이들 셋을 키우며 기침이 오래인건...
  • 2014-04-24
  •   송진명,김신옥 부부 송진명은 1923년 2월1일에 송씨네 가정에서 태여나 3살에 아버지 쪽지게에 업히여 다섯식구가 조선평안 북도에서 중국 통하 고산지에 와서 열심히 개간지를 일궈서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여 왔답니다 . 나이 들어서 와사촌형(김천)의 도움으로 혁명공작에 참가하여 상급 지하공작원들의 령도에 혁...
  • 2014-04-24
  • 도문시 어느 한 주택가에 위치한 “최원단란글방”, 석현이 고향인 최원(54살)씨가 이 글방에서 영어와 일어를 가르친지도 20여년. 글방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중소학교 학생들과 외국류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사람이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휠체어가 없이는 단 한발작도 ...
  • 2014-04-23
  • 연길시 북산가두 로인총회회장 왕효평, 로인뢰봉반반장 김봉숙과 단령사회구역 로인협회회장인 리성복 세로인은 모두 연길시 “3강3애 도덕모범”이며  “연변의 훌륭한 인물”들이다.  북산가두 단령사회구역에는 당뇨를 앓고있는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어머니의 저그마한 막벌이로 어렵...
  • 2014-04-22
  •   언덕에서 바라본 고즈넉한 마을. 옆으로는 두만강이 호선형을 이루며 흘러간다.      지난 4일, 청명절을 맞으며 태여난 곳은 아니지만 동년과 소년 시절을 보냈던 화룡시 로과향 사정곡촌, 아니, 지금은 숭선진 죽림촌의 한개 툰으로 되여버린 사정곡툰을 찾았다. 죽림촌이나 원래의 사정곡촌은&nb...
  • 2014-04-18
  •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      (흑룡강신문=하얼빈)권대영 통신원 = 백두통일봉사대 대원 120여 명이 4월을 맞아 백두산조선족양로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번 봉사활동에는 칭다오청운한국학교 고교생 62명과 국기외국어학교 학생 36명, 그리고 지도교사 및 평통자문위원 등 도합 120여 명이 참가, 4...
  • 2014-04-17
  • 봄에 성큼 들어섰다. 겨우내 잔뜩 웅크린채 집과 회사(단위)만 왕복했다면 이제는 가벼운 차림으로 나들이(산을 찾아 걷기 등)를 즐길 때이다. 도심 곳곳에 복숭아꽃들이 활짝 피여 눈과 가슴을 즐겁게 한다. 봄기운도 느끼고 체력도 기를수 있는 운동으로 또 다른 자신을 만나봄이 어떨가. 봄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싶은 ...
  • 2014-04-14
  • 책읽기가 자신을 넘어서 다른 세계로 가는 행위라면 서재는 타임머신이라 해도 좋을것이다. 뜻모를 제목의 소설들이며 묵직한 전집들이며 구멍을 뚫어 책끈으로 매놓은 간행물들이 들쑥날쑥 우중충하게 쌓여있는 아버지의 서재는 알록달록한 책들이 시리즈별로 가지런히 꽃혀있는 친구들의 책장과 비교했을 때 그토록 멀게...
  • 2014-04-14
  • “할아버지, 오늘 혈압약 드셨나요?” “할머니가 외출해서 아직 못 먹었습니다.” “약을 꼭 챙겨드셔야 합니다. 보세요, 혈압이 또 올라갔습니다” … 4일, 훈춘시 반석진위생원 원장 김홍주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위생원에 환자가 적은 틈을 빌어 지체장애인 추립곤(79세)할아버지...
  • 2014-04-10
  • -고향은 참으로 우리 민족 력사이고 문화이며 미래가 아닐가 고향이 남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통하는지는 알수 없으나 고향은 내게 있어 아름다운 한폭의 화폭이며 인정이 넘치고 기상이 드높은 고장으로, 영원한 동경으로 간직되여있다. 가야하와 왕청하가 합치는 합수목부근에 하얀 초가집들로 줄느런한 조선족마을이 있었...
  • 2014-04-07
  • 시내 중심가에서 볼일을 보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기가 귀찮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딸아이랑 둘이서 911버스에 올라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딸아이는 상하이에 처음으로 관광이라도 온 듯, 열심히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와~ 저 건물은 정말, 중국적인데? 어디서 또 저런 장면을 찍을 수 있겠어? 어? 저런...
  • 2014-03-31
  • 옛 공연사진을 펼쳐보는 강동춘씨의 눈빛에는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애잔함이 묻어났다.   만담가 강동춘씨 수술후유증으로 힘든 나날... “아! 옛날이여”,꼽웃음 추억으로만 남나? 강동춘이라 하면 연변은 물론 국내 조선족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만담배우다. 그가 무대에서, 사람들의 시선...
  • 2014-03-31
  •   *사진은 일손을 다우치는 김금란씨 흑룡강성 상지시내에 있는 “명가떡집”은 가게가 비교적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지만 주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뜨르르하다.     이 떡집의 주인은 김금란(45세)씨인데 한때 한국에 나가 닥치는대로 일거리를 찾아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한가...
  • 2014-03-28
‹처음  이전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