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한 제대군인의 초심(2)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8월5일 15시38분    조회:167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화룡시 룡성진 부흥촌 제대군인 렴경창의 고향건설 이야기

연길 아들 집에서 기자와  인터뷰 중인 렴경창옹.

(사진설명: 렴경창부부(안로인 지난해 85세로 병고)는 슬하에 네 오누이를 두었는데 딸을 일찍 잃었고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제대군인, 지금 세 아들은 다 외국에서 로무에 종사하고 있다. 렴옹은 연길에 사는 막내 아들 집에 와서 안로인과 같이 시작한 손자(지금 고3 학생)의 뒤바라지를 혼자서 끄떡없이 견지하고 있다.)

“렴경창은 부흥촌의 기념비적 인물입니다”

렴경창은 부흥에 돌아오자마자 촌의 공청단지부 서기, 민병 련장, 생산대 대장으로 , 이듬해인 1958년에 촌장, 당지부 서기로 부임했다. 그때로부터 1980년까지 22년, 그의 임직 기한은 부흥촌 사상 제일 오래다.

당년 촌의 부기원, 촌 당지부 서기를 력임했던 현임 촌무 감독위원인 심재필(71세)은 “렴서기는 토지개혁 후 부흥촌의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개혁개방전 부흥(富兴)촌을 촌 이름과 상부한 ‘부유하고 흥성’한 마을로, 현역 내에서 첫손 꼽히는 마을로 이끌어내기 위해 온갖 힘을 다했다.”고 소개한다.

 기자한테 렴경창 서기와 부흥촌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리철수(오른 쪽), 심재필로인.

부흥사람들은 렴서기 임직 기간의 일련의 데이터를 아직도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다.

●그간 부흥촌에는 벽돌공장, 철공소, 제재소, 목공소, 정미소, 국수가공소, 기름방...석탄채굴장까지 생겨나 크고 작은 전동기가 70여대에 달했다.

●그간 부흥촌에는 트럭, 28마력과 55마력짜리 뜨락또르...등 기동차량이 9대가 달렸다.

●그간 부흥촌에서는 소학교, 유치원 교사를 신축했고 중학교를 세웠다.

●그간 부흥촌에서는 500여평방메터 되는 촌 문화구락부를 건설했다.

●그간 부흥촌에서는 벽돌 기와집 100채를 지어 생활이 어려운 촌민부터 부담없이 입주시켰다.

● 그간 부흥촌의 생산로동 일공 단가를 다른 촌보다 훨씬 높혔다.

● ‘의원’한명 밖에 없던 부흥촌은 그간 중의, 서의, 약사, 간호사를 배비한 위생소를 세웠다.

...

렴경창은 “그간 당원이 8명으로부터 50여명으로 늘어난 것이 부흥촌 발전에의 가장 큰 힘이였다.”고 보충해 말했다.

벽돌과 기와로 우사와 문화구락부를 세우다

옛 부흥구락부 건물 앞면.

 대문이 잠기여 사각선에서 한번 더 담은 옛 부흥구락부 모습 앞부분.

렴경창은 무릇 집체와 군중들의 수요라면 발벗고 나섰다.

20세기 50년대에 소는 집체의 주요한 생산력이고 돈줄기였다. 헌데 촌의 9개 생산대서 제마끔 목조 우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소들의 란동과 비바람을 못이겨 우사를 반복적으로 손질하고 재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렴경창은 쏘련견학을 다녀온 후 마을에 벽돌기와로 우사를 세우고 절초 기계까지 마련했다는 연길현 동성용향 영성촌(현 룡정시 동성용진 룡산촌)의 김시룡을 찾아갔다. 벽돌기와로 지은 우사와 지척에 있는 벽돌공장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렴경창은 기존 우사를 벽돌기와로 개진할 방안을 촌지도부에 내놓았다.

“촌에서 쓸 벽돌을 우리 절로 굽자!”

그들은 부흥촌에 량질 벽돌을 구워낼 수 있는 풍부한 붉은 진흙 자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청호촌에 가서 기술자를 모셔와 부흥의 첫 벽돌가공소인 소형 요로(窑炉)에 불을 지피고 생산대의 인력을 조직하여 벽돌을 구워냈다. 1961년에 드디여 부흥촌의 목조 우사는 벽돌 우사로 탈바꿈했다.

부흥 마을 중심에 가면 앞면이 2층으로 고풍스럽게 설계된 근 500평방메터되는 옛건물이 있다. 비록 지금은 열쇠를 잠근 대로 조용하게 서 있지만 이는 1963년부터 1964년 사이에 렴경창이 촌민들을 이끌고 자체로 지은 부흥촌 문화구락부이다. 문화구락부는 당시 부흥촌이 ‘부유, 흥성'한 ‘초급단계'에 처해있을 때의 하나의 력사문화 부호이다.

렴경창은 “문화구락부는 부흥사람들의 동심협력, 자력갱생, 간고분투로 이루어낸 정신적‘작품'”이라고 감개무량해 말한다.

문화구락부 건설 과제는 렴경창이 부흥의 실정과 촌민들의 갈망을 마음에 담고 촌 지도부와 상급 정부에 올린 파격적인 제안이였다.

당시 부흥촌 공청단지부 서기로 있었던 리철수(76세, 촌 당지부 서기 등 직을 력임)로인은 기자한테 이렇게 소개한다. “우리는 전 현적으로도 향촌 급에서 첫손 꼽히는 문화구락부를 건설해내 남 먼저 로천영화시절을 결속했고 상급 문예선전대도 청해 올 수 있었는가 하면 손풍금, 가야금 등 악기와 간소한 무대 시설들도 구비해 촌의 문예활동을 활발하게 조직했다. 구락부는 특히 청년들의 활동기지로 큰 역할을 발휘해 청년 당원을 양성하는 데도 유조했다.”

잇따라 철공소, 목공소, 제재소, 정미소, 기름방...가공소, 복무소들이 하나하나 세워지면서 린근 마을의 가공 일감까지 부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철공소에서는 무쇠 수레 바퀴를 생산하고 목공소에서는 목제 수레채를 생산해 농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수레를 조립해 상품화하기도 했다.

촌의 기업들이 활성화되자 촌민들의 생활이 꽃피고 촌 집체 수입이 4만원에 달하는 지난 세기 70년대의 호황이 이루어졌다.

자식들한테 배움의 장소 마련하다

지금은 촌민 문화활동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근 400평방메터 되는 부흥유치원 옛터.

“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의 자식들한테 배움의 장소를 마련해주자”

이는 렴경창을 비롯한 촌지도부의 한결같은 신조였고 또 꿈이였다. 당시 부흥촌에 승학시험관을 넘지 못하거나 가정조건 상 현성 중학교로 승학을 못하는 애들이 거의 70명이나 되였다.

렴경창은 “나중에 농사 짓는다 해도 문화지식을 더 배워야 하고 기본 농업생산 기술 지식을 장악한 농민으로 되게끔 교육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부흥농업중학교'를 촌부의 낡은 시설에 세워 몸소 교장까지 맡았다.

정부와 가정에 부담을 끼치지 않는 전제하에 촌에서 부담해 부흥의 자녀들이 농민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부흥농업중학교'는 세워진지 1년도 못돼 페교되였으나 렴경창은 “부흥의 자녀들이 적어도 중학교는 졸업하도록 해야 한다 ”는 의지만은 꺾지 않았다. 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976년에 끝내‘부흥중학교'를 세워냈다.

지금은 기업소에 양도된 부흥중학교 옛터 앞에서 심재필 촌무감독위원이 그 력사를 말해주고 있다.

부흥중학교 졸업생인 부흥촌 당지부 조직위원 리창한은 “어려운 당시 형편에 그래도 집 근처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행운이였다. 그때 부흥중학교에는 고중부까지 설치되여 100리 밖의 다른 마을 학생들도 오다나니 학생규모가 300여명에 달했다.”고 말했다. 렴경창의 두‘늦둥이’동생과 자녀들도 다 부흥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인구 류동의 영향으로 그제날 글소리 랑랑하던 부흥의 배움터는 지금은 인적없이 사라졌지만 그 흔적만은 아직도 남아 지나간 력사를 견증해주고 있다.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