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리연춘 -
(흑룡강신문=도쿄) 지난 가을쯤이였던것 같다.
이른 아침 한주일 먹거리를 장만하려고 우리집 부근의 아침시장으로 나갔다. 부지런한 한족들은 쌀쌀한 늦가을에도 사이사이에 발 들이댈 틈도 없이 일자로 길 한쪽에 난전을 펼치고 싱싱한 풋채소에 상긋한 과일에 고기까지 없는것이 없이 펼쳐놓고 싸구려를 웨친다. 북적이는 인파속을 뚫고 가지, 시금치, 유채등을 한가득 사들고 돌아서 국수면을 사는데 옆집 물고기가게에 다 손질해놓은 강고기 한판이 보였다. 한때는 족히 먹을수 있을것 같았다. 먹기는 좋아하지만 손질따위는 아예 외면해버리는 남편이 얄밉지만 먹는것 가지고는 천대할수 없으니 그래도 일년에 몇번은 산다. 가격을 물어봤더니 한근에 6원이란다. 그래서 한판 달라했더니 얼굴이 떡판같은 장사군아줌마가 비닐주머니에 훌 넣어주면서 10원이란다. 내가 달아보지도 않았다니 먼저 다 달아놓았으니 근심말라며 바쁜 와중에 까탈을 잡는다는듯이 귀찮아하였다. 눈으로 똑바로 보고 값을 치러야 할텐데 문득 당한 기분이 들었다. 더한것은 집에 와서 싱크대에 올려놓고 주머니를 펼쳐보니 비늘은 제거했는데 물고기 배를 가르지 않은것이다. 자세히 보았더니 머리를 비틀어떼면서 딸려나오는 내장을 뽑았을뿐이였다. 부레와 거무칙칙한 막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에익, 못된놈들 같으니라구 푸념이 저절로 나왔다.
눈으로 똑바로 보면 당하지 않을것 같지만 국경절때 또 당했다. 그날도 아침시장에서 자기네는 한번밖에 안 나오니 기회를 놓히지 말라는 쌀장사한테 쌀 백근쯤 예약해놓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겨놓고 별 생각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시장에서 온지 얼마 안됐는데 쾅쾅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며 문을 열었더니 허우대가 크고 거무칙칙한 옷차람에 한사람은 쌀을 이고 한사람은 중형저울을 들고 씩씩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어 내 응낙도 없이 신발을 신은채로 우리집 거실에 턱 들어서더니 저울을 쾅 놓고 그우에 쌀가마니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나보고 50키로는 족히 되니 3백원이란다. 농사군의 딸로 태여난 내가 쌀 백근쯤은 눈대중으로도 어렴풋이 인상이 있는데 전에 산 50근짜리 쌀보다 별로 많지가 않아 의심조로 물었더니 못 믿겠으면 나보고 서보란다. 성큼 저울에 올라섰더니 쌀마대와 비슷한 무게였다. 의심스럽지만 내 몸무게가 증명이니 돈을 주고 인차 보냈다. 보내고나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매일마다 몸무게를 체크하는 저울이 있었던것을 깜박했다. 그 저울을 가져다 아들까지 불러 낑낑 올려보았더니 기가 찬게 33.9키로란 글자가 튕겨나왔다. 아들애도 나보고 도대체 얼마 샀는가 물어보았지만 대충 얼버무려 넘어갔다. 아들애가 남편한테 고자질하면 하루종일 잔소리를 들을것은 뻔하다. 바보취급 받기 싫었다. 속으로 끙끙 앓았다. 돈을 절반 떼운 셈이니... 시퍼런 대낮에 코까지 베여가는 놈들이라고 꿍지락댔다. 그러고 보니 전화도 없이 불쑥 나타난 놈들이니 방비를 했어야 하는데 흔적도 남기지 않은 놈들을 어디가 찾는단 말인가? 정말 방불승방(防不胜防)이였다.
가끔 같은 조상의 피가 흐르는 배달족들끼리도 편견이 있는것처럼 타민족에 대한 선입견이 내 머리를 도배했다. 길에 나서면 앞에서 걷는 나그네들이 퉤퉤 받는 더러운 가래부터 지뢰를 피하듯이 조심해야하고 말 두마디 끝마다 부모를 넣은 욕지거리까지 더우기 내가 식당에 가기 싫은 리유는 떠나갈듯이 떠드는 소리와 장소와 때도 가리지 않고 피워대는 담배연기때문에 집에 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청결을 해야 하니... 다 감옥에 처넣어버려야 할 놈들이라고 하지만 난 이 땅에 사는 소수의 까탈스러운 인간으로 당해낼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자신을 위로한다.
지금껏 소금보따리를 묵직히 달고 살아왔노라는 엄마 말이 딱 들어 맞는것 같았다. 태여날때부터 검은 보자기를 쓰고 태여나는 인간이 있단다. 검은 보자기는 검은 심보란다. 엄마는 시내에 오면 매일매일 속는 기분이란다. 장사군들한테 속히우고 병원에 가서 의사한테 속히우고 지어는 불쌍한체 하는 넝마주이한테까지도 속힌단다. 내가 직접 겪어보는 사실이 이 모든것을 증명해주는것 같았다.
나의 일상생활 경로는 특별한 일 외에는 대개 세점에 불과하다. 원래는 쇼핑을 좋아하는 내가 백화점이나 옷시장이 네번째 점이였지만 온라인 쇼핑을 하다보니 이 점이 내집과 합치되였다. 평일에는 집에서 직장으로 두점, 명절이거나 쉬는 날이면 시댁으로 이렇게 반복하는게 일상이다. 내가 이래저래 꿍지락댈때면 남편은 나보고 한점으로 한면을 뒤덮는다면서 편견이라고 나무란다. 남편 친구들은 타민족이 대부분이라 그들에 대한 나의 평가도 좋을리 만무하다. 식탁에 모이면 음식문화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이런 편견을 고집쓰고 여기까지 대견스레 끌고왔는데 이 편견을 야금야금 수정해야 할때가 왔는가보다.
이번 년말가족모임에서였다. 일년이 저물어가는 마지막 달이라 부부동반으로 식사자리를 가지게 되였다. 평시에도 숨기지 않아 까탈스러운 점을 아는 남편 친구들은 그날 내가 나타나자 오래만이라며 반겨주었다. 음식점 선택에서도 내가 싫어하는 큰 철가마요리를 피하고 깔끔한 식당을 택하였다며 나보고 어떻냐고 확인까지 하였다. 이런 대우에 내가 도리여 무안해지고 미안했다. 남자들은 그들 습관대로 자기 와이프앞으로 채소를 집어주면서 나한테까지도 공용저가락을 사용하며 배려를 해주었다. 우리민족 남자들은 와이프한테 얻어먹으면 먹었지 이렇게 살뜰히 배려해주다간 자칫 아니 꼭 졸장부라고 놀림당할건 명백하다. 특별히 언급해야 할것은 그중의 한 남편은 일년동안 고생한 부인들께 년말 송사와 함께 탐스러운 장미꽃을 한송이씩 선물한것이였다. 빨간 장미를 받은 녀자들의 얼굴은 사과처럼 상기되여 한결 복스러워보였다. 그리고 부인들의 공로를 한껏 춰서 치하해주는것도 잊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이런 남편한테 시집간 녀자들은 집에서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살지 않냐며 나도 우스개를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부인이 하늘이고 부인의 말이라면 성지(圣旨)로 받든단다. 코대를 빳빳이 세워봤자 고생만 더 하는 나같은 녀인이 어쩐지 풀이 죽는 기분이다. 이때 내 편견은 언급못할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반급에서 애들이 거친 말을 하고 싸움을 하거나 우리말을 홀시할때면 “너 우리민족 맞냐?”며 훈시하던 나였지만 일학년을 맡은지 한달째 되는 가장회의에서는 순 한족인 애들이 셋이다보니 서툰 한족말로 교류를 해야했다. 전에 내가 쓰던 구두어는 다시는 못쓰게 되여버렸다. 더우기 궁금한것은 왜 조선족학교에 보냈는가고 물었더니 우리민족은 선량하고 례절바르고 따뜻한 민족이여서란다. 한가지 언어도 더 배우고 특히 례절교육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한족들에게 조선족은 괜찮은 이미지였으며 그들은 산재지구에서 우리민족 정체성이 희미한가운데서도 다문화를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흉금과 융합력을 가지고 있다는걸 새삼스레 느끼게 되였다. 선입견이 차차 문드러지고 그속에서 적응하고 살아가는 모순적이면서도 순리적인 생활에 적응하다보면 수그러들고 받아들여지는게 우리의 삶인것 같다. 더우기 지구촌에 함께 사는 유구한 력사와 문명을 거슬러온 인류로서 사회와 지역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타파해야 하는것은 민족의 차원에서 벗어난 의무이기도 하다.개학한지 근 두달이 되여 온 한족애가 있다. 조선어 진도는 받침도 다 끝났는데 이제 “아,야,어,여...”부터 배워주어야 한다. 나는 그 애한테 손은 배꼽우에 공손히 겹쳐놓고 머리를 수그리고 구십도 경례를 하면서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우리말 인사를 할수 있게끔 반복적으로 가르쳐주었다. 그 옆에서 시범을 보이는 조선족애는 발음이 우습다며 키득키득 웃기만 한다.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립장을 고집하는 형편은 못되지만 편견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내가 그리고 둘러놓은 울타리안에선 바른 행위를 가르쳐주며 민족과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추함을 배제하는 더 넓은 안목을 키워주는 교육을 행하리라!
흑룡강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