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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본 유학 생활, 아르바이트로 성장하다(고향련)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2월16일 10시06분    조회: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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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 땅을 떠나서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유행됐던 일본유학의 붐에 떠밀려서 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 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 듯하여 다른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 생활비를 자체로 해결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 연변의 일반가정의 생활수준으로 비싼 유학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집이 얼마 없었고 우리 가정도 그 중 하나였다. 평범한 가정의 장녀로서 꿈도 꾸지 못했던 유학이 본인만 노력하면 학비해결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르겠다. 부모님도 나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고 힘들게 모은 적금을 탈탈 털어서 언어학교 일년 학비와 생활비 30만엔이라는 큰돈을 쥐어 주셨다.

 

1. 일본의 첫 인상

 

그렇게 나는 부풀러 오르는 마음을 안고 일본땅을 처음 디디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웃을 일이지만 칼 도마, 양재철, 그릇 등 생활용품과 각종 비상 약들, 그리고 사시장철 안 사도 될 만큼의 옷가지를 가득 넣어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슈트케이스를 끌고, 히말라야 등반이라도 하러 갈 듯 쌀, 누룽지, 마른 콩, 말린 야채 등 식량이 될 만한 것을 가득 넣어 머리 위를 넘어가는 커다란 여행 륙색에 허리가 알파벳 “C”자로 휘어질 정도로 메고 뒤뚱뒤뚱 하면서 나리타공항에 내렸다. 처음으로 낯선 외국에 딸을 보내는 부모의 걱정하는 마음과 사랑이 담긴 짐이었기에 무거워도 무거운 줄 몰랐다.

그토록 동경했던 첫 일본땅이지만, 정작 도착하고 보니 어쩐지 낯설고 어색했다. 예쁘다 거나 깨끗하다 거나 이런 여행객들이 일본에 와서 느끼는 감정보다 말 한마디도 모르는 외국 땅에서 당장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불안감과 두 어깨를 짓누르는 부모님의 기대감에 복잡했던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꽤나 거리가 멀어서 새벽 1시가 되어서 겨우 집에 도착하였다. 이불이 없어서 외투를 하나 걸치고 쪼그리고 누운 지 10분도 안 되였는데 불시로 집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마구 흔들리는 것이었다. 지진이었다! 지진이 빈번한 곳이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도착한 첫날부터 경험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낡은 나무집이라 그런지 전등도 크게 흔들거렸다. 이대로 죽지는 않을까 하는 무서움과 불안감이 나의 심장을 극도로 자극해 박동을 한층 빠르게 했고 얼굴은 공포감에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렇게 1,2분정도 흔들리다가 멈추었다.

날이 밝았다

따사로운 햇빛이 창문으로 기어들어와 내 얼굴을 비추며 첫날밤의 공포를 차츰차츰 가셔줬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려고 집을 나섰다. 집 부근의 길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단행 도로인데 그 옆에 자전거길이라고 어깨너비만큼 그려 놓은 하얀 선도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도쿄에 왔으니 하늘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선 도시를 상상했건만 집 부근은 주택구라서 낮은 아파트만 있었다.

4월의 아침공기가 시원하게 피부에 스며들었다.

차가운 이슬에 몽글몽글 새싹이 금방이라도 피어 오르듯 시원한 공기에 나의 부푼 가슴에 새 희망이 솟구친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해봤다.

여기가 일본이다.

나의 꿈과 미래를 걸고 온 곳이다.

어머니, 아버지의 기대도 걸린 곳이다.

열심히 해서 꼭 공부를 끝까지 마치고 돌아가리라.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아르바이트도 전혀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1996년이후 유학생의 신원보증인제도의 개혁과 아르바이트 시간규제가 완화되면서 2000년전후에 일본에 사비유학생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때에 온 사비유학생들은 거의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서 공부를 했다.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2. 나의 첫 아르바이트- 가정청소부

—도적으로 모함 받다


 

나보다 반년을 먼저 일본에 온 친구의 소개로 나는 일본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어느 개인 집의 청소를 하게 되였다. 아르바이트 시급은 700엔(당시 도쿄 최저시급이 703엔)이었다. 정해진 시간은 하루에 세시간, 일주일에 사흘이었다.

시간이 짧고 시급이 낮다 보니 한달 동안 꼬박 일을 한다고 해도 월급은 2만 5천엔(중국인민폐로 약 2천원)정도 밖에 안 되였지만 집세라도 조금 충당해줄 아르바이트가 정해졌다는 것에 얼마나 감지덕지 했던지. 꼭 열심히 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 첫날, 처음 들어가보는 일본 가정집이었다.

내가 청소해야 할 주인집은 오십 대의 일본인 남편과 중국 사천에서 온 삼십 대 후반의 중국인 아내, 소학교 다니는 아이가 둘, 이렇게 네 명 가족이 살고 있었다.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고 꽤나 널찍하고 호화로운 집이었다. 부인이 집 부근에서 중국요리가게를 하나 경영하고 있어서 가정 일은 나처럼 이렇게 새로 일본에 온 유학생들을 고용해서 한다고 들었다.

일본에 오기 전까지 나는 집 청소는커녕 양말 한 켤레도 빨아본 적 없었다. 여느 중국가정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 공부만 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으며 자란, 기형 같은 공부경쟁체계에 떠밀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줄 모르는 학생이었다.

부인은 나에게 집 청소하는 요령과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었다. 설거지, 빨래, 침대시트 갈기, 이불 말리기, 먼지떨이, 바닥청소 등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부인이 하는 것을 보며 열심히 눈으로 익혔다.

약 한 주일이나 지났을까? 저녁에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일을 소개한 친구가 와서 부인이 당장 전화해라 한다며 전하고 갔다. (휴대폰이 없었다.) 나는 급히 나가서 공용전화의 버튼을 눌렀다.

“스모(일본식씨름)경연에서 받은 상장을 넣었던 플라스틱 가방이 없어졌어! 너 집에 가져간 거 아니냐?”

부인은 다짜고짜 나를 도적취급을 하면서 막말을 쏟아 부었다.

“어떤 거예요? 본적도 없는데요.” 억울했지만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말은 좀처럼 들어줄 기미도 없었고 당장 뛰어오라고 했다.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부인이 “가방을 찾았으니 이젠 가도 돼.”하는 게 아닌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도적으로 모함을 받았고 그 억울함에 눈물이 맺힌 나에게 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죄송하다는 말은커녕 미안해 하는 기색마저 없었다.

나의 가슴에 처음으로 생채기가 났다. 어릴 적 감명 깊게 봤던 일본드라마의 <오신>에서 주인공 오신이 도적으로 모함을 받고 눈물 흘리던 장면이 떠오르며 집으로 돌아서는 내 볼에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남에게 고용 당하는 신세라 잘잘못을 따지며 코를 세울 수도 없었다.

억울함을 당했다고 해서 홧김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나에겐 일본에서의 일 체험이 필요했고 또 일정한 일어기초를 닦을 때까지는 당분간 집세 낼 돈이 필요했다. 처음으로 용케 참았다. 나도 그러는 내 자신이 대단했다고 해야 할지. 여태껏 지켜왔던 자신감과 자부심이 꺾이어서 조금 서러웠다고 해야 할지. 복잡한 감정들이 가시덤불처럼 얼기설기 엉키었건만 억지로 삼켜버리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나는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여 청소 일을 그만뒀다. 마지막 월급을 가지러 갔던 날의 일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월급봉투를 넘겨받고 확인을 하니 10시간분 금액이 적게 들어있지 않은가. 혹시 계산이 틀리지 않았냐고 물으며 내가 적었던 장부를 내밀었다. 그녀는 그랬냐 하며 모르는 체 시치미를 떼더니 호주머니 속에서 봉투 하나를 더 꺼내 주는 것이었다. 봉투 속에는 정확히 10시간분 7천엔이 들어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고만 생각했지 그렇게 돈으로 흐린 세상인지는 미처 몰랐던 나였다. 어떻게 사회인으로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에게 그럴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감사하다고 하면서 받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첫 아르바이트로 나는 참는 법을 배웠다. 도적으로 모함을 받았을 때도 돈을 적게 받았을 때도 나는 화난 기분으로 당장의 분을 풀기보다 참고 조용히 넘기는 것 또한 이국 땅에서 홀로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3. 나의 두 번째 아르바이트- 닭꼬치가게에서의 아르바이트

—일주일 만에 잘리다


 



나는 친구의 소개로 면접을 보게 되여 닭꼬치가게에서 두 번째 일을 시작했다.


개업한지 오래된 그 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닭꼬치 전문점이었다. 점장인 50대의 남자가 주방 일을 위주로 하였고 친척이 된다는 40대의 여자종업원이 손님대응을 포함하여 가게관리를 하고 있었다.

닭꼬치가게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첫날, 그 여자종업원이 나에게 1번부터 16번까지 오픈 전 준비 내용을 순서대로 적은 매뉴얼을 주면서 시범을 보여주면서 가르쳐주었다.

두 번째 날, 나는 나름 더 합리적이라 생각하며 순서를 조금 바꿔서 일을 했다.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던 그 여자종업원이 얼굴이 파래지더니 화를 냈다. 왜 하라고 하는 대로 안하고 제 마음대로 하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미리 작성한 매뉴얼을 중요시하고 그대로 움직이는 일본문화를 잘 몰랐던 내 잘못이 컸다. 또한 그렇게 짠 매뉴얼도 나름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걸 묻지도 않고 바꿔버렸으니 그의 화가 난 마음이 이해가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한 그 행동 때문에 나는 그의 눈 밖에 났던 것 같다.

청소 일이 끝나니 점장은 나에게 고기를 써는 작업을 시켰다. 길고 팔뚝만 한 보기만 해도 눈앞이 아찔한 돼지 혀 네 개를 쿵 하고 도마 위에 올려 놓더니 얇게 썰라고 했다. 또 난생처음 보는 커다란 돼지 혀가 무섭기도 했고 미끌미끌하고 두께가 있어서 얇게 써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닭꼬치 가게지만 닭고기 외에도 돼지나 소의 여러 부위의 꼬치도 팔고 있었다. 돼지 혀를 다 썰고 나니 이번에는 돼지심장을 잘게 썰라는 것이었다. 처음 본 돼지심장 역시 섬뜩했다. 눈을 비스듬히 감고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일념에 부단히 칼질을 해댔다.

사흗날부터 그들이 나에 대한 태도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무젓가락을 한줌이 될 만큼 젓가락 통에 넣는다고 점장이 가르쳐준 대로 하였는데, 그 여자가 너무 적다고 나무라면서 몇 개를 더 보충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점장이 다시 와서 아까 알려주지 않았냐 하며 또 몇 개를 도로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할 때도 그랬다. 큰 식기세척기가 하나 있었는데 가득 쌓아 놓은 접시, 컵들을 넣고 돌리려고 하니 그녀가 노발대발했다. “이걸 모두 다 채워 넣어야 하지 안 그러면 전기세 낭비야!” 하면서 식기세척기 뚜껑을 확 열어 젖히고 버튼을 누르려던 내 손을 탁 내리쳤다. 이번에는 또 점장이 와서 이렇게 많이 접시가 쌓여 있는데 안 돌리고 뭐하냐고 책망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수없이 많았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둘이 기준을 정하여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나에게 알려주면 좋을 텐데.

이리해도 욕이고 저리 해도 욕이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지만 이를 악물고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여섯 번째 날, 나는 실수로 한 테이블 손님한테서 소금 맛과 양념 맛 어느 것을 요구하는가 하고 묻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자 “당장 가서 물어봐!” 하고 점장이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바로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우리 가게에선 인젠 너를 쓸 수 없으니 지금 당장 가게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미리 모두 계산을 해 놓은 듯 엿새 일한 월급이라며 돈봉투를 나에게 주었다. 연수기간에는 시급이 750엔이라면서 계약할 때의 850엔보다 100엔이나 적게 계산한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연수기간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나중에 소개를 해준 친구한테서 들었는데 그 가게에서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던 대만에서 온 여자애가 급히 그만두겠다고 해서 나를 받았지만 그 애가 사흘 만에 되돌아오겠다고 연락해 오니 나를 해고한 것이었다. 그것이 나를 자른 전부의 이유는 아니겠지만 아직 우왕좌왕하며 적응중인 나보다 가게 일을 환히 꿰뚫고 있는 그 여자애가 가게에 더 도움되는 사람이라 판단한 것 같다. 다음날부터 곧바로 그 애가 다시 돌아왔다고 들었다.

나의 두 번째 아르바이트는 이렇게 엿새 만에 잘렸다.

엄청 커다란 대못이 탕하고 내 가슴에 박혔다.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건만 비루 관을 통하여 짭짤한 것이 목구멍을 적신다.

새로운 일을 찾았다고 개인 집 청소 일도 그만뒀는데……엿새 만에 잘릴 줄을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어떡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따돌림 받아도 돈을 적게 받아도 어디에 호소할 데도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말하는 소위 이지메(따돌림)란 것이 어떤 것인지 느꼈고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 또한 언제 어디서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최선임을 느꼈고 이미 발생한 일보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4. 일본에서의 최대의 위기

 

일본말이나 술술 할 수 있었으면 아르바이트를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중학교에 올라갈 때 분반시험까지 봐서 들어간 영어 반이었는데 일본에 와서 언어장벽에 부딪치니 그것 또한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

“아이우에오”도 배우지 못하고 일본에 오기 전 몇 달만 다녔던 단기 일어학습반이 내가 한 일어공부의 전부였지만 일본에 가면 일어가 자연스레 술술 나올 것처럼 생각하며 그 공부마저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미칠 듯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우선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다.

그날부터 나는 학교로부터 집까지의 몇 개 역 구간을 매일마다 걸었다. 전철역에 내려서는 역 주위의 번화거리는 물론 뒷골목의 작은 가게들까지 구인정보가 없나 샅샅이 뒤졌다. 두주일 동안 평균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걸어 다녀 매일 발이 퉁퉁 부었고 물집이 생겨 피가 날 정도였다. 길옆 게시판이나 가게에 붙어있는 구인광고를 보면 노트에 적고 부지런히 “아르바이트 모집하나요?” 하고 확인전화를 걸어봤지만 떠듬떠듬하고 가련할 정도의 일본어 수준에 면접을 오라는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중국에서 가지고 온 누룽지에 콩 조림만 먹으면서 식비를 아껴 공용전화카드를 샀지만 얇은 자기(磁器)카드는 빽빽한 구멍이 뚫리며 아무 소득 없이 잔액이 “0” 눈금으로 된다. 가장 많은 날은 하루에 38통의 전화를 건 적도 있었다.

시켜만 준다면 아무리 힘든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겠는데……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데 내 노력은 왜 좀처럼 결실로 이어지지 않을까?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해서 두 주일이 지났을까 하던 때 이번엔 더더욱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집 문제였다.

도쿄는 워낙 집세가 비싸다 보니 셰어 하우스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에서 유학 수속을 할 때 알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같은 언어학교로 오게 된 친구 둘, 대학에서 일어를 전공하고 취직하러 왔다는 언니, 이렇게 넷이 한달 월세가 8만엔 되는 집을 빌렸다. 방 두 개가 있고 한방에 두 명씩 같이 살면서 한 사람이 2만엔씩 집세를 냈는데 그 언니가 먼 곳에 취직되어서 두 달 만에 이사를 갔고 그로부터 또 두 주일도 안 되여 이번엔 두 친구가 한꺼번에 집을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한 친구는 학업을 그만두고 이바라키현(茨城県)의 사촌언니가 있는 곳으로 돈을 벌러 간다고 하였고 다른 여자애는 사귀던 남자친구와 함께 살림하기로 했다고 하였다.

아직 일본생활에 적응도 못한 나는 8만엔이라는 집세부담을 불시로 혼자 떠안게 된 것이다. 당장 다음주부터 나가겠다는 말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크게 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 났다.

어떡해야 할지……

이제 뭘 할 수 있을지……

아르바이트도 잘린 지 두 주가 되고

집세는 한 달에 8만엔, 내가 부담할 수 없는 금액이다.

일본에 처음 올 때 갖고 왔던 돈은 첫 집세에 10만엔이 뭉텅 떨어져 나갔고 전기밥솥과 이불 등 생활용품구입, 전철 월표, 전화카드 값에 거의 동강이 났다. 청소 아르바이트로 받은 월급과 닭꼬치 가게에서 6일동안 일하여 받은 금액이 나의 전부의 재산이었다. 당장 다음달에 내야 할 집세가 걱정이었고 조금이나마 저렴한 월세의 집에 이사를 간다고 해도 처음에 내야 할 돈은 보증금, 사례금까지 합하면 내가 부담할 수 없는 큰 금액이다. (일본에서 집을 맡을 때에는 월세뿐만 아니라 처음에 보증금, 사례금, 부동산수수료를 각각 월세의 1~2개월분을 내야 하는 곳이 많다.)

잠을 설치며 굶으며 반쪽 같은 내 신세에 눈물만 났다. 하지만 걱정을 끼쳐 드릴 것 같아서 부모님한테는 알릴 수 없었다.

나의 일본은 너무너무 힘들었다.

눈 뜨면 한숨이고 눈 감으면 눈물이다.

꿈을 찾아 정처 없이 온 곳이 여기인데

내가 꿈을 실현할 곳도 이곳인데

왜 이렇게도 나의 인내력을 시험할까……

당장 집이 없어지고 생활비도 떨어지고 이대로 길바닥에 나앉아 굶어 죽을 것만 같았다. 내 신세가 꼭 마치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의 성냥 파는 처녀 애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 같은 어둠 속에 혼자 갇힌 듯이 나는 점점 절망과 외로움에 지쳐갔다. 꼬박 사흘 동안 울기만 했다.

나흘째 되던 날, 나한테 한 갈래의 빛이 찾아 들었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교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같은 반 연변 훈춘에서 온 조선족 여자애가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왔다. 내 처지를 알린다고 해도 같은 유학생처지니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걱정스레 몇 번이고 물어오는 그 애에게 나는 마침내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갑문으로 막혔던 댐의 물이 한꺼번에 꽝 터지듯 그간 쟁여 놓았던 힘들었던 일들이 쉼 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를 통하여 모조리 그에게 전해졌다. 나의 말을 듣고 있던 그 애가 잠시 어디로 나가더니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들어왔다.

“집 문제는 해결됐어. 너 우리 숙소에 와서 살아. 좀 전에 같이 사는 언니들과 너의 상황을 말했고 모두의 동의를 구했어.” 그 애의 이름은 란이었고 나보다 한 살 어렸다.

그는 위 학년의 선배언니 둘과 함께 셰어하우스를 하고 있었다. 숙소가 너무 비좁은지라 처음에는 반대를 했었는데 듣고 보니 내 처지가 너무 딱하여서 들어주었다고 했다.

일본에 와서 받은 설움과 아픔으로 하루하루 얼음장처럼 굳어져가던 나의 마음에도 따스한 햇빛이 찾아 들어와 한 겹 한 겹 천천히 녹여줬다. 란이가 아니었더라면 난 아마 그렇게 차가운 얼음장으로 굳어져갔으리라.

며칠 뒤 나는 란이네 숙소로 이사를 갔다. 그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나를 위안해주며 언니들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1층의 작은 방구석의 사닥다리로 올라가면 자그마한 다락방 같은 것이 있었는데 나는 언니 한 분과 같이 거기서 잤다. 뜨거운 도쿄의 여름날씨에 에어컨을 켜도 시원한 바람이 다락방까지는 올라오지 않았지만 나는 선풍기 하나에 의지하며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천정이 낮아서 앉아있거나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고 겨울에는 차가운 냉기가 돌아 뼈 속까지 얼어 드는 춥고 답답한 방이었지만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이사하기 전까지 나에게 있어서 그 다락방은 언제나 호화로운 별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때 나한테 그 따스한 손길을 내밀어준 그분들한테 평생 잊지 못할 고마움을 느꼈다.

또 란이가 나에게 집 부근에 새로 오픈 하는 닭꼬치가게에서 구인 중이라는 정보를 줘서 운이 좋게 아르바이트도 다시 시작하게 되였다. 수업이 끝나서 평일 저녁 매일 다섯 시간씩 일을 하게 되여 생활비도 문제없게 되였다. 고마운 사람들의 덕분으로 집 문제 아르바이트문제 모두가 해결이 된 것이다.

벼랑 끝에 서면 길이 열린다.

다만 그 길이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깨달았다. 힘들 때에는 남한테 기대기도 하고 남이 힘들 때에는 도와주기도 하고 그렇게 상부상조 하는 것이 외국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되였다.

 

5. 라면 가게에서의 단기아르바이트

—수박을 깨드릴까요?



일본어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일본에 온지 3개월만에 나한테 첫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낮에 일할 사람만을 모집한다고 하여 여름방학기간 한달 동안만 하기로 하고 숙소에서 전철로 30분정도거리의 한 라면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였다. 아침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라면 가게에서 일했고 그리고 다시 전철을 타고 이동하여 저녁6시부터 11시까지 닭꼬치 가게에서 일을 하였다. 방학에 아르바이트를 가능한 많이 하여 학비와 생활비를 모아야 했다.

라면가게 주인은 이름이 미와상 이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치리멘테이>라는 라면 체인점을 한 개 맡아 하고 있었다. 미와상 부부간과 스즈끼상이라는 오십 대의 가정주부, 나까지 이렇게 넷이서 낮에 일을 하였다. 모두가 친절한 분들이었다.

오전 열 시에 가게가 영업을 시작하기에 아침 아홉 시부터 시작하여 넷이서 한 시간 동안 모든 영업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그 가게에 들어간 첫날, 점장은 나한테 먼저 오이와 토마토, 대파를 열다섯 대 정도 넘겨주며 썰어보라고 하였다. 대파 써는 방법도 채 썰기, 어슷썰기, 편 썰기, 막대기 썰기 등 네 가지 종류로 해야 했다. 썰기 시작하여 금방 눈이 따가워 나면서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첫날부터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칼날로 도마 위의 채소들을 부단히 두드려댔다.

그러는 나를 보던 점장이 말했다.

“천천히 해도 괜찮은데. 그러다가 손 베겠어. 어린 나이에 칼질 잘하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그 마음이 전해와서 뭉클했다. 무심코 해준 그 한마디 칭찬이 또한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르겠다.

영업 전에는 채소랑 썰어 준비를 하고 영업이 시작되면 주문을 받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이런 일이지만 따뜻한 가게 분위기에 너무 신이 나서 했던 것 같다. 잘하려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또 물덤벙술덤벙 하다가 유리컵이며 접시도 많이 깼다. 몇 번이라도 화를 낼 법도 했건만 점장은 언제 한번이라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몸이 상하지 않음 됐어. 식기는 여기 많으니 하나 둘쯤 깨도 괜찮아.” 미안해서 울상이 되여 가는 나한테 점장은 항상 위안의 말을 건네곤 했다.

방학이 거의 끝나가면서 그 라면가게 아르바이트도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마지막 날인지라 더더욱 열심히 일했고 그날만 식기 깨는 일 없도록 조심조심 했다.

일이 끝나고 인사를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짐을 가지러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또 사고를 칠 줄이야! 가방을 꺼내는 도중에 씻어서 말리는 중이었던 전자레인지를 돌리는 유리판이 가방 끈에 걸려 나오면서 땅에 떨어졌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판은 바닥에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요란한 소리에 점장이 놀라서 달려왔다. 내 얼굴은 파랗게 질렸고 어찌나 죄송하던지 꼭 배상하겠다고 말했다.

점장은 내가 다친 데 없나 확인하더니 “괜찮아. 걱정 말아. 유리판 없으면 우리 가게 냉면접시가 많으니 레인지 안에 그걸 하나 넣고 쓰면 되니 사람만 다치지만 않았으면 돼.” 이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한마디한마디가 그렇게도 따스했고 감동이었다.

훗날 커다란 통 수박 하나를 사가지고 가게에 고마움을 전하러 갔다.

“그간 너무 고마웠습니다. 큰 신세를 졌습니다.” 진심을 담아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점장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긴. 이렇게 인사까지 와줘서 내가 더 고마운걸. 젊은 학생이 열심히 하는 게 보기 좋았어. 비록 물건은 잘 깨지만 말이야. 허허. 오늘은 깰 위험 없겠지?”

“정말로 많이 죄송했습니다. 그대신 오늘은 시원한 수박을 깨드릴게요.” 나도 수줍게 웃으며 그렇게 농담을 되넘겼다.

자그마한 가게에 웃음이 넘쳤다. 아마 인정과 사랑도 가득했을 거다.

한 달이라는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나는 처음으로 일본이 좋아졌다. 무심코 건네는 따스한 말 한마디가 받는 사람한테는 크나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꼭 이분들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인생을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6. 중국요리 레스토랑에서의 아르바이트

—나의 유학생활의 터닝포인트- 쥐로 인한 소동



중국요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고마운 일본가족 일가의 소개로 일본에 온지 넉 달 만에 중국요리 고급레스토랑에 가서 토요일과 일요일에 오전 10시부터 저녁10시까지 일을 하게 되였다. 그 가게는 도쿄의 번화거리 신주쿠에 위치하였고 유명한 일본대기업에서 하는 가격이 비싼 중국요리 체인점 중 하나였다. 일본에 온지 얼마 안된 햇내기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으로 넉 달 만에 그런 레스토랑에 들어갔으니 나 앞에 놓인 첩첩 난관은 말로 이루어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생소한 서비스용어들과 중국요리라지만 연변지역에서는 본적도 없는 요리이름들, 이런 것마저 외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 이런 것도 모르고 여기 들어왔냐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고 누구도 나한테 말을 걸지도 일을 배워주지도 않았다. 홀로 무인도에 버려진 사람처럼 나는 점점 외로워만 갔다. 가게에는 나까지마상 이라는 매니저가 있었는데 그가 특히 나한테 편견이 있었다.

큰 연회장 치우기, 창고 청소, 쓰레기 버리는 것. 모두가 가장 꺼려하는 힘든 일은 항상 나한테만 시켰다.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하니까 그런 것은 괜찮았다.

다만 그 소동이 있기 전까지……

그날은 토요일, 아침 10시에 나는 종전대로 가게에 출근하여 오픈 준비를 했다. 항상 하던 대로 나는 먼저 행주와 알코올스프레이를 들고 테이블을 닦으러 갔다. 테이블 몇 개를 닦고 벽 쪽 앞까지 간 나는 벽에 장식용으로 걸어놓은 옛 중국 옷이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진 것을 발견했다.

“옷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나 봐요.” 나는 매니저를 불렀다.

매니저는 그 옷을 바라보더니 피씩 웃는 것이었다.

“옷이 기울어졌으면 바로잡아야지. 너 걸상 위에 올라서서 해놔.” 그러고는 뭔가 이제부터 벌어질 일을 알고 있다는 듯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걸상을 하나 이동해서 그 옷 밑에 놓고 올라섰다.

“올라간 쪽의 옷소매를 밑으로 내리 끌면 돼.” 이상하게도 여느 때와 달리 깐깐한 설명이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올라간 오른쪽 팔 소매를 잡아 내렸다.

이때 기우뚱 내려간 옷소매 안에서 뭔가 신속이 움직이더니 불시로 그 옷의 목구멍으로 달려 나와 나한테로 덮쳤다. 내 얼굴을 무작정 밟고 또 그런대로 곧장 달아나버렸다.

그것은 쥐였다! 커다란 쥐였다!!

나는 불시로 덤벼든 불청객 때문에 너무도 놀라 걸상 위에 올라선 채로 쿵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걸상과 함께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 매니저가 손뼉을 꽝꽝 치더니 깔깔 웃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그 속에 쥐가 있기에 기운 것을 알고 있었다. 또 한쪽 팔 소매를 잡아당기면 놀란 쥐가 목구멍으로 기여 나올 것도 예상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비록 고급레스토랑이라 해도 큰 전철역 지하에 위치하고 주위에 다른 음식가게들도 많아서 가게는 정기적으로 소독이며 방어대책을 하지만 다른 곳에서 쥐들이 올 때가 가끔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간 참고 참았던 울분이 눈물과 함께 한꺼번에 터졌다. 나한테만 힘든 일을 시켰던 일,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비난했던 일, 싸늘한 말투와 시선들…… 모두가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매니저는 내가 그런 꼴이 된 일을 좋은 이야깃거리로 주방의 직원들, 홀의 아르바이트생들한테 하루 종일 말하면서 한번 또 한번 웃는 것이었다. 나는 하루 동안 가게의 웃음거리로 되였다.

눈물이 또 볼을 타고 흐른다. 나한테 덮친 쥐도 괘씸했지만 나를 그 꼴로 만든 그 매니저가 더더욱 미웠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그날 밤을 지새웠다. 풍몽룡의 동주열국지에 나오는 오자서처럼 하루 밤새에 백발이 된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생각을 바꿔서 나한테서 원인을 찾아보려 했다. 내가 가게에서 왜 그런 존재가 되였을까? 정확히 말해서 나는 일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고 가게 일도 전혀 할 줄을 몰랐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나도 힘들지 않았을까?

우선 내가 일을 잘해보자. 함께 일하는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만 하자.

소동이 일어난 이튿날, 나는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가게에 출근했다.

그날부터 나는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남들이 꺼려하는 일, 힘든 일도 내가 먼저 하겠다고 자진해 나섰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이 차기 바쁘게 쓰레기장으로 날랐고 연회장도 손님들이 나가기 바쁘게 치우러 달려갔다. 같은 나이또래 일본여자애들한테는 내가 한 말 중 틀리거나 이상하면 그 자리에서 지적해달라고 해서 몇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도 부쩍 늘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열심히 일하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차츰차츰 나한테 잘 대해줬다. 그 매니저도 차츰 나하고 관계를 개선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쥐로 인한 소동이 벌어진 석 달 뒤, 일본은 어느덧 새해를 맞이했다. 나는 백화점에 가서 곱게 포장한 과자를 두통 사서는 하나는 점장에게, 하나는 매니저에게 주면서 그간 일을 잘하지 못해서 폐를 끼쳐 미안했고 그럼에도 나를 자르지 않고 잘 대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날 매니저는 나를 따로 사무실에 불렀다.

“그간 정말로 미안했어. 상처를 많이 입었지. 내가 많이 나빴던 것 같아.”

그는 진심으로 나한테 사과하고 있었다. “전에 있었던 일들은 다 잊고 이제부터 쭉 잘 지내봐요.” 나는 그 매니저한테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청했다.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뜨겁고 짭짤했다.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됐다.

후에 그 매니저가 점장이 되였는데 그 후로도 나한테 잘 대해주었다. 유학생이니 생활비가 모자라지 않도록 아르바이트 시간도 내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배려해주었고 그 후에 일본어능력시험을 보기 전에는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나한테 일어문법도 가르쳐주곤 하였다.

싫은 한 사람을 영원히 미워하기보다 친구로 만드는 편이 났다는 말을 그 일을 통해서 나는 알았다.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해야 그만큼 자신한테 되돌아 온다는 것도 알았다.

어떠한 곤란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한테서부터 원인을 찾고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또 한 보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일은 나의 일본유학생활에서 하나의 큰 터닝포인트가 되였다. 힘들었지만 잘 넘겼기에 나는 그 가게에서 언어학교, 대학, 대학원까지 도합7년이란 긴 시간을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취직활동을 할 때에도 오랫동안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끈기와 책임감으로 좋게 봐주어 취직도 순조로웠다.

어느 책에서 “깊이가 곧 높이가 된다”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깊은 수렁에 빠져서 있는 힘껏 헤쳐 나오게 되면 그 수렁의 깊이 자체가 뛰어오르는 동력이 되며 자신이 쌓아온 높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직장에서 간혹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항상 그때 그 사건을 떠올리며 자신부터 돌아볼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는다.

 

7. 아르바이트로 성장하다



대학원 졸업사진


나한테 항상 아르바이트와 공부는 밀고 당기는 상관관계였다. 본업인 공부와 생계를 위한 일,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부에만 집중하려면 학비와 생활비가 걱정되고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다면 공부를 하는 시간이 줄어 장학금을 못 받게 되어 학비부담이 더 클 수밖에 없으니 그 평형 점을 잘 찾는 것이 중요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 평형을 이루는 점은 욕심을 버리고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정도만큼만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르바이트 외의 시간을 떼여내서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 했던 공부였다. 그렇게 나는 비록 학생시절에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은 거의 없었지만 순조롭게 언어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거쳐서 일본사회에 발을 내디뎠다.



커리우먼으로서 첫 미국 출장에서


9년이란 긴 유학생활에 나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위에서 적었던 아르바이트 외에도 과자공장일, 결혼예식장일, 타이완 밀크 티 전문점일, 회계사무소에서의 번역…… 등 많은 종류의 길고 짧게 아르바이트를 한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몸은 비록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실생활에서의 일어공부와 스킬 등 직접적인 배움 외에도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여러 일들을 겪으며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대인관계법과 무슨 일이든지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대처 법을 배웠으며 돈으로도 살수 없는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 많은 배움과 경험들이 모두 모여서 나의 자아성장의 튼튼한 발판이 되였던 것 같다.

졸업 후 일본의 한 상장기업에 취직하여 현재까지 그 회사에서 10년동안 줄곧 커리어 우먼으로 일하고 있다. 일본이란 사회에서 지금은 안정되고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여유라는 것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시절에 비해 생긴 현재의 경제적 여유가 아니라, 주어진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으로 생긴 마음속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아르바이트, 나의 청춘 성장기였다.

출처 :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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