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청춘노트-김수연]오지라퍼의 꿈꾸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2월20일 14시02분    조회:108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한 녀자애가 있었어. 시장에서 식품 매대를 하는 엄마가 있다 보니 남들보다 시장에 훨씬 많이 가는 편이였지. 엄마 매대 주변의 아주머니들이 “고븐 아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른다며?”라고 슬슬 띄워주면 서슴없이 목청을 뽑아 노래를 부르곤 했어. 그 정도면 세상물정을 알 만한 나이였을 텐데 오고 가는 뭇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았나봐.

그 녀자애에게 가끔 시장에 가기 싫은 리유가 두가지가 있었어. 하나는 늘 시장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살짝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보이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남자애 때문이였어. 한번은 녀자애가 시장에 갔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을 퍽 치길래 돌아보니 그 남자애가 그 날도 해여진 진한 파란색 옷을 입고 떼꾼한 두 눈을 치켜뜨고 녀자애를 지켜보는거야. 녀자애는 기겁할 번했지. 그 뒤로 그 남자애를 만날가 봐 시장에 가는 게 조금 무서워졌어. “얘는 부모가 없나? 집이 없나?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렇게 된 걸까?” 무서운 와중에 많이 궁금하기도 하다가 그 남자애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다른 하나의 리유는 시장 문 앞에서 여름이면 옥수수, 다른 계절엔 강냉이를 파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 때문이였어. 휘다 못해 공처럼 볼록해진 할머니의 등 그리고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 피여난 얼굴과 손을 보면 가슴이 아리곤 했지. 특히 밖에 있기만 해도 저절로 발이 동동 굴러지는 겨울이면 두터운 외투를 껴입고 하루종일 그 자리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너무 안스러웠어. 할머니가 빨리 집에 갈 수 있게 돈만 있으면 그 강냉이 전부를 사주고 싶을 정도였지. 그래서 매번 할머니를 만날 때면 강냉이를 한봉지씩 사곤 했는데 집에 채 먹지도 못한 강냉이를 잔뜩 두고 련속 사들여서 엄마한테 크게 욕먹었어. 그 뒤로 강냉이를 사지 않고 시장 문 앞을 지날 때면 할머니와 눈길이 마주칠가 봐 속 한켠 어딘가가 늘 불편했지.

녀자애가 몇살 되던 해였던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한여름날 늦은 오후였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간 흔적들이 시장 앞에 앉아있는 장사군들의 모습에 그대로 남아있었지. 얼굴은 익지 않았을가 싶을 정도로 벌겋고 머리카락과 옷들은 땀으로 후줄근했어. 할머니의 모습도 그랬어. 갑자기 멀리서 여럿 되는 젊은 남자들이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더니 장사군들이 팔고 있는 모든 물건들을 거둬가는거야. 하얀 작은‘마대'에 들어있는 옥수수며, 짚으로 짠 광주리에 들어있는 왜지며 참외며…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가릴 것 없이 와락와락.

“할머니만은 내버려둬!” 속으로 그렇게 간절히 웨쳐댔지만 그들은 할머니한테로 다가가고 있었어. 가슴 한켠이 내려앉는 것 같았어. 어떡하지? 뛰여가서 내가 막기라도 해볼가? “안돼요! 할머니꺼만은 놔두세요! 제발 가져가지 마세요!”라고 애원을 하면 그들이 눈 감아주고 가버릴 것 같기도 했어. 벌렁거리는 가슴은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데 발걸음은 그 자리에 굳어진 채로 떨어지지 않는거야.“얼른 가서 막아!”“아, 못하겠어!” 녀자애의 가슴과 머리는 커다란 두 파도가 되여 싸우고 있었지. 그러는 사이, 할머니의 옥수수는 이미 그 남자들의 손에 들려져 있었어. 할머니의 애원과 절망이 뒤엉킨 그 뿌연 눈빛은 그날 밤 실면했던 녀자애의 가슴속에 짙은 락인이 되여 박혀버렸어.

그 락인은 “너는 어쩜 이렇게 용기가 없니!”라는 말을 건네며 꽤 오랜 시간을 녀자애를 괴롭혔지. 얼마 만큼한 시간을 괴롭혔냐면 바로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족히 이십년을 말이야. 그래, 우의 이야기 속 녀자애가 바로 나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파란 옷의 남자애의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궁금하고, 그 할머니의 옥수수를 막아서지 못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후회되는 퍽이나 싱거운 사람인 나의 이야기였어. 결국 그 남자애의 이야기를 알아낸들 그 애의 상황을 바꿔줄 수도 없었을 것임을, 그날 할머니의 옥수수를 가져가지 말라고 용기를 내서 막아선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임을 분명 알면서도 지워내지 못하는 걸 보면 나는 태여나길 ‘오지랖'의 유전자를 갖고 태여났나봐.‘오지랖'이란 그런거잖아. 딱히 그럴 만한 리유도 없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한 것.

나이를 들면서 오지라퍼인 내가 그 락인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들이 있어. 가슴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고 놓쳐버릴 경우, 꽤 오랜 시간 어쩌면 평생을 후회할 수도 있다는 거 말이야. 가슴이 시키는 일이란 게 뭘가?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통해서 처음 가슴이 시키는 일을 경험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왕왕 가슴이 시키는 일은 머리가 나서서 막을 때가 많기도 하지. 가슴은 이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는데 머리는 수많은 조건을 따지면서 이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리유를 찾아. 그래서 사랑을 놓쳐버릴 때 사람들은 가장 큰 후회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사랑을 하면서 가슴이 시키는 일의 참뜻을 알게 될 즈음, 나는 가슴이 시키는 일중에 글쓰기라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어릴 적에도 기억에 깊이 남거나 강한 느낌을 줬던 일들은 글로 끄적이곤 했는데 사랑을 하면서 글을 쓰는 빈도가 더 높아졌지. 행복해도 글을 썼고, 아프면 더욱 글을 썼어. 지금 보면 쓴 게 아니라 씌여졌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아. 씌여진 글들은 알고 보니‘시'라고 부르는 것이였어.‘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시를 썼던거야. 행복해서 글을 쓰니까 어느샌가 행복은 더 커지고, 아파서 시를 쓰니까 어느샌가 아픔이 치유되는 그런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 지금도 마음이 아플 때면 전에 썼던 시들을 꺼내 읽곤 해. 그러면 아픔이 가라앉고 마음이 잔잔해지곤 하지.

글쓰기를 사랑한 내게 주변에서 전해오는 말들이 있었어.“돈도 안되는 글을 왜 써요? 젊었을 때는 돈이나 많이 벌고 글은 나중에 나이든 후에 써도 돼요.” 그런 말에 흔들릴 내가 아니지. 난 원래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해야 속이 편한 오지라퍼니까. 오지랖도 모자라서 한 삐딱까지 하는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아치기도 했지. “돈이 되는 글을 쓰면 되잖아요.” 물론 그건 아직까지 꿈 속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일이겠지만, 꿈은 버리지 않는 한 언젠가는 꼭 이루어진다고 했잖아. 난 그 말을 믿어.

그 뒤로 가슴이 더 한심한 일을 시켰어. 돈이 안된다는 글 중에서도 제일 돈이 안된다는 시로 시집을 내라고 말이야. “아이고, 뭐하러 시집을 내요? 연변에서 시집을 내면 다섯부도 안 팔리는데.” 그래서 연변에서 내지 않고 해외에서 출판하기로 했어. 책이 훨씬 더 세련되고 예쁘게 나올 테고, 훨씬 더 많은 독자들과 대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념두에 뒀던거야.

그런데 그 와중에도 머리는 하지 말아야 할 리유를 찾고 있었어. 출간을 했다가 팔리지 않으면 비용 그대로 모두 날리는 거 아니야? 뭐 이딴 수준으로 시집을 냈다라고 독자들이 비난하지 않을가? 시간이 썩 오래 흐른 뒤에 보면 스스로도 부끄러운 책이 되지 않을가?… 그때 그 락인이 말을 건네왔어.“용기를 내! 이십년을 후회할래?” 그렇게 《그대 시가 내가 되여 내게로 올 때》라는 시집을 냈고 거짓말 같이 500여부를 팔았어. 물론 그 판매부수가 랭정한 독자들의 수요가 결정했다기보다는 내 꿈을 지지하는 지인들의 응원이 만들어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시집 출간을 통해 우리 조선족 작가들도 틀을 깨고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면 사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

해외의 어느 한 블로그에서 이름 모를 독자가 쓴 내 시집에 대한 후기를 보고 시집을 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새삼 했지. 이런 감성과 글귀는 어떻게 나오는거냐며, 가을이라는 계절에 읽기 딱 좋은 시집이라면서 진심어린 추천을 하는거야. 내 글로 누군가의 시간에, 계절에, 삶에 빛을 더할 수 있다는 것, 글쓰는 이의 가장 큰 소원이자 행복이 아닐가. 오지라퍼의 꿈이 놀라운 기능을 수행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였어.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나의 이 오지랖은 스스로의 글쓰기 령역을 벗어나 슬슬 우리 민족 문화에로 뻗치기 시작했어. 타지에서 살면서 우리 민족 문화가 소실되여가고 민족정체성이 흔들리는 현상에 또 가슴이 아팠던거야. 어린 시절 시장에서 그 할머니의 모습을 봤을 때처럼. 주제 넘게 내가 하는 일들로 뭔가를 바꿔보리라 결심했어. “돈도 안되는 일을 굳이 왜?” 두번째로 나를 따라다니는 질문이야. 그럼에도 “용기를 내! 후회할래?”라고 말을 건네는 락인 덕분에 가슴이 시키는 일을 또한번 주체없이 저질렀어. 그 일을 시작한 지도 이제 2년이 거의 되여가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하기로 할 게.

이제 어른으로 커버린 녀자애에겐 작은 소망이 있어. 메말라가는 세상, 외로운 삶에 그래도, 더우기 그래서 꿈꾸는 오지라퍼들이 많았으면 정말 좋겠어. 오지라퍼들이 만들어가는 더 좋은 세상을 녀자애는 오늘도 꿈꿔.

김수연(金稣延)

1983년 화룡 출생. 화동사범대학 사회학과 졸업

문화계정 ‘글이 숨 쉬는 밤에’ 운영. 시집 《그대 시가 되여 내게로 올 때》 출간

《도라지》 2019년 제2호/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