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교부터 고중까지 공부하는 동안 제일 고마운 은사는 이미 고인이 되신 박창호선생님이다.
졸업 후 20년이 넘은 후에도 내가 문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에게 여러가지 서적과 속담책도 사다주셨고 발표된 글을 보러 일부러 우리 집에 오시기도 했던 선생님이시다. 그리고 내가 장춘 병원에 있을 때 학급 학생들을 동원해서 나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셨고 자주 날 찾아서 우울해진 내 마음을 풀어주신 잊을 수 없는 담임선생님이셨다.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창들과 함께(뒤줄 왼쪽 필자)
내가 글쓰기를 시작해서부터 선생님은 늘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여직껏 가르친 수많은 학생들중에 작가가 나타나서 내 어깨가 우썩 올라가는군.”
2000년도의 어느날 선생님이 날 식당에 불러서 같이 식사했다.
“식사 후 너 집에 가서 네가 쓴 글 보고 싶구나.”
선생님의 제안에 나는 선생님을 집에 모셨다. 어느 글 보여드릴가 하다가 록음기를 틀어놓고는 수필 〈나의 미〉를 록음한 테프를 록음기 안에 넣었다.
인차 연변방송국 아나운서의 귀맛 좋고 조금은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거리에 나서기만 하면 사람들은 자꾸자꾸 나를 쳐다본다. 그것은 나의 용모가 이쁘거나 눈부신 옷차림이 아니라 바로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이다. 나를 보는 눈길 속에는 분명 동정과 리해가 다분한 데도 나는 어쩐지 그 눈길이 싫었다. 왜냐 하면 외모의 드러난 결함으로 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는데 그 심정이 좋을 리 만무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또 대수롭지 않은듯 활개치며 걷는다. 아무튼 절뚝거리는 걸음이라도 그 누가 대신 걸을 수 없잖겠는가!
그러나 한때 나는 자신의 처지를 두고 몹시도 비감했었다. 길을 걷다가도 그 누가 쳐다보면 곧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고 어떤 날에는 진종일 두문불출했고 또 거리에 나서면 남들의 온전한 걸음걸이를 그토록 오래오래 부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몇번인지 딱히 기억은 못하나 나도 뾰족구두 신고 꼬리치마 입고 버들가지마냥 한들거리며 걸었었다. 하지만 그것이 꿈이였을 때 나의 마음은 한없이 애달팠고 가슴이 저려났다. 나는 울음 섞인 생의 언어로 얼룩진 운명을 탓하였다. 많고 많은 꿈중에서 하필이면 이 같은 꿈을 꾸는 건 뭐냐고 자신을 호되게 책망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 꿈이 영영 사라졌다. 나는 그걸 애써 구중천에 날려보냈다. 맹목적인 환상추구와 허식은 실제적인 미가 아님을 절실히 느께게 되였기에.
물론 사람다다 미를 추구하기에 그토록 신경을 써가면서 외모를 다듬고 가꾸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욕구이니 탓할 바가 아니다. 나는 비록 외적미를 잃었지만 개의치 않게 생각한다. 왜냐 하면 나는 잃은 대신 몇갑절 되는 보귀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람차고 실제적인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속에서 진정한 미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 철리를 깨닫는 순간 나는 문뜩 진실한 자신, 그리고 날따라 성숙되면서 넓어지는 자기 마당 한복판에 하나의 투명한 신념이 굳어지면서 좁은 가슴을 불태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윤택스런운 삶을 위해 나는 이 시각도 그 무엇을 쓰고 있다. 단순히 쓰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고 되는 대로 쓰는 것도 아니다. 그 속에는 생에 대한 의욕이 움트고 있으며 추억도 미소도 무성해지면서 종시 늙을 줄 모르는 생의 노래가 엮어지고 있다.
인간의 미는 단지 사뿐대는 걸음걸이와 아름다운 용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지가 멀쩡한데 있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외모의 미는 사람들에게 한 순간의 현란한 감을 주지만 내적 미는 영원한 것이다.
한낱 연약한 마음의 포로가 되지 말고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강자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은 생의 악장에다 심금을 울리는 악보를 써가려는 굳은 신념이 내 마음 창가에 우련히 피여가는 길에 나의 미가 동반된다.
침대에 앉은 자세로 조용히 듣고 있노라니 나는 왜서인지 저도 몰래 눈물이 나왔다. 운명이 불행해서 마흔살 넘도록 치마 한번 떳떳이 못 입어보고 하이힐 한번 못 신어보고… 치마와 하이힐은 녀자들의 특권이고 자랑이건만…
처음에는 조금씩 흐르던 눈물이 조금 후에는 비오듯 흘러내렸다.
“아니, 너 그냥 이렇게 울면서 사는게 아니야?”
선생님의 휘둥그래진 눈에서는 나에 대한 실망이 보였다. 나는 급기야 눈물을 닦았다.
‘아니, 내가 왜 이러는 거야? 늘 나로 해서 자부감을 느끼는 선생님 앞에서 말이다.’
나는 인차 얼굴에 웃음을 띠였다. 나의 웃음어린 눈확에는 그래도 눈물이 꼴똑 찼으리라.
상처란 혹심한 괴로움인 데도 면역성이 없다. 그러나 삶 속에서만이 아픔도 괴로움도 느낄 수 있기에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가!
골드시미드는 이런 말을 했다.
“누가 가장 영광스럽게 사는 사람인가? 참된 영광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다시 일어나는 것에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는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런 박수갈채를 나는 많이도 받았었다.
그랬다. 장애란 넘어지라는 것이 아니라 뛰여넘으라는 것이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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