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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들이 사람대접 받던 시절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12월3일 07시41분    조회: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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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소의 이야기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우리 집은 오도구라고 부르는 산골 마을이였는데 훈춘에서 150여리 북으로 들어가 네 면이 산으로 둘러있는 그리 작지 않는 골안이였다.

동쪽 산밑으로 훈춘강이 흘러 남으로 흐르고 북으로는 작은 강물이 흘러 훈춘강과 합수하였다.

필자

서쪽 산밑으로는 도랑물이 흘러 동쪽으로 가다 막혀서 남쪽 켠 습지에 흘러 들어갔다. 어디나 물이 흐르다 보니 미처 큰 강에 들어가지 못한 물들이 남쪽 켠 넓은 습지에 들어가 오도구에는 엄청나게 큰 습지(그때 우리는 그 곳을 사득판이라고 불렀다)가 있어 봄, 여름 내내 풀과 꽃들이 자라고 피여나 자연화원을 만들었다. 꽃들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꽃이 남색옷을 입고 남들보다 름름하게 솟구쳐 올라 애들이 다투어 꺾어 가던 붓꽃이였다. 그 곳을 떠난 후 다시는 그렇게 희한한 붓꽃을 보지 못했다. 그 습지가 오도구 소, 말, 나귀 등  짐승들의 먹고 노는 자연보호구였다.

밭갈이나 후치질 가을걷이를 하지 않을 때면 집집마다 그 습지에 나무말뚝을 박고 소 코등에 길다란 바줄을 매여 놓으면 소들은 자유롭게 거기서 배불리 먹고 누워 있기도 했다. 마을 애들도 깊지 않은 습지에 들어가 눈부시게 피여난 붓꽃을 꺾어다 묶어 가지고 놀았다.

밤이면 산에서 범, 승냥이 등 갖가지 짐승들이 내려와 마음대로 다니는 락원으로 되였다.

오도구는 동쪽산 밑 훈춘강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집단부락이였다. 훈춘으로부터 춘화로 통하는 큰길, 말하자면 일본이 쏘련을 진공하려고 닦은 그 신작로 량쪽으로 이어서 지은 집들이 있고 서쪽, 동쪽 량쪽에 수레길만큼 넓은 길을 따라 또 집들이 있고 부락 주위는 토담벽이 둘러있고 그 우에 가시쇠줄들이 늘여져 있었다. 동서, 남북으로 사람, 수레들이 통하는 길이 있었다.

우리 집은 서쪽산 언덕마을에 있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습지와 ‘피낫밭’ 사이로 둔덕 길이 었었다. 우리는 그 길로 집단 마을에 있는 친척집들을 다니군 했다. 언덕 밑에 샘물이 두 곳에서 솟아나와 샘터를 만들었고 흘러 내리는 도랑물에서 세수도 하고 빨래도 하고 하였다. 언덕 마을에는 20∼30호쯤 살았는데 밭 가운데 집을 짓고 살았다.

열여섯살에 장가들어 열세식솔 대 가정을 떠멘 우리 아버지는 일욕심이 대단했고 신체도 건장했다. 술도 잘 마시고 흥이 나면 함지에 물을 담고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며 〈아리랑〉도 잘 부르셨고 북도 잘 치셨다.

아버지는 우리가 일여덟살도 채 안될 때부터 10리 밖에 있는 묵은 돌밭을 일구며 우리더러 돌을 주어내여 길에 쌓게 하였다. 아버지의 제일 큰 애호는 소였다. 이 숱한 식솔을 먹여 살리자면 소를 세만 맡아 써서는 판부족이였다. 그러던 차 오도구 북쪽으로 몇십리 밖에 사는 홀어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와 큰 오빠를 양아들로 삼고 친척처럼 서로 보내자고 하였다. 마침 오빠의 양어머니 집에는 암소 한마리가 있었는데 남편이 죽은 뒤 거두기가 힘들어 팔아 버리겠다고 하였다. 머리가 비상한 아버지는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그 소를 자기가 가져다 거두고 소가 새끼를 낳으면 첫 해는 젖을 떼면 양어머니가 가져다 팔고 두번째 해의 송아지는 아버지가 가지면 어떻겠는가고 하니 양어머니가 제꺽 응낙했다. 그러면 소도 잃지 않고 돈도 생기니 너무 기뻐 이튿날로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소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때 아버지는 온 세상을 얻은 것만큼 기뻐했다.

몇년이 안되여 아버지는 집 동쪽 켠에 우사칸도 짓고 소도 몇마리 불구었다. 아버지는 거의 밭이 아니면 우사칸에서 소와 같이 나날을 보냈다. 우사칸에는 항상 짚이며 풀이며 한쪽에 쌓여있고 작두를 놓고 오빠들더러 작두를 밟게 하여 짚이나 풀을 잘게 썰어 구유에 담아 소들에게 먹이였다.

가을이면 옥수수 찌개나 콩 찌꺼기를 모아 두었다간 봄에 그 것을 가마에 삶아서는 토기배떠리(함경도 사투리)에 담아다 짚우에 쏟아 버무려 주군했다. 소들에게 영양보충을 시키는 것이였다.

봄이 되여 밭갈이를 할 즈음이 되면 아버지는 어머니더러 차좁쌀 떡을 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우리 살던 고장은 사방이 산이 막혀있고 습해서 벼농사가 안되고 언덕 밭에는 콩, 조, 옥수수, 감자 등을 심고 습지옆 밭에는 피낫을 심었다. 그러다 보니 입쌀은 20리 떨어진 대륙도구 골안에 가서 기장쌀과 바꾸어 와야 했다.

떡구유에 떡메로 친 떡을 아버지는 반 이상 토기배떠리에 담아가지고 우사칸으로 갔다. 나는 그 떡이 그렇게 아까웠다. 도무지 리해되지 않았다. 남은 떡은 열도 넘는 식구가 한끼 먹으면 다였다. 아버지 따라 우사칸에 나가보니 아버지는 물을 담은 배떠리에 손을 적신 다음 떡을 한주먹씩 뚝뚝 뜯어서는 물에 놓았다 낸 다음 둥글소 입안에 넣어주면 소는 입을 쩍 벌리고 두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며 넝큼넝큼 삼키는 것이였다. 아버지도 희색이 만면해서 옆에서 부럽게 바라보는 암소에게도 먹여주군 했다. 그 것들이 좋아하며 떡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에 잠겼던 아버지 모습을 지금도 보는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 보고 아버지는 어째 우리보다 소를 더 ‘커’하는 가고 물었다. 우리한테는 늘 화를 내면서 소를 보고는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이 리해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대답이 명창이였다.

“그 소가 너 애비의 생명이다.”

그리고는 소에게 떡을 먹이면 힘을 써서 밭갈이철에 밭갈이를 잘한다는 것이다. 소도 사람과 같아서 잘 먹어야 힘을 쓴다고 한다. 그러면서 “먹은 소 똥눈다” 는 말이 그런 맥락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할어버지의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러는 아버지가 차츰 리해가 갔다.

아버지는 일년 치고 밭갈이철, 후치질, 가을걷이철이 되면 꼭꼭 소에게 사람도 못 먹는 조찹쌀떡을 쳐서 손수 먹여준다. 어린애에게 떡먹이듯 목에 걸릴가봐 물에 담그었다 먹이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습관이 되였다.

동북해방전쟁 때 마을에서는 힘 센 장년들을 뽑아 륜번으로 6개월씩 담가대에 내보냈다. 담가대에 나가면서 아버지는 그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소를 농회에 들여 놓았다. 이젠 세월이 바뀌고 있음을 미연에 눈치 챈 모양이다. 그 날 아버지는 황소를 목욕까지 시켜놓고 몇번이나 목을 끌어안아 준 다음 끌고 가 농회에 바치고 떠나갔다.

몇달 후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입고 갔던 솜옷을 군대들에게 벗어주고 쓰고 갔던 개털모자도 벗어주고 군대에서 한개씩 발급한 흰 세수수건만 머리에 두르고 돌아왔다. 그 때까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군대들이 입을 것, 먹을 것이 없이 고생하며 싸운다고 군대들에게 다 벗어주고 그냥 빈 몸으로 홀가분하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사이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우리 집은 밭도 많고 소도 많다보니 상중농이 되여 청산을 맞게 되였다.  겨우 살아 돌아온 아버지는 도무지 리해되지 않아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려 일한 것이 화를 불러 왔구나)고 하면서 락심했다. 그러다가 우사에 암소(다른 집의 소)가 있는 걸 보고 그나마 얼굴에 희색을 띄우고 우사칸에 앉아 소와 동무하였다. 그 암소는 아버지의 가장 절친한 벗이고 희망이고 생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후에 정부에서 정책 규정을 하여 착취하지 않고 번 재산을 청산한 것이 잘못 되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암소를 씨받이로 또 소를 불구어 가면서 누구도 가지지 않겠다는 돌밭에 농사를 지어 살림을 춰 세웠다.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를 보고 ‘돌꼭대기에 올려 놓아도 살 사람’이라고 혀를 찼다.

우리 집은 반세기도 넘게 살던 오도구촌을 떠나 1953년도에 훈춘 부근 신화촌으로 이사왔다. 아이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마침 고급사를 하던 때라 아버지는 또 불린 소들을 몽땅 집체에 들여 놓아야 했다. 소가 없는 집은 집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숨만 쉬더니 아예 생산대장을 찾아가서 자기는 우사칸일을 하겠다고 자진해 나섰다. 이렇게 되여 밤이면 이부자리를 우사칸 짚더미 우에 펴고 쉬면서 소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소도 짐승이라지만 주인의 극진한 사랑을 알아준다고 한다.

식구가 많은 아버지는 ‘공수’를 더 벌기 위해 겨울이면 생산대 소에 발구를 메워가지고 왕청립업국 어느 림장에 가서 목재 부업을 하였다. 그 림장 부근에 둘째 이모네가 살고 있었는데 갈 때 그 이모네 집에 들려 술도 마시고 그 뒤에도 몇번 소 발구에 앉아 다녔다고 했다.

그런데 한번은 몸이 아파서 좀 쉬겠다고 말하고 발구에 앉았는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단다. 소가 아버지를 싣고 곧추 이모네 집에 찾아가 음메-음메-우니깐 이모가 달려나가 보니 아저씨가 정신을 잃은 지라 온 식구가 달려나와 얼대로 언 아버지를 가마목에 눕히고 림장 의사를 불러 침을 놓는다 약을 대접한다… 온밤 부산을 떨어서야 아버지는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그 소가 ‘은혜’를 갚은 덕에 아버지는 살아 돌아왔다. 공세운 그 소를 아버지는 자식보다 더 사랑했다.

그렇게 너무 고생만 한 아버지는 랭병으로 방광이 터져 4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소와 같이 살던 박아바이네 이야기

우리 살던 둔덕 밑에 두곳에서 샘물이 흘러 나왔는데 우리가 길어먹던 샘물터 언덕 우에는 만족 왕가네가 살고 남쪽 켠 샘터 언덕 우에는 박아바이네가 살았다. 우리 할머니가 박씨다 보니 또 먼 친척이여서 나는 어릴 때 그 집에 작은 아이들이 없는 데도 자주 놀러갔다.

어릴 때 호기심이 많은 나는 그 집에 자주 다닌 원인이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 집에 90이 넘은 키가 작은 할머니가 신기해서(그 때는 60, 70세를 넘게 사는 로인이 별로 없었다) 였고 다른 하나는 그 집은 우사칸이 따로 없고 한집에서 소도 살고 닭도 살고 사람도 살기 때문이였다. 우리 할머니 말에 의하면 그 집 로할머니네 삼형제는 모두 백살을 넘긴 오도구 골안에 전설이란다. 맏언니는 105살에 죽고 둘째 언니는 104살에 줄고 지금 저 할머니는 95세인데 아마 언니들보다 더 오래 살 것같다고 했다. 머리도 60, 70세 때에는 하얗었는데 다시 저절로 새까맣게 되였다는 것이다.

어느 날 내가 들어가니 우리 할머니와 동갑짜리 그 집 할머니가 바늘에 실을 꿰지 못해 나보고 꿰달라고 하였다. 뒤에 옹크리고 앉아있던 그 괴이한 로할머니가 “이리 가져와” 하고 딸에게서 바느실을 빼앗아 가더니 제꺽 실을 바늘귀에 꿰주는 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신기해서 집에 와서 그 말을 했더니 모두 웃어댔다.

그 집은 들어가면 소똥 냄새, 닭똥 냄새, 사람 냄새가 대단했다. 여름에는 문을 열고 있어 괜찮은데 겨울에 들어가 보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집 식구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사람들은 모두 박아바이를 보고 우사칸을 집 옆에 지으라고 권고했다.

키꼴이 크고 무던하게 생긴 박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나는 한평생 소와 같이 살아서 내 자식들보다 더 친한 식구라구, 자다가도 오줌 누러 나갔다 들어오면 그놈들에게 꼭꼭 여물을 담아주고 물도 먹이고 한다네. 닭들도 소들과 동무해서 덕대 우에 앉아 구구구 지절대고 이게 사람이 사는 멋이라네. 우리 조상들도 소를 조상으로 모셨잖아, 나는 인젠 그놈들의 냄새를 맡지 않으면 밥맛이 없고 잠이 안 온다네, 저 놈들도 짐승이라지만 내가 아프나 늘 눈을 뜨고 건너다 본다네.”

그러는 박할아버지를 우리 할머니는 ‘고집쟁이’이 같으니라구 … 하며 나무람하였다.

길다란 소 구유는 짐승과 사람간의 ‘국경선’이였다.

박아바이는 원견이 있는 분이셨다. 박아바이네는 남쪽 샘터 언덕우에 집을 지었기에 물을 길어 오거나 빨래하거나 모두 편리했다. 또 박아바이네 집 언덕 샘터로부터 집단 부락(시내)으로 가는 500여메터 되는 둔덕길이 있었다. 흙과 자갈로 다져 만든 이 둔덕길은 2메터쯤되는 거리는 보도였는데 수레랑은 못 통했다. 우리는 셋째 고모, 둘째 고모, 셋째 이모네 집으로 갈 때면 이 둔덕길로 ‘시내’로 갔다.

시내 서쪽 끝에 있던 셋째 이모네 집에서 돼지순대를 만든다고 해서 나와 나보다 한살 아래인 넷째 고모가 아마 8, 9세 때쯤의 이야기일 것이다. 순대국을 먹고 고모가 작은 물동이에다 우리 집에 보내는 순대국을 가득 채워 똬리를 내 머리에 얹어주고 작은 고모가 내 앞에 서고 이 언덕길에 올라서서 한참 걸어오는데 고모가 “범이다, 범이…” 하고 소리쳐서 내다 보니 바로 박아바이네 돼지굴 옆에서 벌건 불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였다. 초저녁인데 어두우니깐 그 시절에는 범도 밤이면 자유 세계였고 승냥이도 초지에 모여오고 바로 초지옆에 있는 박아바이네 집을 방문하러 온 모양이다.

그 때 그 이야기는 내가 어느 책에 아마 〈훈춘, 내 고향 내 이야기〉에 쓴 것 같아 줄인다.

그 습지에서 밤에 잊어 버리고 풀어오지 않아 선 자리에서 승냥이에게 밑구멍으로 내장을 내 먹히고 죽으면서도 꼿꼿이 죽은 나귀이야기…

습지의 독 풀을 잘못 뜯어먹고 죽어 장손을 잃었다고 통곡하던 큰집 할아버지네 (나의 할아버지 맏형님 손자) 이야기…

그 습지는 화원이면서도 인간과 짐승의 슬픈 이야기, 애환이 숨어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박아바이는 날이 어둡기전부터 돼지우리에 쇠줄 그물을 씌우고 소를 습지에서 풀어다 집에 매고 어쩌면 샘터, 습지, 언덕길을 혼자 가진 ‘부자’인 것 같았다.

김영금/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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