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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기획24] 이주문화의 대표작 중국조선족농악무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5월18일 09시38분    조회:2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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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계렬보도-[두만강은 말한다24]

—중국조선족농악무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되기까지

연변박물관에 설치된“중국조선족농악무전시청”정면에는 유네스코에서 발급한 “인류 무형문화유산 공약”증서(2009년 9월)가 정히 걸려있다. 증서에는 “인류무형문화유산위원회는 비정부적차원의 중국조선족농악무(상모춤)를 인류의 무형문화유산대표작명부에 등재한다.”는 내용과 함께 “문화유산을 더욱 잘 보호하고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며 문화의 다양성을 격려하기 위함”이라고 적혀있다.

조선족농악무는 이주문화의 꽃

농악무는 조선반도에서 조선왕조후반기에 형성된 악(乐), 희(戏), 무(舞) 의 성격을 갖춘 농사와 관련된 전통민속놀이이다. 농악무는 19세기 중엽으로부터 살길을 찾아 중국대륙으로 이주하는 이주민들의 쪽박에 든 벼씨와 함께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 전파되였다. 조선족농악은 조선족의 이주와 맥락을 같이 하게 된다.

“상모춤의 고장”이라 불리는 왕청현일대에서는 1928년경에 계관향 영벽라자에서 처음 농악놀이가 시작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사암리의 농민들이 이곳 영벽에 이주해오면서 살얼음을 까고 갈퀴손으로 나무뿌리를 뽑아 논을 일구고 벼씨를 뿌려 농사를 지으면서 쉼시간이 되면 밭머리에 세워둔 농기를 둘러싸고 농악놀이를 벌렸다고 한다.

꽹가리 ,징, 장고, 북이나 농기구 또는 식기들도 들고나와 함께 두드리면서 한바탕 즐기기도 하고 저녁이면 남녀로소가 벽처럼 바람을 막아주는 “영벽라자” 큰 돌바위앞에 모여 우등불을 피워놓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상모도 돌리면서 추위를 덜고 피로를 풀었으며 야수들의 침습을 물리쳤다.

1954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 소집을 열렬히 경축하는 왕청현 서위자농악대.

그후 영벽라자가 항일유격구로 된 탓으로 일제놈들의 탄압에 의해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왕청일대의 하마탕, 서위자, 중안, 배초구, 면전 등지로 이사를 가면서 영벽농악은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그러나 타지방으로 간 영벽사람들에 의해 또 그 지방의 농악이 다시 들풀처럼 살아나기도 하였다.

30년대로부터 동북 3성에 조선족집단부락이 늘어나면서 연변을 중심으로 대량의 농악대가 형성되였고 중국땅에서 농악무가 이주문화의 꽃으로 피여나기 시작하였다.

1935년 음력 3월 24일, 조선 강원도와 함경북도의 200세대의 농민 1000여명이 왕청 하마탕에 정착을 하게 된다. 그들은 추위에 떨며 움막집을 짓고 물곬을 따라 논을 풀기 시작하였다. 오월 단오날이 되자 농민들은 철조망을 두른 마을안에서 꽹가리소리와 북소리를 울리며 첫 농악놀이를 벌렸다.

1939년, 조선 강원도 평안군의 김희연이 배초구진 면전촌에 와서 농악대를 조직하였는데 타악기가 없었다. 그들은 피나무통을 솥에 삶아 진을 빼고 그늘에 말린 다음 얇게 깎아서 북통을 만들었고 소가죽대신 노루가죽으로 새장고를 만들었으며 놋대야를 징으로, 놋그릇뚜껑이나 놋대접을 꽹과리로 삼았다, 상모(이곳 사람들은 돌모라고 하였음)는 박의 밑부분을 자르고 속을 뺀 다음 뾰족한 부분에 소코투레같이 머루넝쿨을 후려달고 창호지며 명주천으로 패랭이를 만들어 돌릴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는 단오나 추석이 되면 조상들에게 제를 지낸후 한바탕 농악으로 즐기고 린근마을을 돌면서 순회공연도 하였다.

험악한 자연환경과 일제의 잔혹한 탄압속에서, 생사를 건 개척앞에 농악은 하나같이 뭉쳐 곤난에 대처해나아가는 정신적 지주였으며 한과 흥을 아우르는 문화적명맥으로 이어져갔다.

조선족농악무의 력사진로를 바꾼 일대 사건

1945년 “8.15”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으로 중국조선족들은 나라의 주인으로 되였고 민간문예를 발전시킬수 있는 자유와 혜택을 얻게 되였다.

이주초기 조선족농악은 두레농악, 기원농악, 걸립농악, 연예농악 등 네가지 류형으로 조선반도의 농악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51년 연변문공단(연변가무단의 전신)의 무용교원 겸 안무가였던 조득현선생에 의해 무대예술화한 “농악무”가 탄생하면서 조선족농악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1957년 2월 14일, 북경회인당에서 모택동주석과 악수를 나누고있는 조득현 (오른쪽 두번째)
 
조득현선생은 농악놀이를 하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농악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면서 원 농악놀이를 기반으로 더욱 집약되고 승화된 조무형식의 예술무용작품을 창작하여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창립 “9.3”경축무대에 올렸다.

그의 “농악무”는 사물잡이며 무용수 배치와 상모 사용, 복식 등 여러 면에서 농악놀이와 달랐다. 사물장단에 맞추어 새납의 쩌렁쩌렁한 울림속에서 진행되는 이 무용은 뛰고 도는 남성성격의 약동적인 춤이 위주이면서 집약적 조약, 집체로 상모돌리기, 쏠로들의 특기, 대형변화를 이루는 녀성들의 도도리, 장상모의 특기표현 등 농악놀이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창조적인 전형표현들로 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속에 빠지게 했다.

조득현이 창작한 "농악무"의 한장면.

이때로부터 마당이나 밭머리에서 펼치던 “농악놀이”가 악기반주와 무용이 어우러진 무대예술로 되였고 기존의 신앙을 주축으로 하던 농악놀이는 점차 상모춤을 중심으로 예술화되면서 분발매진하는 열정적인 조선족의 형상을 부각하였다.

“농악무”는 중남해 초청공연에서 절찬을 받았고 북경을 비롯하여 남방과 서북, 동복지역 전국순회공연길에 올랐으며 연변가무단은 “상모춤가무단”으로 불릴 정도로 그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연변가무단을 비롯한 예술단체들에서는 “농악무”를 줄곧 주요예술공연종목으로 삼았으며 연변가무단의 “농악무”는 “중화민족 20세기 경전작품”으로 선정되였다. 

당시 경상남도 출신의 민간예인 하태일선생은 연변문공단에 초빙되여 무용수들에게 상모춤을 전수하였고 직접 무대에 올라 주역을 맡았으며 조득현선생을 도와 농악무를 처음 예술무대에 올렸다. 1959년부터 그는 연변예술학교의 무용교원으로 학생들에게 상모춤을 가르쳤는데 그가 양성한 학생과 제자는 약 100여명에 달한다. 그들 역시 연변과 동북 각지의 농악무 보급과 발전에서 중견으로 활약하였다.

원형보유와 함께 혁신발전하는 조선족농악무

문화대혁명시기 “민속적인것은 모두 잡귀신”으로 몰리는바람에 조선족농악무는 10년간이나 침체기에 들어갔다. 허나 20세기 70년말, 당중앙 11기 3차전원회의가 열리고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되자 농악력사가 긴 왕청현의 배초구, 서위자, 화룡 투도, 안도 장흥, 도안구(새마을), 룡정 팔도 등 농악현장들에서는 천정에 숨겨두었던 상모와 꽹가리를 꺼내들고 또다시 농악무를 추기 시작하였다.

안도현 장흥향 새마을(도안구)은 1938년 경상남도 협천군과 밀양군의 60세대가 간도만척지국의 기편으로 집단이주를 해오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황량한 곳에 정착하여 두레를 뭇고 집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보뚝을 쌓는 등 집단행사에 북을 치고 꽹과리, 징을 울리면서 기세를 높이고 사기를 북돋우며 난관을 헤쳐나갔다.

개혁개방이후의 안도현 새마을 농악무.

1942년 9월, "재만조선인대표단”의 이름으로 신경(장춘)에서 열린 예문제(艺文祭)활동에 참가한 도안구농악대(158명)는 26개 민족이 참가한 대회에서 우승을 따냈고 “민족특색이 짙은 프로”로 절찬을 받았다. “ 특히 풍수무의 상모돌리기에서 보여준 높은 기교는 조선 본토에서도 보기 힘든것이여서 관중들을 감동시켰다.”고 당시 문예출판사‘예문’잡지 2월호에 기재되였다.

1980년 여름, 미국, 독일, 일본, 향항 등 나라와 지역의 민속학자들이 새마을을 찾아와 농악무를 감상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아도 이처럼 민속놀이원형을 보존하고있는 고장은 처음 본다.”며 그 원인에 대해 깊이 연구해볼바라고 머리를 끄덕였다.

왕청현에서는 농악무를 군중문화사업의 중점으로 틀어쥐고 추진하였다. 배초구진은 해마다 광장농악콩쿠르를 조직하였는데 1987년 8월, 배초구진 제1차농민문화주활동에서 “광장천인농악무”를 성공적으로 치러 국가문화부와 길림성문화청의 높은 긍정을 받았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로부터 “상모춤의 고장”(1988년)으로 명명되였다.

그속에서 뛰여난 기량을 펼친 김명춘은 길림성문화청으로부터 “조선족상모대왕”으로 선정되였다. 그는 세계에서 제일 긴 32메터에 달하는 상모줄을 돌리는 기록을 올렸고 장고를 치는 녀성들이 줄을 지어 중상모짓을 꿰질러 나가는 천권기법(穿圈技法)이며 물채에 황, 홍, 란 3색 상모줄을 달고 사람과 땅과 하늘이 한우주속을 살아감을 표현한 상징기법들을 창작하였다. 상모꽃도 흰색으로부터 진달래색으로 바꾸어 우리 민족의 선구적정신을 표달하였다. “이런 창작들은 중화민족문화권에 살아오면서 변화되는 심미추구에 따른 창조적 발상”들이였다.

끊임없는 변화발전속에서 농악무는 조선족마을마다 가두와 공장의 공연무대에서도 빠질수 없는 최고인기프로로 되였고 전국문예경연에서도 농악무가 떴다 하면 늘 금상자리를 차지하였다. 200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돐 경축기념행사에서는 수천명이 등장하는 대형광장농악무가 장관을 이루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조선, 한국, 미국, 러시아, 이딸리아, 대만 등 나라와 지역과의 국제문화교류장에서도 농악무는  주요교류종목으로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조선족농악무는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상징의 하나로 굳건히 자리를 잡은것이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선정 론증석에 나선 “대표”

2005년부터 우리 나라 문화부에서는 전국적으로 무형문화유산의 발굴과 신청사업을 대대적으로 벌려나갔다. 2006년 5월, 조선족농악무의 가장 대표적이며 가장 절정을 이루는 상모춤이 국가급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다.

2008년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는 조선족농악무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대폭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신청에 도전을 걸었다. 당시 소식이 밖으로 흘러나가면서 한국측에서는 네티진들이 “한국의 농악무를 왜 중국에서 신청하는가? 이것이 문화략탈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인터넷을 달구었고 여태껏 농악무를 국가급으로도 등록하지 않고있는 한국당국을 비난하는 등 심각한 문제들이 속출하면서 자칫 외교문제로 번질 우려가 잇달았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록신청 자료사진.

당시 북경에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선정 론증대회가 열렸다. 그 론증석에 추천단위 법인대표로 나선 연변조선족자치주 문화국 심수옥국장에게 사회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사회자: 조선족농악무가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될수 있는 문화적가치는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심수옥: 농악무의 앞장에서 추켜드는 농기에 새겨진 “농자천하지대본”(农者天下之大本)은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변함없는 진리로 통하고있습니다. 농악무에 동원되는 사물로 볼라치면 꽹가리는 "양"의 기운을 상징하면서 음색이 벼락과 같아 "우뢰"에 비유됩니다. 북은 장단이 강력하고 기세가 넘치여 "구름"에, 장고는 음색이 경쾌하고 절주감과 표현력이 풍부하여 "비"소리에, 징은 포용성과 긴 여운으로 "바람"소리를 상징합니다. 농악은 이런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기원을 함께 아우르는“천인합일”의 철학사상을 품고있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이런 철학사상을 지닌 농악의 씨앗을 중국대륙에 심어 한세기 남짓한 력사행정에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쳐 전승하고 발전시켜오면서 이주문화의 꽃으로 피워왔습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피땀으로 가꾼 이주문화의 가치와 농악무 정신을 전 인류적차원으로 보호하고 전승하려고 합니다.

사회자: 조선족농악무는 근원적으로 조선반도에 뿌리를 두고있다고 했습니다. 하다면 한국의 네티즌들이 중국측에 반발을 하는데는 일리가 있다고 봐야겠지요? 만약 한국에서 함께 유네스코에 신청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심수옥: 조선족농악무가 조선반도에서 기원된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꼭 한국의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전 조선민족의것이라고 하는것이 더 타당하겠지요. 샘은 하나지만 흐름은 갈래를 이루었습니다. 이미 150여년의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농악은 서로 다른 자체의 특색을 지니게 되였습니다.

조선족농악무는 동북지역의 풍토에서 백여년동안 조선족이민사의 변천과 함께 진화되여왔습니다. 문화는 그 지역 풍토와 그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농악무도 례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 삶의 변화와 함께 변화되였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의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단합하게 하는 정신적 지주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조선족농악무는 마당놀이에 그친것이 아니라 무대예술로 승화되였고 잇달아 상모의 제작과 기교 등 여러 방면에서 자체의 특색을 구비하였습니다. 조선족농악무는 조선족인민들의 지혜와 창조의 결정체입니다.

한국의 농악무는 본토문화이고 조선족농악무는 이주문화입니다. 굳이 농악무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함께 등록하자고 한다면 한국은 본토문화로서의 농악무를 신청하면 될것이고 중국조선족은 이주문화로서의 농악무를 신청하면 될것입니다.

그리고 문화유산이란 어느 누가 소유하느냐 하는 문제인것이 아니라 정신적유산의 문제로서 어떻게 보호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한 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세계적문화유산으로 보호하는것은 그 민족 전체에 혜택이 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관련 국가들에서는 서로 인식을 같이하고 책임과 사명을 같이하면서 함께 손을 잡고 힘을 합쳐 우리의 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잘 지켜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심수옥의 조선족농악무에 대한 확고한 소신과 철학적인 사고,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열정과 애착은 뭇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족했다.

긴장이 감돌던 대회장에서는 삽시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농악무의 보호와 발전 및 과제

2009년 9월, 중국조선족농악무는 중국의 유일한 무용류종목으로 드디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대표작명부”에 등재되였다.

연변주문화국 심수옥국장은 “이는 절대로 어느 한 개인이나 단체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세기를 걸치는 세월속에서 우리의 무수한 선인들이 자기 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각을 안고 끈질기게 지켜낸 보람”이라며 “우리 후세대들 역시 고도의 문화자부심과 문화자각을 안고 외래문화의 충격속에서 전통문화가 겪고있는 위기를 헤쳐가며 선조들이 남겨준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잘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2012년 8월5일, 왕청현《1050명상모춤기네스세계기록도전》 공연장면

그는 “단결 분투 개척 진취의 농악무정신”은 생산과 생활에 언제나 필요한 정신적무기로서 우리는 이 농악무정신을 널리 고양하면서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잘 가꾸어가자는 굳은 약속을 토파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이미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조례”와 “중국조선족농악무보호계획”을 출범하고 완벽한 보호,전승체계를 형성하였다. 연변군중예술관에서는 해마다 전국 조선족문화예술관계부문의 골간양성훈련반을 정기적으로 진행하면서 체계적으로 농악무기초리론과 예술기교를 전수하고있다.

또 2년에 한번씩 전국농악무경연을 조직하고있으며 연변박물관에 “중국조선족농악무전시관”을 개설하고 조선족농악무가 근 한세기에 걸쳐 걸어온 발자취를 전시하고있다. 그리고 농악무양성기지 보급망을 형성하였고 중국조선족무형문화유산총서 “중국조선족농악무”책자를 출판하는 등 리론적인 정리사업도 진척하고있으며 “어릴적부터 양성한다”는 전략적 견지에서 농악무를 학교교육에도 도입하고있다.

2012년 왕청현에서는 또 1050명이 참가한 상모춤표현으로 세계기네스북기록에 성공하였다. 2015년전국소수민족대회가 연변에서 열린 가운데 무형문화유산전시공연이 있었다. 농악무국가급전승인(2008년 선정) 김명춘은 “농자천하지대본”농기를 추켜들고 200여명의 대오를 거느리고 장쾌한 농악소리속에 농악무의 진수를 펼쳐보였다.

2014년 9월, 중미국교건립 35주년 "태평양 너머- 중국예술절개막식" 초청공연장에서 절찬을 받고있는 김명춘.

“조선족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 오랜 세월속에서 자기 문화를 이토록 잘 지켜낸다는것이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신강에서 온 한 대표는 격동되여 눈물을 흘리며 뒤말을 잇지 못했다.

일전 기자는 왕청현농악무예술센터에서 대표전승인 김명춘주임을 만났다. 그는 “아직은 공개하지 않는” 생태상모제작에 살손을 붙이고있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원생태농악무에 대한 연구와 발굴, 리론정리를 병진하면서“농악무에 깃들어있는 무궁한 내함은 그 깊이를 못다 알것 같다.”고 한다.

그는 농악무의 곡예성과 정채로움은 현시대인들에게도, 타민족, 타국인들에게도 쉽게 접수될수 있는 요소라며 힙합(댄스)과 결부한 기법들로 관상성을 높였고 호기심과 신비감을 넘어 누구나 즐길수 있는 기법들을 계속 고안하고있었다. 최근들어 청룡수미”(青龙收尾),잠자리점수”(蜻蜓点水)와 같은 장상모기법을 새로 창작해낸 그는 “조선족농악무가 전 인류적인 무형문화유산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진정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발굴해야 하며 또 무엇을 어떻게 보급하고 발전시켜야 할것인가를 잘 포착하고 추진는것이 조선족농악무의 영원한 생명력을 지키는 과제"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 사업을 잘하자면 관계일군들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안받침되여야 할뿐만아니라 반드시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농악무와 각급 전승인에 대하여 깊은 중시를 돌리고 실제적으로 대우해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길림신문 김청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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