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11] (김희관편11)
우리가 문화를 깊이 배우고 연구하자면 민속을 모르면 안되지요. 모든 민족의 문화는 민속이 토양이기 때문이지요.
2014년 봄부터 저는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에 초빙되여 도자기, 가구, 생활용품 등 민속문물에 대한 연구와 해석작업을 하고 있어요. 농업은행에서 사업하던 김인국이라는 선생이 몇십년간 만여건에 달하는 민속문물을 수장하고 민속연구원을 세웠어요. 저는 또 도자기와 민속품의 유래 및 용도에 대해 공부를 한지 20여년이 되였지요.
저는 지금쯤 어쩌면 연변의 한다 하는 민속해설사가 된거 아닌가 싶기도 해요.
고궁박물관 고급전문가 국가민간예술품박람회 최고 감정사 선국강(单国强 오른쪽 두번째)이 쓴 휘호 '민족혼 민속정'
물동이와 오지독 그리고 민예품
여러분들이 다 잘 아는 물동이는 할머님, 어머님들의 보물이지요.
‘흑토기 물동이는 할머님의 평생 보물/ 천지물 이어다가 자식 길러 3천여년/ 물동이 사라진 세상 할머님 생각나네’ 이건 저의 시조 습작이예요.
물동이는 시조에 썼듯이 3천 여 년 전 압록강변의 의주(지금 신의주의 농촌)에서 처음 출품되였지요. 그러한 물동이가 3천 여 년 래 압록강, 두만강 량안에서 생산되여 할머님, 어머님들이 가족의 식사와 빨래를 담당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기물이 된 것이지요.
지금 와서 3천 여전의 물동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때 것이나 지금 연변 량수토기공장에서 생산하는 물동이나 디자인이 그렇게도 똑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 모양새가 3천 여 년 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3천 여 년 동안 우리의 할머님과 어머님들께서 그 모양새를 즐겼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지요. 흙으로 빚어 구워낸 약탕관이나 쌀함박도 모두 그렇게 똑같이 한가지 디자인으로 3천여년을 전승해왔다는 것이 바로 우리 민족 민속 전승의 력사가 아니겠어요.
3000년전 물동이(자료사진)
한번은 중앙소학교의 학생들을 초청해 우리의 민속품들을 감상하게 했지요. 물론 물동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지요. 민속품감상이 끝난 후 학생들더러 간단한 작문을 쓰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한 녀학생이 “나는 무용대에서 물동이춤을 춥니다. 오늘 나는 그 물동이의 력사가 3천 여 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너무나 놀랐습니다. 앞으로 물동이춤을 출 때는 물동이의 나이가 3천년이라는 것을 생각하겠습니다…” 라고 쓴 것이였지요.
참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것이야 말로 우리가 전통문화를 대대손손 이어가도록 일깨워줘야 하는 도리가 아니겠어요?!
오지독은 지금도 물독, 쌀독, 김치독, 된장간장독으로 쓰이기도 하고 있지요. 오지독의 발상지는 두만강 남안의 회령이라고 해요. 두만강 량안에서 지금까지 전승되여 오고 있지요. 우리 말로 오지는 깊은 산골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오지독은 깊은 산골(坳地)에서 구워낸 것이지요.
1127년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키고 송휘종(宋徽宗)과 그의 아들인 송흠종(宋钦宗)을 포로하여 지금의 동북으로 끌고 왔는데 동시에 수천명의 문무관리와 궁녀 그리고 수많은 도공들도 함께 끌고 왔다고 해요. 그 시기 송나라의 도자기는 송휘종의 극찬과 배려하에 아주 발달하여 아름답게 제작되였지요.
그런데 송휘종을 따라 포로신세가 되여 온 도자기 균요(宋钧窑) 도공들은 회령일대에서 도자기를 빚을 수 있는 좋은 흙을 찾아냈고 더 나아가 벼집을 태운 재로 도자기 유약을 발명함으로써 아주 아름다운 오지독과 오지그릇, 오지병, 오지예술품들을 구워냈지요. 그러한 오지독기술은 두만강 량안에 전파되면서 지금까지도 회령과 연변에서는 오지독과 예술품 등을 제작하고 있지요. 이렇게 송나라의 균요기술은 두만강량안에 정착하면서 전승되여 왔을 뿐 아니라 후날 왜놈들이 바다를 건너와 균요도공들을 일본으로 잡아가 계속 균요도자기를 생산하다보니 지금도 일본에는 회령도자기류파가 그렇게 번성하고 있다고 하네요.
도자기 력사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사회의 발전사와 함께 하면서 진화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신라시기까지는 흑토기가 전부였지요. 물론 물동이, 약탕관, 식기 같은 흑토기 예술품들도 나름대로 력사적인 작용과 가치가 있은 것은 물론이구요. 고려시기에는 귀족들이 송나라 “상옥”(尚玉)의 영향으로 비취는 물론 고려청자를 소장하는 것을 부의 상징으로 여겼지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온 사회가 유교를 숭상하고 청렴을 강조하면서 백성들은 새하얀 소복을 입게 되지요. 단오절에는 “백의동포”들이 흰구름처럼 떼를 지여 들놀이를 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백자항아리가 백의민족의 상징물이 되는 거예요. 물론 지금에 와서 보면 신라토기, 고려청자, 분청자기, 조선백자는 모두 우리 민족의 도자기 유산이기에 손색이 없지요. 그러고 보면 매 하나의 민속품을 마주 할 때면 하나의 력사와 마주하게 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2015년 8월, 연길시진달래광장 국제회의전람중심에서는 제2차중국(연길)민간예술품박람회가 열렸어요. 국가민간예술품박람회 최고 예술품감정사이며 고궁박물관 고급전문가인 선국강(单国强)선생 등 전문가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각 지방 각 민족 전시회를 열고 민간예술품을 발굴, 교류, 매매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어요. 이런 예술품박람회는 경제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우리의 일상생활이 풍요로와지면서 예술품을 추구하는 인간의 문화적 욕구와 흥취를 표출하는 문명한 축제마당으로 되는 것이예요.
국가민간예술품박람회 최고 감정사 선국강(单国强)선생이 휘호를 쓰는 장면.
그분들이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에 광림하였어요. 그분들은 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의 민속예술품들을 아주 주목할 만 하다고 말씀하면서 그 중에서도 라전공예기법으로 장식된 반닫이는 전국소수민족민속예술품중에서 ‘국보급’보물이라고 평가하였어요. 그리고 흔쾌히 붓을 들어 ‘민속정 민족혼’ ‘民俗情 民族魂’이라는 휘호를 써주시는 것이였어요.
최근 30여년간 도시와 향진의 주택개발이 활발해지면서 민가에 오래 동안 보관되여 오던 귀중한 민화, 사진, 한복, 도자기, 반닫이, 식기, 문서들이 버려지거나 헐값에 ‘골동품장수’들의 손에 들어갔거나 외지로, 외국으로 팔려나갔어요.
례하면 지난 세기 80년대 개혁개방초기에 녀성들이 떨쳐 입었던 ‘연변한복’ , 퉁소, 수천, 농악, 물동이, 쌀함박, 찬장, 소수레 등도 민예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의 민예품들이 10년후, 100년후면 역시 귀중한 민속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민예품을 수집하는 것은 민속문화의 력사를 기록하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의 민속사는 물론 겨레의 문화사를 보존해가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제부터라도 집안에 굴러다니는 ‘애물단지’들이 좋은 민예품이 아닌가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어요. 그것이 바로 민속의 정을 나누는 것이고 민족의 혼을 다지는 일이 아니겠어요!
《아리랑》에 깃든 정과 한 그리고 혼백
민속에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즉 물질문화과 비물질문화가 있는 것이예요.
민속이라는 것은 재래로 내려오면서 우선 우리 조상들의 정을 담고 있어요. 민속이라는 거대한 문화는 우리 조상들의 정을 전달해주는 매체인 것이지요.
제일 가까운 것으로 옷장 하나를 보면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자손들의 옷을 깨끗이 빨아 다리미질하고 차곡차곡 개여 정성스럽게 옷장에 넣는 그 순간을 상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정인가요. 그래서 조상의 정과 민속의 정은 거의 같다고 봐야 하는 것이지요.
‘국보급’이라 인정받은 라전공예기법으로 장식된 반닫이(가운데)
민속의 정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답은 무엇일가요? 바로 민족의 혼이라고 생각돼요. 혼이나 얼에 관한 문제는 너무 큰 것 같아요. 하지만 민족의 혼이라는 것도 너무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 민족의 얼이다 의지다 욕망이다 그때 그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아요.
저희는 민족의 혼을 말할 때마다 늘 아리랑을 떠올리게 돼요. 1985년도에 미국에 가 공연할 때도 《아리랑》을 부르니까 무대 우에 서있는 배우들과 그 3, 4천명씩 되는 관중들이 하나가 되여 아주 눈물을 머금고 열창하는 것이였어요. 그렇게 《아리랑》이라는 민요 하나로 정이 닿았고 서로가 민족의 혼을 느꼈던 것이지요.
1987년 제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국장으로 사업할 때 일본의 NHK취재단을 영접한 적이 있어요. 물론 성위 선전부의 허락을 맡고 청해 왔어요. 그중에 프로듀서이며 감독인 미즈단이라는 선생이 저에게 잡지 하나를 불쑥 내밀더라구요. 보니까 《아리랑》연구 잡지였어요. 그는 이전에는 조선민족의 《아리랑》이 무엇이라는 걸 몰랐는데 이 잡지를 읽으며 점점 조선민족의 정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조선민족의 령혼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들으니 정말 마음에 와 닿는 것이였어요.
미국에서의 경험과 일본취재단 미즈단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리랑》이 다만 마흔다섯자에 달하는 민요만인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헤아려봐야 하는 민요라는 것을 깨닿게 되였지요.
《아리랑》의 깊이를 따져 그 력사를 살펴보니 적어도 리조 500년 그때는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아리랑은 정선에서 시작하여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밀량아리랑, 진도아리랑 경기아리랑 본조아리랑 해주아리랑 평양아리랑… 중국 연변땅에서도 장백아리랑 연변아리랑 아리랑이 대단히 발전해왔어요. 이렇게 하여 수백가지 수천가지 아리랑으로 번져나와요.
민속연구에 정지하는 김희관 선생과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 김인국 원장(뒤쪽)
《아리랑》이 여러가지 변종으로 발전한다는 자체가 민요의 문화전통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면서 민간에서 중얼중얼 외우는 이런 민요에도 민족의 정과 한이 담겨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참 《아리랑》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가 너무 크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였지요.
최근년간 연변주내의 민속촌, 민속박물관, 민속품상점, 민속공예가들을 찾아 방문하면서 보니 그 속에 아직도 표상적인 것이 많고 민속의 정을 느끼게 하거나 민족의 혼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너무나 부족한 거예요. 그리하여 앞으로 민속원에서 봉사사업을 한다든가 다른 지역에 가 도움을 준다든가 후배들을 위한 글을 쓴다 든가 꼭 민속정과 민족혼을 느끼게 하는 답을 제시해야 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되였어요.
그러면서 아리랑뿐만 아니라 민속원뿐만 아니라 민속박물관뿐만 아니라 또 다른 어떤 새로운 형식으로 우리의 민속 정을 느끼게 하고 민족 혼을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가 고민중인 거예요.
그러는 속에서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민속 정은 계속 될 것이며 우리의 민족 혼은 대대 손손 이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길림신문/글: 김청수 기자, 사진: 김성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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